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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이 남자에게 배운다

'보통 아빠' 한치선의 감성 육아법

“아이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폭탄, 어른들은 그 감성에 불을 질러줘야지요”

2002. 10. 14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아이들을 이해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시그림을 처음 시작했다는 서예가 한치선씨는 상상력을 키우는 데 시와 그림만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시그림을 하면 어른들이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동심의 순수함과 따스함을 배우게 된다고. 한치선씨에게 ‘시그림’을 통해 상상력과 표현력을 계발하는 방법을 들어보자.

“‘시그림’이란 한 가지 주제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제가 만든 말인데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시화는 그림 안에 시가 들어 있지만 시그림은 시와 그림이 각각 독립된 작품이에요. 시그림을 택한 이유는 시화보다 더 쉬울 것 같아서죠. 시화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시와 그림 외에도 서예 실력까지 필요하거든요.”
한치선씨(41)가 두 딸 보람이(14), 가연이(13)와 함께 정식으로 시그림을 시작한 것은 지난 99년. 보람이가 초등학교 5학년, 가연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전에도 이들 가족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시 짓는 놀이를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삼행시 짓기, 사행시 짓기를 즐겨 했고, 그다음에는 단어 몇개를 제시해주고 그 단어들이 들어가는 시를 짓도록 하는 식이었다.
한씨가 아이들과 시 짓는 놀이를 했던 이유는 상상력과 표현력, 어휘력 등을 확장하는 데 시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는 텔레비전보다는 만화가, 만화보다는 책이, 책보다는 시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느 곳을 가든지 손에 메모장을 들고 가게 했다고 한다. 덕분에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곧 메모장을 펴서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매일 아침에 일어나 지난 밤에 꾸었던 꿈을 기록했다.
“3년 전쯤, 가족끼리 여행을 가던 차 안에서 가연이가 ‘아빠, 달은 세상에서 하나죠?’라고 물었어요.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럼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모두 하나였을 거야!’라고 대답했죠. 제 엉뚱한 말에 온 가족이 한바탕 웃고 난 뒤 그것을 소재로 시를 지어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초등학교 4, 5학년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제법 괜찮은 시가 금방 나왔어요.”
다른 세상에서 하나
다른 하늘에서 우리는 / 지금과 달리 / 모두 같은 하나의 영혼이었대요. // 겉표지가 다르고 / 속내용이 다르지만 / 아주아주 속은 같은 우리는 // 다른 세상에서도 / 하나였대요.(한보람)
차 속에서 / 내가 물었다. / “달은 세상에서 하나죠?/ 아빠께선 엉뚱하게 / 다른 소릴 하셨다. / “다른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였지.” / 우리 가족은 모두 / “오잉~?”(한가연)
한치선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에게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려보도록 했다. 아이들이 심심해할 때 종종 만화처럼 그린 그림들은 많았지만 시로 표현했던 주제를 다시 그림으로 표현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 3, 4일을 씨름한 후 아이들은 작품을 그려냈다. 시를 지으면서 한번 깊이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다시 한번 더 깊이 생각한 탓인지 주제를 상징으로 이끌어내는 힘이 느껴졌다. 보람이와 가연이의 시그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치선, 최경희씨(41) 부부는 둘다 미대 출신. 서예학원을 운영하는 두 사람은 다른 부모에 비해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짧다. 그래도 부인 최경희씨는 미리 퇴근해서 아이들을 보살펴주지만 아빠 한치선씨는 매일 밤 11시까지 학원에 매달려야 한다. 그래서 집에 오면 아이들은 잠을 자고 있기 일쑤. 또한 아침에는 아이들이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한치선씨는 늘 아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대화가 시그림을 시작한 후로는 많이 보충되었다. 시와 그림을 통해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집을 사주고, 좋은 시를 읽어주고, 시를 이야깃거리로 삼아 가족끼리 둘러앉아 있는 시간이 가족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되어갔다. 보람이와 가연이가 아빠 엄마의 친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시그림 작업을 통해 아이들의 꿈 찾아내
미술을 전공해서 아이에게 시그림을 지도하기가 쉬웠던 것은 아니었는지 묻자 한치선씨는 “아이들에게 시와 그림을 ‘지도’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컴퓨터로 비유하자면 어른들은 386이나 486급이지만 아이들은 40기가의 하드가 장착된 펜티엄IV급이기 때문.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은 주식 시세나 세상의 상식뿐이라는 것이 한씨의 생각이다.
“아이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는 폭탄이에요. 그 폭탄의 뇌관에, 아이들의 심장에 불을 붙여주는 게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이래라 저래라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감성에 불을 질러주어야지요. ‘좋을 때다!’라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이들의 순결한 감성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경의를 표해야 해요. 아이에게 상상력과 감성을 보여달라고 부탁해야 해요.”
일단 아이의 감성에 불이 붙었다면 그다음에는 폭죽처럼 터져 오르는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을 구경만 하면 된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를 늘상 내버려둔 것은 아니다. 비오는 날 새벽 3시에 자는 아이들을 깨워 아파트 정원에서 비를 맞고 있는 장미를 보고 시그림을 해보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일어나기 싫어했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가서 보고 온 후에는 살아 있는 작품을 내놓고 스스로 감탄했다고.
중학교 2학년인 보람이는 서울에 있는 국악중학교에 다니느라 주말에만 집에 오기 때문에 요즘은 시그림을 자주 하지는 못하는 상태. 중학교 1학년인 가연이는 요즘 한창 패션디자이너가 되려는 꿈을 꾸고 있다. 두 아이의 꿈을 찾아주기 위해 아빠와 엄마는 수많은 직업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음악인지 미술인지, 미술이라면 순수미술 쪽인지 디자인 쪽인지 가려내는 작업을 했다.
그 가운데서 찾아낸 것이 보람이는 국악이고 가연이는 패션디자인이다. 요즘 가연이는 가끔씩 디자인이 하나 떠올랐다면서 얼굴이 상기되어 스케치를 하곤 한다. 한치선씨는 이렇게 아이들의 가슴이 뛰고 있을 때 그 일을 하게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두 아이의 작품을 그대로 묵히기 아까워 시디롬으로 제작한 것을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을 해와 한씨는 최근에 책을 냈다. ‘시그림으로 키워주는 상상력의 날개‘가 그것. 그러나 그는 이 책을 보고 많은 엄마들이 오히려 ‘우리 아이도 시그림을 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아무리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해봐야 ‘소귀에 경읽기’가 되는 것을 여러번 보았기 때문이다.

