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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아버지 상’ 수상한 시골 농부 오정면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박진숙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2.11.21 10:15:00

“자식들에게 베풀며 사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을 뿐이에요”
지난 10월14일 대한주부클럽연합회 강당에서 ‘훌륭한 아버지 상’ 시상식이 있었다. 가정화목에 힘쓰고 자녀들을 훌륭히 양육하며 봉사정신이 뛰어난 숨은 아버지에게 수여하는 이 상을 수상한 사람은 경상북도 상주에 사는 농부 오정면씨.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식들에게 자립정신과 봉사정신을 가르치고 있는 이 시대의 ‘참 아버지’ 오씨를 만났다.
‘훌륭한 아버지 상’ 수상한 시골 농부 오정면
대한주부클럽엽합회에서 제정한 ‘올해의 아버지 상’을 수상한 오정면씨(64). 그는 평범한 촌로이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상주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오씨는 옷차림에서부터 말투까지 여느 농부들과는 달라 보였지만 검게 그을린 얼굴과 투박한 손이 그를 천생 농민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서재에 들어서자 특이한 물건들이 벽면 하나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구슬을 꿰어 만든 모자,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와 가방 등이 그것. 이것은 ‘이반족’이 준 것, 저것은 ‘카얀족’하며 설명해 주는 오씨에게는 물건 하나하나가 무척 소중한 듯 보였다.
“부끄럽지요. 제가 ‘훌륭한 아버지 상’을 받게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이 ‘훌륭한 어머니 상’을 엄마에게 먼저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웃음). 왜냐하면 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한 일이거든요.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과장될까봐 수상식 때도 저 혼자 갔다왔어요.”
오씨는 매우 겸손해했지만 대한주부클럽연합회에 따르면 그는 많은 선행을 하고, 여섯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검소하게 생활한 점, 자식들에게 자립하는 의지를 갖고 항상 이웃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교육시킨 점 등이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라 여겨 시상했다고 한다.
오씨 부부는 슬하에 1남5녀를 두었는데 6명의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아들은 미국에서 성악공부를 위해 유학중이고, 딸 둘은 인근 중학교 교사로 있다. 단 한명에게도 물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오씨 부부의 자식 기르는 방법은 남달랐다.
“저희는 아이들에게 자립정신을 기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단 한가지도 부모가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지요. 중학교에 입학하면 상주시에서 자취를 시켰는데 집 얻을 때 한번 가보았을 뿐이에요. 그리고 방학이 되면 인근에서 봉사 활동하는 것이 아이들의 의무였지요. 큰딸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라고 서울로 보내 식모를 해보도록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시골에서 상경하면 거의 모두가 식모생활을 했거든요. 지금 유학간 아들도 학비며 생활비를 스스로 벌며 공부하고 있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방법과 베풀며 사는 삶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해 깨닫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6명의 아이들이 모두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졸업했고, 결혼도 자신이 원하는 배필과 스스로 장만한 살림도구를 가지고 시작하도록 했다. 자식들이 모두 그의 뜻을 따라주어 고맙다는 오씨에 비해 아내 문달임씨(64)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가난 체험 위해 큰딸에게 방학 동안 서울에서 식모생활 시키기도
“어릴 때부터 갑자기 비가 와도 우산 들고 학교에 찾아가 본 적이 없어요. 과외니 학원 같은 곳도 보낸 적이 없고요. 결혼할 때는 이불 한채 해주지 않고 일체의 혼수를 생략했는데 첫아이를 그렇게 시집보내고 나니 다음 아이부터는 소문이 나서 사돈댁에서 먼저 혼수를 생략하자고 말씀하시더군요. 밑에 세 아이의 결혼식을 합동으로 치른 것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어요. 모자라면 형제끼리 나눠 쓰고 서로 도와주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대견할 따름입니다.”
이 부부와 함께 사는 막내딸 순임씨(29)는 학창시절 아버지의 남다른 자녀교육법이 싫지 않았다고 한다.
