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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내 삶의 아름다운 깃발로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이정하(시인) ■ 사진·조영철 기자 ■ 장소협찬·한마당파스타

입력 2002.11.10 19:24:00

그래. 산다는 게 뭐 대수랴.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것의 배경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했다지만, 배경까지는 못 되더라도 잠시나마 몸을 녹일 수 있는 톱밥난로 하나쯤은 마련해주는 그런 삶이 되어야지. 그래서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행복해 하는 것을 보아야 할 터. 온기로 환하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얼굴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추억이 내 삶의  아름다운 깃발로
또 한 해가 지나고 있다. 세월은 참 빠르다. 기다려 주거나 더디 가는 법이 없는 것이다. 산다는 건 어쩌면 이렇듯 모든 걸 떠나보낸다는 뜻이 아닐까. 언제까지나 내 곁에 남아주는 건 없기에. 신기하고 묘한 것은 내가 원하고 간직하고 싶은 것일수록 더 빨리 내게서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흐르는 세월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때가 있었다. 지나는 순간 순간이 아까워 허둥대던 그 시절, 흐르는 시간보다 내가 더 빨리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못내 애를 태우며 조바심을 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외려 내가 흐르고 말았다. 하기사, 흐르는 것이 어디 세월뿐이었으랴. 바람도 흘렀고 산천도 흘렀고 나도 흘렀고 너도 흘렀다. 우정도 흘렀고 사랑도 흘렀고 꿈도 희망도 삶도 흘렀다. 또 그것들은 다시금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흐르는 것의 속절없음이여….
그러고보니 어느덧 내 나이 불혹을 넘어섰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나이를 의식하는 법이 없었지만 이젠 자꾸만 그 무게를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기게 된 주된 증상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나는 자꾸만 옛날 생각이 떠오른다. 옛날에 만났던 사람이 그립고, 지나온 옛일들이 정겨운 것이다.
최근 나는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 또한 지나온 옛일이 그리울 터라 우리는 죽이 잘 맞는다. 그때의 우리보다 더 큰 자녀를 두고 있는 친구도 있지만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스스럼이 없다. 욕하고 때리고 싸우기는 해도 번드르르한 말로 결코 자신을 포장하는 법이 없어 대하기가 편하다.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면들을 쓰고 살아왔던가. 여태껏 자신들을 치장해왔던 것들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들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 한 아이. 내가 만나보고 싶었던 여학생이 있었다. 두고두고 떠올리며 소식 알고팠던 아이. 살아가면서 많은 것이 묻혀지고 잊혀지더라도 그 애의 이름만은 내 가슴에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은 언젠가 바람 편에라도 그 애를 만나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랬던 그 애를 동창 모임에서 만나게 되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그 애의 환한 웃음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어쩌면 나는, 아니 우리는 그것을 찾기 위해 자꾸 뒤를 돌아보고,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연극을 했다
추억이 내 삶의  아름다운 깃발로
거짓웃음, 거짓말, 거짓행동을 스스럼없이 꾸며내며 온갖 위장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줬다. 그러다 거울을 봤다. 참 많이 변했다는 건 대번에 느껴지지만 어떻게 변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가슴 안쪽은 더더군다나.
분칠을 벗겨내고, 여기저기 남아 있는 붓자국을 지워낸다고는 했지만 아직도 내 얼굴 어딘가에는 깜박 잊고 지우지 못한 분장의 찌꺼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자국 그대로 나는 잠이 들 것이고, 눈을 뜨자마자 또 정신없이 집을 나설 것이다. 따지고 보면 관객도 없는 텅 빈 무대에서 무엇을 잡자고 이리도 허우적거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별이 보였다. 서울의 밤하늘에도 별이 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실은 내가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지 별은 늘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옛날 생각이 또 났다. 별은 그때의 별이겠지만 그 별을 바라보는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기에. 그래, 내 유년의 초겨울밤은 밤하늘에 돋아난 별들을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곤 했다. 소피가 마려워 한밤중 잠이 깼을 때, 마당에 내려서서 바짓가랑이를 내리는, 그 잠에 취한 눈으로 우르르 쏟아지던 은빛 가루들….
한동안 별을 잊고 살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밤하늘을 올려다 본 지 오래다. 별을 볼래도 볼 수 없는 것이 요즘의 하늘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별은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다. 변한 것은, 공해로 뒤덮인 하늘처럼 온갖 탐욕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이다.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보니 여유가 없었고, 여유가 없다보니 초조했다. 갈수록 혼탁해지는 마음이 느껴져 답답할 때도 많았다. 가끔 별이 보이기도 했지만 내 눈에 잠깐 스치고 지나갈 뿐 가슴에 담아둔 것은 아니었다. 별을 보며 미래를 꿈꾸던 유년 시절, 그때의 꿈은 지금쯤 어느 하늘을 헤매고 있을까.

추억이 내 삶의  아름다운 깃발로
사진 한장 한장마다에 얽혀 있는 추억을 가늠하느라 나는 밤늦도록 잠 들지 못했다. 그때는 왜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지금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누군가가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난 지난 시절이 그리웠다.
시간을 되돌려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다시금 지금 이 순간으로 걸어온다면 난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과거를 생각한다는 것은 현재의 나에 대해 아쉬움이 없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지금 이렇지는 않을 텐데, 그때 내가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등등.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 지금이 과거가 되어 있을 미래를 한번 떠올려보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나 일이 먼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 과연 잘했다고 고개 끄덕일 수 있는 것인지. 그러고보니 또 생각난다. 며칠 전에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 인숙이가 하던 말. 열심히 해선 안돼, 잘해야 돼. 도대체 뭐를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아무튼 무언가를 잘해야 하는 것에는 나는 별다른 이견을 달 수 없었다.
하지만 인숙아, 나는 네게 이 세상에 완전함이란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좀 모자라고 좀 덜 다듬어진 채로 세상에 태어나기에 우리는 그 완전함을 향해 전력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잘하면 인간은 ‘오만’이라는 죄를 짓기 십상이다.
완벽한 사람보다는 어딘가 좀 채워줘야 할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치 빈터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 어딘가 모자라는 구석이 있음으로 해서 그 점을 서로 감싸주고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그러니 일단 열심히 하는 자세가 중요하겠지.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치고.
마음속의 화로가 필요하다
추억이 내 삶의  아름다운 깃발로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겨울이 다가온 것이다. 부는 바람을 보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던 시인이 있었다. 실은, 평온할 때보다 무언가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삶의 의욕을 더욱 느끼는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여태껏 자신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어느 시인도 있었다. 그렇다. 바람은 길거리나 들판에서만 부는 것이 아니었다. 내 삶에도, 공허한 마음속에도 바람은 불고 있었다. 정신차리라고. 바짝 정신차려 살라고.
이런 때일수록 마음속의 화로가 필요하다. 마음속의 화로를 켜 주위 사람들에게 그 따뜻함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난 왠지 자꾸만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다. 결코 날씨 때문만은 아닌 그 무언가로 인해 자꾸만 춥다. 그러니 웅크릴 수밖에 없고, 웅크려 있다보니 산다는 것이 왜 이리 재미없고 고달픈지 모르겠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썼을 때 확 구겨 쓰레기통에 처넣듯 내 삶도 그렇게 구겨버리고 싶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어찌하랴. 원고지는 많이 준비되어 있지만 내 삶은 단 하나뿐인 것을.
겨울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서로 함께 손잡고 살으라고, 그렇게 온기를 나누며 살라고 겨울은 있는 것이다.

여성동아 2002년 11월 4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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