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이유있는 변신

‘축구’로 더 유명해져 라디오 방송까지 진행하는교수 장원재

“월드컵 전에는 ‘교수가 무슨 축구냐’는 비아냥도 많이 들었는데, 세상 참 많이 바뀌었네요”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허윤형 ■ 사진·지재만 기자

2002. 11. 14

지난 월드컵 이후 ‘축구 칼럼니스트’로 유명해진 장원재 교수(숭실대 문예창작학과). 축구 관련 책을 2권이나 낼 정도로 ‘축구광’인 그가 이번에는 라디오 진행자로 변신했다. 월드컵 기간에는 밴을 전세 내어 온 가족과 함께 축구경기를 관람할 정도로 ‘뜨거운 축구사랑’을 과시하고 연극에도 조예 깊은, 장교수의 매력 탐구.

‘축구’로 더 유명해져  라디오 방송까지 진행하는교수 장원재
지난 월드컵 이후 ‘축구 칼럼니스트’로 더 유명해진 장원재 교수(36). <속을 알면 더 재미있는 축구 이야기> 등의 축구 관련 책을 낼 정도로 ‘축구광’인 그가 이번에는 방송인 차인태씨의 뒤를 이어 라디오 방송 <장원재의 MBC 초대석>의 진행자가 됐다. 법륜 스님을 모시고 진행한 첫 방송에 이어 평양공연을 마치고 온 가수 이미자, 시사평론가 유시민씨 등이 출연했다.
“솔직히 많이 떨립니다. 늘 초긴장 상태죠. 처음 이 프로를 같이 해보자는 PD의 연락을 받고 쉽게 승낙한 것이 후회될 정도였죠.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초대자가 아닌 진행자의 신분이라는 게 은근히 부담되더라고요.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그렇게 많은 방송 출연과 인터뷰를 하면서 하나도 안 떨었는데 말이죠.”
월드컵 기간 동안 ‘축구 말품’ 파느라 1백80여회 방송 출연
그렇다. 그가 지난 6월과 7월, 두달 동안 각종 인터뷰 및 방송에 출연한 횟수는 무려 1백80여회. 하루에 세번꼴로 ‘말품’을 팔아야 했다. 심한 날은 20여회에 이르는 인터뷰를 했다. 미리 한 장소를 정해놓고 수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장교수의 한마디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였을 정도다.
화제가 월드컵으로 돌아가자 다소 작은 장교수의 눈이 빛을 내며 커지기 시작했다. 6월의 붉은 물결과 함성, 진한 감동이 그의 눈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장교수는 월드컵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축구 전도사였다. 하지만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는 ‘교수가 무슨 축구냐’는 비아냥 섞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이며 축제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많은 분들이 저로 인해 스포츠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해줄 때가 가장 좋았죠. 뭔가 한가지를 열심히 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했어요. 그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었죠.”
장교수는 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밴을 전세 내어 무려 19게임을 관람했다. 그동안 신세졌던 분들과 가족을 위해 모두 자비로 수천만원의 입장료를 지불했을 정도로 이번 월드컵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그는 광주에서 벌어진 스페인전 경기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승부차기에서 홍명보 선수가 골을 넣고는 환한 웃음을 짓고 달리는 모습을 봤을 때 그는 부모님과 얼싸안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장성한 후에 부모님과 서로 껴안고 우는 것이 그리 쉬운가요. 너무 감격스러워서 한참 울었지요. 나중에 저희 아버님이 ‘어렸을 때는 내가 원재 손을 잡고 축구장에 갔었는데, 이제는 다 큰 원재가 나를 축구장으로 데리고 다닌다’며 크게 기뻐하시더군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축구 마니아’ 장교수는 다섯살 때부터 자신의 손을 이끌고 축구장에 데리고 갔던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축구장이 주는 묘한 분위기에 매료된 것도 그 무렵. 사력을 다해 뛰는 그라운드의 선수들, 쉴새없이 작전을 지시하는 벤치, 함성의 물결로 귀가 얼얼할 정도의 열정이 느껴지던 관중석 등은 장교수의 작은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하지만 키가 작고 왜소했던 그는 축구 선수를 향한 꿈을 일찍 접고 한동안 심한 열등감에 빠져야 했다. 축구에 소질이 없다고 느낀 그가 선택한 것은 축구 심판. 축구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던 그는 그때부터 밤낮으로 축구 룰을 익혀 심판을 보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무려 50게임에 출장했을 정도. 문구점에서 노란 도화지와 빨간 도화지를 구입해 경고 카드를 만들고, 옛날 유럽 동전을 구해 경기 시작 전에 사용했을 정도로 제대로 된 심판이었다고. 급기야 다른 학교에서 초빙(?)해 원정을 나갈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축구’로 더 유명해져  라디오 방송까지 진행하는교수 장원재

