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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화제의 인물

노벨 화학상과 물리학상 휩쓴 두명의 일본인 과학자

“학사 출신 무명 연구원, 도쿄대 꼴찌 졸업한 괴짜 교수…두 사람의 특이한 삶에 관심 집중”

■ 글·이영이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02.11.14 12:40:00

일본인 과학자가 올해 노벨 물리학상에 이어 노벨 화학상까지 타게 되면서 일본은 잔칫집 분위기다.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된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는 학사 출신 무명 연구원.
물리학상의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 도쿄대 교수는 도쿄대를 꼴찌로 졸업한 괴짜로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이들의 과학분야 공적뿐 아니라 특이한 삶의 방식이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부와 명예에 무관심, 연구에 몰두하려고 승진시험도 거부한 연구광
노벨 화학상과 물리학상 휩쓴 두명의 일본인 과학자

노벨상 수상 이후 두 사람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방문했다.

‘왕자가 된 거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게 된 다나카(43)는 어느날 갑자기 왕자가 된 거지처럼 자신의 수상이 믿어지지 않는 듯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좀 나사가 빠진 듯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기인(奇人)’ 이미지가 더욱 호감을 주고 있다.
지난 10월9일 오후, 그는 노벨상 수상결정을 알리는 국제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예? 제가 노벨상이라고요?” 정밀기기제작소의 연구원인 자신이 노벨 화학상 수상자라니….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 과학계는 물론 모든 국민이 노벨상을 받게 된 이 무명 연구원이 누구인지 의아해했다.
이날 처음 그가 기자회견장에 작업복 차림으로 나왔을 때만 해도 행동거지가 어설퍼 보는 이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지 못해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노벨상 수상 결정 후 그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한편의 따뜻한 코미디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만나 오찬을 한 직후 기자들이 무엇을 먹었느냐고 질문하자 “생선구이랑… 그리고 뭘 먹었더라… 죄송합니다. 이럴 때는 무얼 먹었는지 꼭 기억해뒀어야 하는 건데…”라며 말을 더듬었다.
수상 결정 다음날 회사 출근 직후 여직원 대표에게서 축하 꽃다발을 받고서는 “원래 나는 ‘모테나이군(モテナイ君·여자에게 인기 없는 남자)’이다. 여자한테 꽃다발 받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며 감격했다.
스웨덴 대사로부터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수상식 때 댄스파티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춤을 춰본 적이 없고 아내도 드레스가 없다. 걱정거리가 또 하나 늘었다”며 멋쩍어했다. 또 취재진이 2백여명 몰리자 “왓, 왓” 큰소리로 놀라며 꽁무니를 빼더니 마이크 앞에 앉아서는 “이제 좀 익숙해졌지요”라며 기자들을 웃기기도 했다. 친정에 갔다가 돌아온 부인에게 “일이 이렇게 돼버렸어”라며 수줍게 웃더니 “당신이 왔으니 이제 직접 세탁을 안해도 되겠군”이라고 안심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황당하고도 엉뚱한 발언은 단순히 사람을 웃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나 부에 무관심한 대신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준다.
83년 시마즈 제작소에 입사한 그는 부장도 과장도 아닌 ‘주임’. 동기들이 승진할 때 자신은 “연구에 몰두하겠다”며 승진시험을 거부했다고 한다. 연봉은 8백만엔(약 8천만원)으로 19년 근속한 대기업 사원들(보통 1천5백만엔 안팎)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그가 개발한 ‘소프트레이저 탈착법’은 단백질 분자량을 쉽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신약을 개발하거나 암을 조기 진단하는 데 크게 기여한 기술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과 기술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생각해 국제특허등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 기술을 개발한 후 회사로부터 받은 보상금은 1만1천엔(약11만원)에 불과하다.

노벨 화학상과 물리학상 휩쓴 두명의 일본인 과학자

다나카와 부인 유코.