“학창 시절의 봉사활동은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움이었어요. 아버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우리에게 무엇을 강요하신 적이 없었어요. 무엇이든 저희의 뜻과 선택을 존중해주시고 의논상대가 돼주셨죠. 주변의 친구들이 참 부러워했어요. 대화가 되는 아버지, 민주적인 아버지라고요.”

오씨는 경상북도 상주의 토박이 농부다. 무녀독남 외동아들에 일가의 장손으로 태어난 오씨는 대한신학교에 다니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싶었다. 하지만 홀어머니와 조모를 시골에 두고 도시로 나갈 수 없어 농부가 되었다. 신학교 시절 만난 아내는 서울의 좋은 집안 고명딸이지만 기꺼이 오씨를 따라 시골로 내려왔다.
“시골에 산다고 답답하지는 않았어요. 목회 일을 할 수 없지만 오히려 시골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지요. 농사를 지으면서 농번기가 끝나면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하고, 봉사를 못하면 돈을 모았다가 판자촌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보내는 활동을 꾸준히 했어요. 그리고 63년부터는 마을에 야학을 열어 중학교 진학을 못한 아이들을 데려다 공부를 시켰죠. 79년까지 계속했어요. 지금은 농촌의 생활개선 운동을 하면서 27년째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그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잡곡밥과 배추된장국, 취나물, 겉절이 등 시골 밥상이 도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손님이 왔다고 정성스레 대접하려는 그들의 마음이 전해져 밥상은 따뜻하기만 했다.
밥을 먹으면서 오씨 부부의 동남아 오지마을 봉사활동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말라리아 모기에게 물려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 우기 때 진흙길에서 발이 쑥쑥 빠져 걷기가 힘들었던 이야기, 원주민들의 환영식 이야기 등 듣기만 해도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아내 문씨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그곳에서의 생활이 떠오르는지 잔잔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아휴, 거기 음식은 먹지를 못해요. 나물도 이상하고, 고기를 기름에 대충 볶아서 내오는데 못 먹어요. 어찌 그렇게 사는지…” 하며 손사래를 쳤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들이 보고 싶어 벌써부터 짐을 꾸리고 있다는 게 오씨의 이야기다. 농부들이 쉬어야 하는 겨울철에 또다시 고된 노동을 하러 떠나는 부모를 지켜보는 막내 순임씨는 이젠 말리고 싶단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두분이 외국으로 다니기 시작하셨는데 겨울이면 부모님 없이 설 명절을 보내는 것이 참 싫었어요. 부모님이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이젠 건강이 걱정스럽죠. 점점 더 오지로 들어가시고 기간도 길어지고 있거든요. 무엇보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체력이 약하시니까 더 염려가 돼요.”
오씨의 아주 특별한 여행은 87년 4월 농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필리핀에 갔다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우연히 그곳에서 원주민들 마을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는데, 가서 보니 말로 듣던 것보다 더 심각한 그들의 삶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귀국해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돈을 모은 뒤 겨울에 배낭을 메고 아내와 네팔부터 시작해서 동남아 일대를 여행했다. 도울 수 있는 곳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아시아 지역의 미개발 종족을 계속 만나다 보니까 보르네오섬 일대가 가장 열악하더군요. 그곳은 먹을 것이 풍부하기 때문에 굶어죽지는 않지만 사람값을 하며 사는 사람이 적고 영유아 사망률도 매우 높았어요.”
오씨는 그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1년에 한번씩 기초의약품을 준비해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의 파푸아뉴기니 원주민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워낙 오지라서 걷는 것 이외에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가 없었지만 15년간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그들을 방문했다. 한번 들어가면 한 마을에 2∼3일간 머무르며 봉사활동을 한 뒤, 다른 마을로 향하는 그의 여정은 40여 마을을 돌아야 끝이 났다.