장원재교수는 늘 ‘세상을 배운다’는 자세로 방송에 임하고 있다고 한다.

장교수는 경기고를 나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후 성당 성가대에서 만난 아내와 4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고는 함께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대 골드스미스 컬리지 연극학과 석사학위와 런던대 로열럴러웨이 컬리지 연극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가 영국에서 10년 동안 살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감을 잘 잡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전 이렇게 말하죠. ‘영국에서 월드컵 두번, 올림픽 게임 두번, 유럽선수권대회 세번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웃곤 해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히 축구 전도사다운 표현이었다. 영국에서도 그의 축구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그가 가는 곳마다 축구팀이 창설될 정도였다. 재영한인축구리그 8개 팀을 창설하여 3년간 운영하기도 했고, 한 스포츠신문의 통신원으로 4년 가까이 일하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축구장으로 향했다.
장교수가 축구만큼 미쳐있고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연극이다. 장교수의 아버지가 어린 그를 축구장으로 데리고 다녔다면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고 영화관, 미술관 등으로 데리고 다녔다. 중학교 때는 반 친구 중에 아버지가 극단 단장인 친구가 두 명 있었던 덕분에 무료 입장객이 되어 연극을 볼 수 있었다. 연극에 심취해 극단을 드나들며 ‘맹구’로 잘 알려진 이창훈을 만난 것도 그때다. 그는 극단 <목화>를 아끼는 사람 중 한 사람인데, 이제는 유명한 중견 배우가 된 김학철, 정원종, 정은표, 성지루 등의 배우들과 무명 때부터 잘 알고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극단 <목화>를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연출가 오태석씨다.
“선생님이 가끔씩 우리는 전생에서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하죠. 제게는 여전히 흠모의 대상이예요.”
연극과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왔다는 장교수는 올해초 <오태석 연극:실험과 도전의 40년>이라는 책 출간에 인터뷰어로 동참했고, 내년 5월 공연을 목표로 <내 사랑 DMZ>를 가족용 뮤지컬로 확대 개편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장교수가 오태석이라는 연극계의 대가를 얼마나 흠모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동안 을 거쳐간 이득렬, 홍사덕, 김한길, 유시민, 차인태씨에 비해 어린 나이에 프로그램을 맡게 돼 부담이 간다”는 그는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는 이 프로그램이 마음에 쏙 든다고 한다.
“저는 그분들이 살아온 인생을 농축해서 들려주시는 것에 매력을 느껴요. 방송을 하면서 혼자 감동받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죠. 제 역할요? 글쎄요. 그 분들이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아닐까 해요. 아직 연륜이 짧은 제게는 많은 도움이 필요한 프로그램이죠. 전 30대라는 나이가 새로운 것에 끊임없이 투자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정성껏 그릇을 빚을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고요. 전 늘 제 그릇의 크기를 늘려보고 싶어 모험을 하죠. 앞으로 세상을 배운다는 자세로 프로그램에 임할 생각이에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상암경기장에서 벌어진 한국과 독일의 준결승전. 한국팀이 패배한 후 TV 브라운관에 클로즈업된 한 소녀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예쁘게 딴 소녀는 한국팀이 패배한 후 한동안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손으로 때리며 서럽게 울었다. 온 국민을 두 번 울게 만들었던 그 초등학교 2학년 소녀는 장교수의 큰딸. 올 12월이면 열살 터울의 예쁜 쌍둥이 동생을 얻게 된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에 쌍둥이를 얻게 되었다며 활짝 웃는 ‘토토로’ 장 교수의 모습에서 축구 전도사로서의 넉넉한 면모를 볼 수 있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