이번 노벨상 수상 후 회사로부터 상금 1천만엔(약 1억원)을 받게 되자 그는 몹시 당혹스러워 하면서 “평소 갖고 싶었던 디지털카메라는 5만엔이면 되는데…. 너무 거액을 받게 돼 도대체 어디다 써야할지 모르겠다”고 더듬거렸다. 또 회사가 노벨상 기념연구소를 설립하고 그를 소장으로 임명했는 데도 한 강연회에 참석해 “주임 다나카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해 강연장이 웃음바다가 됐다.
서민적이고 욕심이 없기는 그의 부인 유코(37)도 마찬가지다. 노벨상 결정 이튿날 아침부터 신문, TV로부터 취재요청이 쇄도하자 “지금도 보통 주부이고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정말 완전한 주부로 되돌아 갈 것”이라며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렸다.
무엇이 다나카를 노벨상 수상으로 이끈 것일까. 그는 수상소감에서 “모친이 나를 낳고 곧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성인이 된 후 들었다. 그때부터 어른도, 아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듯이 모친에 대한 강한 그리움이 연구의 원동력이 된 듯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26일 만에 사망했다.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39세로 고령출산이었다. 결국 작은아버지 부부가 그를 맡아 친자식처럼 키웠다. 작은어머니 다나카 하루에(77)는 “어릴 적 다나카는 자기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아이였다”고 회상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과 후 친구들과 노는 일도, 싸움하고 울며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여덟살 위 형인 마사유키(51)는 “신문을 오려 스케치북에 붙이고 사건발생 장소를 지도에 표시하는 등 혼자서 뭔가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그의 집안은 3대째 목공구를 판매하거나 수리하는 일을 해왔다. 장인정신이 투철한 작은아버지를 도와 작은어머니도 가게에서 경리를 담당했다. 그러다 보니 자녀교육에 거의 신경쓰지 못하고 자유롭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공부하라고 말해본 적이 없어요. 학원도 다닌 적이 없고요. 학교에서 10등 정도 한 것이 한두 번 정도. 다나카가 학교에서 돌아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별로 기억이 없군요.” 그를 길러준 어머니는 “다행히 다나카가 노벨상을 받게 돼 그동안 충실하지 못했던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수상은 다나카에게 너무나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자신이 졸업한 도호쿠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됐다. 학사학위밖에 없던 그가 돌연 박사로 불리게 됐다. 이 대학에서 일본인이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처음. 또 회사에서도 주임에서 일약 임원대우로 승진한데다 노벨상 기념 연구소 소장에 취임하게 됐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내가 언제 다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벌써 아이디어 거리가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위험도가 높은 인간을 높이 평가할 회사가 있겠느냐”고 잘라 말했다.

스케일이 크고 호방한 성격,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강하게 추진하는 무장(武將) 스타일
노벨 화학상과 물리학상 휩쓴 두명의 일본인 과학자

고시바 교수와 부인 교코.

고시바 교수(76)의 인생도 더듬어 보면 청년시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 경험이 후에 탁월한 창조력과 강한 추진력으로 이어져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됐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은 군인 또는 음악가. 직업 군인이었던 부친의 영향이 컸다.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최고의 엘리트 코스인 도쿄육군유년학교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팔이 불편해지는 바람에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몸이 튼튼했다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했을지도 모르는 운명. 인생 새옹지마라고 주변에서는 말한다.
갑자기 찾아온 병마. 소아마비로 입원하면서 물리학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아인슈타인의 라는 책을 선물한 것. 병상에서 이 책을 읽으며 물리학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학창시절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고교진학에 실패해 재수를 하기도 했다. 고교성적은 중간 정도. 고교시절에는 항상 주머니에 하이네의 시집을 넣고 다니면서 즐겨 읽었다.
대학입시를 앞둔 12월 기숙사내 목욕탕에서 수증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데 물리교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시바는 물리과목이 젬병이다. 물리학과 진학은 불가능하다.” 이 한마디가 그의 진로를 확정했다. 교사의 말에 자극을 받은 그는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던 동급생 친구를 가정교사로 삼아 한달간 이를 악물고 시험준비에 몰두했다.
도쿄대 입시 때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수험생 모두 바짝 긴장해 있는 데 고시바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그 순간 교실 안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태연하게 “감독 선생님. 담배 좀 피워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도쿄대 이학부 동급생인 후지타 히로시(藤田廣·73) 도쿄대 명예교수는 지금도 50여년 전 광경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그런 불량학생은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입학식에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학업보다 아르바이트에 전념했다. 직업 군인이었던 부친이 퇴직하는 바람에 통역 아르바이트나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 일주일에 하루밖에 학교에 나가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학업성적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도쿄대 수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는 실험 두 과목뿐, ‘양’ 10개, ‘가’ 4개를 기록했다.
고시바 교수는 올봄 도쿄대 졸업식에 초대받아 축사를 하면서 “나는 물리학과를 꼴찌로 졸업했다”고 털어놓고 자신의 성적증명서를 대형 스크린으로 비췄다. 그는 “인생은 졸업 후에 자신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밀고 나가느냐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전하고 싶다”고 뒤에 설명했다. 그는 미국 로체스터대에 유학할 때 자신이 직접 추천장에 ‘성적은 별로 안 좋지만 그렇게 바보는 아니다’라고 쓴 뒤 추천교수의 사인을 받아냈다.