“가장 힘든 것은 걸어서 다니는 거예요. 가까운 마을은 4시간 정도 걸으면 닿지만 어떤 마을은 이틀 정도 걸어야 나오지요. 길이 없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마을은 다시 도시를 경유하면서 조금 쉬었다가 다른 길로 들어갑니다. 걷는 데 이제 이골이 났어요(웃음).”
소수 원주민 민족들은 워낙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가져가는 약품은 그들에게 마치 신이 내려준 물건과도 같았다.
“두통약, 관절통약, 신경통약, 피부염에 좋은 약이 대부분이에요. 여기서는 흔한 약이지만 그곳에서는 대단한 것들이지요. 그리고 몇년 전부터는 수지침을 놓아주고 있어요.”
오씨 부부는 그곳 종족에게는 구세주요, 절친한 친구다. 이들이 방문하면 귀빈 대접을 하며 고기를 내오고, 선물을 준비하면서 대대적인 환영을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오씨는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고.

‘훌륭한 아버지 상’ 수상한 시골 농부 오정면
“선진국 사람들이 가면 우쭐해하면서 선진문화가 대단한 것인 양 뻐기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종족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가 파괴될 수 있어요. 그래서 전 그들의 소중한 문화가 깨질까봐 무척 걱정을 많이 했어요. 우리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조심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려고 노력합니다. 저희는 단지 그들이 건강하게 살도록 돕는 다정한 이웃이지 그들에게 문명화된 삶을 살라고 가르치러 가는 건 아니거든요.”
유기농으로 4천2백평 남짓의 논농사를 짓는 오씨는 일년 내내 수확한 것들을 팔면 1천2백만원 남짓의 돈이 손에 쥐어진다. 이 돈으로 한해 식구들이 쓸 생활비와 경조사비, 다음 농사를 준비할 비용을 제한 뒤 안 쓰고 안 먹으며 모은 돈 5백만원과 자식들이 모아 준 5백만원을 합쳐 떠난다.
약 6백만원 정도를 고스란히 원주민을 위한 약품과 선물에 투자한다는 오씨는 올 12월에도 3개월 일정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올해 준비한 선물은 손톱깎이. “우리에게는 하찮은 물건이 그들에겐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모른다”며 꺼내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서 원주민들의 이웃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엿보였다.
그가 하는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름마다 현지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애아동을 한명씩 선정해 우리나라에서 수술을 받도록 돕고 있다. 그동안 그의 손을 거쳐간 아이만도 13명이나 된다. 현지의 도시지역 선교사들이 아이를 선정해 연락을 하면 그는 비행기표와 여비를 보내 데려온다. 대부분 얼굴 성형이 필요한 구개파열(언청이)이나 심장병을 앓는 시한부 아이들이다.
아이가 오면 수술을 받도록 준비하고 수술 끝난 뒤 오씨의 집에서 한달 가량 요양을 시키고 보낸다. 이때도 그의 가족들은 한번 더 뭉쳐서 돈을 모은다. 한 아이당 1천만원 가량의 비용을 지출하는 오씨는 자신이 하는 이 일을 ‘가족 프로그램’이라고 불렀다.
평범해 보이는 농부의 삶과 봉사활동을 하는 선구자적인 삶, 훌륭한 아버지로서의 삶이 함께 공존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내면에 자리한 강직함 때문일 것이다. 오씨가 걸어온 발자취 하나하나가 결코 굳은 신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걸을 수 없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할겁니다. 제가 걷지 못해 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제 사위들 중에서 누가 이어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를 이어서 그들을 돕게 된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수해 때문에 일찍 벼를 베었다는 오씨 가족은 마당에 하나 가득 감을 펼쳐놓고 곶감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해 수확한 곡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배고픔을 잊게 하는 것처럼 그가 거두어들인 곡식은 바다를 건너 오지마을 종족들의 마음을 배부르게 만들고 있었다.

여성동아 2002년 11월 4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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