시그림은 반드시 시를 먼저 시작하고, 그림을 나중에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시나 그림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만 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 엄마 아빠의 역할은 아이가 즐겁게 하도록 하고,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충분히 칭찬하고 감탄하는 것이다.
시 짓기를 시작하는 법
● 삼행시를 이용하여 시 짓기
시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시 짓기가 즐거워야 한다. 아이들의 이름으로 혹은 옆집 친구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본다. 같은 이름으로 서로 다른 시가 나오는 것을 아이들이 즐기도록 한다. 재치와 비유, 표현력 등이 길러질 수 있다. 멋지게 지어야만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엄마 아빠도 함께 지으면서 웃고 칭찬해준다. 삼행시가 너무 단조로우면 사행시, 오행시로 확장해 나간다. 한 줄씩 시를 주고받는 것도 좋다.
● 단어를 연결해 시 짓기
삼행시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면 이번에는 단어를 엮어 시 짓기에 도전한다. 아이들의 나이나 수준에 따라 처음에는 두 단어 정도를 엮어서 말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도 좋다. 한치선씨는 여섯, 일곱 단어 정도가 적당하다고 얘기한다. 엄마 아빠도 함께 해보면 아이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조건 칭찬해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 서로 비유하며 놀아보기
비유는 시를 쓸 때 필수적인 요소. 가족 또는 친구끼리 서로를 무엇에 비유해보도록 한다. 가령 지은이(아이의 이름)는 햇살을 머금은 보랏빛, 엄마는 옛 절의 단청처럼 잘 익은 비취색이라고 얘기하고, 아이에게도 아빠는 무엇인지 표현해보라고 한다. 덤으로 가족간에 사랑까지 확인할 수 있다.
● 시인의 시에 화답하기
시를 즐겨 짓다 보면 기성 시인들의 시집을 읽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된다.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가 있을 때는 그 시에 화답하여 시를 짓게 해본다. 기존 작가의 작품을 같이 호흡해보면 아이의 시도 폭이 깊고 넓어진다. 굳이 시집이 아니더라도 신문에 실린 시를 보면서 해볼 수 있다.
그림도 시와 함께 시작한다
◆ 아무렇게나 그은 선에 그림 그리기
이번에는 그림 그리기에 도전. 아무렇게나 선을 그려놓고 그 선을 기초로 자유롭게 그림을 만들어 나간다. 아이들에게 잘 했다 못 했다 스트레스만 주지 않는다면 아주 재미있고 신나게 작업을 한다. 아이들이 둘이라면 서로 교대로 선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게 하고, 엄마 아빠가 동참하는 것도 좋다.
◆ 만화를 통해 인체 그리기
그리기를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인체. 인체를 잘 그리게 하기 위해서는 만화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쉽다. 만화식 캐릭터(둘리, 피카추 등)는 아이들이 두려움 없이 그림을 시작할 수 있게 한다. 좋아하는 만화를 골라 주인공 얼굴을 그리게 한다. 처음에는 정면에서 시작하여 옆얼굴, 그다음에는 비스듬한 옆얼굴, 다양한 표정 등을 그리게 해본다. 아이와 함께 그려본다면 생각보다 재미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얼굴 그림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면 이제 몸 전체를 그려보게 한다. 만화식 캐릭터를 잘 그리게 되면 이제 극화식 캐릭터(까치, 탑블레이드 등)에 도전해본다.
◆ 매일 크로키하기
만화를 그리면서 그림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면 매일 크로키를 시켜본다. 크로키란 빠른 시간 안에 개략적인 선으로 묘사하는 방법. 미술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매일 밥 먹듯이 크로키를 한다. 그만큼 미술의 기초가 된다는 것. 만화로 익숙해진 인체도 그리고, 꽃이나 나무, 동물 등도 그리게 한다. 많이 그릴수록 자신감이 붙는다. 실력이 붙으면 명암도 그려넣어 본다.
◆ 화가의 그림을 모사해보기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도 그림 실력을 쑥쑥 늘게 한다. 닮게 해보려고 애쓰는 동안 작가의 구도를 알게 되고 터치와 질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에게 각각의 장점과 개성이 있는 동양화나 서양화를 가리지 않고 많이 보여주는 것도 그림 공부에 좋다.
시그림은 반드시 마지막 단계까지 거친 후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의 수준이 삼행시이고, 그림의 수준이 캐릭터 모사 수준이라 하더라도 같은 주제로 시와 그림 작업을 하도록 하고 작품을 잘 모아둔다. 훗날 보면 그 나름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아이의 발전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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