학창시절 그를 떠올리며 ‘전국시대 무장(武將)’을 연상하는 친구들이 많다. 스케일이 크고 호방하며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 연구자가 된 후에는 실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곧바로 실현시키는 강한 추진력으로도 유명했다. 학교에서는 예산을 따내는 ‘명인(名人)’으로 평판이 나있을 정도.
노벨상 수상의 최대 공신인 태양중성미자 관측장비 ‘가미오칸데’ 설치 과정을 보면 그의 추진력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가미오칸데 설치 계획을 세운 것은 78년말. 미국에서도 비슷한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같은 싸움법으로는 진다”며 특대 광학자 증배관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80년 첨단기업인 하마마쓰 호토니크스의 히루마 데루오 사장에게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직경 26인치짜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는 당시 외제 장비의 다섯배 이상의 사이즈. 당연히 히루마 사장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에 고시바 교수는 자신이 히루마 사장과 동갑에 생일이 하루 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내가 하루 먼저 태어났으니 형이다. 이번만큼은 형이 하는 말을 들어라. 노벨상감 연구가 가능하다”며 설득했다.
결국 히루마 사장은 고시바 교수의 끈질긴 설득으로 제조에 착수하지만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고시바 교수는 자신의 조수나 학생들을 공장에 파견하는 등 기술적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원 20여명이 작업에 매달린 지 꼭 1년 만에 광학자 증배관 1천개를 완성했다. 이중 2백50개만 36만엔(약 3백60만원) 정가를 받고 나머지 7백50개는 기부했다. 이번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히루마 사장은 “고시바 교수가 노벨상 약속을 지켜줬다. 당시 제조원가만 해도 1억엔(약 10억원) 이상 손해였지만 덕분에 교과서에 없는 기술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노벨상 영예의 배경에는 정부를 설득, 1백억엔에 이르는 거액의 예산을 따낸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자질도 빼놓을 수 없다. 연구 중요성을 강조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대장성 관리를 납득시킨 것은 사업가적인 교섭력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 과거 ‘가미오칸데’의 성과를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 그는 예산남용으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밀어붙였다.
그렇다고 예산을 낭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제자들에게 “우리는 국민의 혈세로 꿈을 추구하고 있다. 관측장치를 살 때는 메이커가 부르는 대로 사면 안된다. 끝까지 값을 깎아라”고 닥달하기 일쑤였다.
학생들에게 그는 ‘도깨비 교수’로 통한다. 대학원생의 연구발표를 “유치원생 수준”이라며 혹평하는 등 가차없이 야단치지만 일단 연구실을 나오면 ‘따뜻한 할아버지’로 변한다. 집으로 학생들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일도 즐긴다. 이번 노벨상 수상 인터뷰에서도 그는 “가장 기쁜 일은 제자들이 훌륭하게 성장한 것”이라며 “앞으로는 제자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성동아 2002년 11월 4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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