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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에 걸친 긴 투병생활 딛고 이화여대 ‘우등 졸업’한 주은경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김순희 ■ 사진·박해윤 기자

2002. 10. 08

12년에 걸친 길고 긴 투병생활이었다. 지난 8월30일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주은경씨는 중학교 3학년 때 ‘만성 골수 백혈병’을 앓아 두번에 걸쳐 골수이식 수술을 받았다. 자신의 병간호를 하던중 위암에 걸린 어머니가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고통까지 겪었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학업에 전념해 결국 ‘우등 졸업’의 영예를 안은 주은경씨의 사연.

12년에 걸친 긴 투병생활 딛고 이화여대 ‘우등 졸업’한 주은경
지난 8월30일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주은경씨(27)는 많은 선·후배와 친지들로부터 남다른 축하인사를 받기에 바빴다. 그 안에는 오랫 동안 ‘생과 사’를 넘나들며 힘겹게 보낸 시간들에 대한 ‘무언의 격려’가 담겨 있었다.
7년 동안의 긴 대학생활을 보낸 주씨에게 드라마 속 여주인공에게나 걸릴 법한 ‘백혈병’이 찾아온 것은 90년 7월. 중학교 3학년인 그에게 찾아온 ‘만성 골수 백혈병’은 세상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아픔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을 맛보기는 부모와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90년 11월, 다행히 오빠의 골수를 채취해 골수이식 수술을 받았다.
“골수이식수술을 받았지만 이후 여러가지 합병증으로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됐어요. 백혈구 수치가 오르고 혈뇨를 쏟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핏덩어리가 요도를 막아 소변도 못보고…. 그때 의사선생님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의사선생님을 붙잡고 울면서 부탁했어요. ‘열흘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까지만 살게해 달라고요. 그때까지만이라도 살고 싶다고요. 내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집에서 보내고 싶다고요. 그게 저의 마지막 소원이었어요.”
당시를 회상하는 주씨의 눈가에 언뜻 눈물이 비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손바닥만한 다섯 개의 핏덩어리를 쏟아낸 주씨는 기적처럼 몸 상태가 호전돼 크리스마스 전날 병원 문을 나섰다. 어쩌면 영영 다시 밟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 ‘생명의 은인’인 그의 오빠가 두 팔을 벌리고 동생을 맞이했다.
“다섯 시간에 걸쳐 골수채취수술을 받은 오빠가 깨어나자마자 ‘우리 은경이 괜찮아요?’라고 물어봤대요. 오빠도 엄청 아팠을 텐데. 오빠의 골수가 내게 가장 잘 맞는다는 판정이 나자 고등학교 2학년인 오빠가 스스럼없이 골수채취에 응했어요. 병원에 있을 때도 나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실없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재미있는 이야기들 들려주곤 했거든요. 오빤 농담 삼아 ‘은경아, 니 생명의 은인이 누구지?’ 라고 묻곤 했어요. 그러면 배시시 웃으며 ‘응. 당연히 오빠지’라고 대답하면 오빤 아주 흐뭇해했어요.”
“백혈병과의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엄마의 위암소식…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항암치료는 계속되었고 거듭된 입원과 퇴원은 ‘반복적인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초등학교 교사인 엄마는 딸의 병간호를 위해 학교를 휴직했다. 백혈병 환자의 입원실인 무균실의 청소도 엄마 몫이었다. 하루에 두 차례씩 천장까지 닦아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픈 딸 앞에서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였는데… 백혈병과의 싸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씨의 머리를 내리친 건 엄마의 위암소식이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네요. 청천벽력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내가 백혈병을 앓은 지 일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인 91년 9월. 엄마가 위암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아빠는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봐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속으로 끙끙 앓으셨죠. 저와 엄마가 동시에 투병생활에 접어들었죠. 저는 이듬해 고등학교에 진학할 만큼 병세가 호전됐는데 엄마의 몸속에 있는 암세포는 점점 커져만 갔어요.”
딸의 병이 낳으면 다시 복직하겠다던 꿈을 간직한 채 교단에 설 날을 기다리던 엄마는 교단 대신 병실에서 힘겨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딸을 위해 온몸을 희생해 병간호를 해주던 엄마는 이제 그 입장이 바뀌어 자신을 간호하는 딸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엄마의 뒤를 이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라”고 당부했다.
“엄만,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제 병간호를 하셨는데 전 해 드릴게 없었어요.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는 엄마 말씀을 잘 듣는 게 전부였죠.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래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인 것 같아요. 엄마가 아파서 집에 누워 계신데도 어린 마음에 ‘엄마가 집에 있어서 참 좋다’면서 철없이 엄마 품에 안기곤 했으니까요. 그때 엄마에게 조금 더 잘 해드릴 걸…. 엄마가 저에게 해 준 것의 반만이라도 해드릴 걸 그랬어요.”

끝내 그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9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위암수술을 받았던 어머니(당시 48세)의 죽음은 주씨를 가파른 절벽 끝으로 내 몰았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화여대 교육학과에 입학했지만 시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엄마를 잃은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고 대학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몹시 힘들었어요. 그저 죽고 싶은 생각만이 저를 지배했죠. 치료를 받느라 휴학과 복학도 밥먹듯이 했어요. 너무 오랫동안 아프니까 정신은 피폐해져서 세상사 모든 게 귀찮게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완치된 줄 알았던 백혈병이 재발한 거예요.”
97년 또 다시 힘겨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그때 엄마 대신 병실을 지켜준 것은 오빠였다.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엄마’ 노릇을 자처한 오빠는 두번째 골수이식과 항암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늘 동생 곁을 지켰다.
“어려서부터 오빠는 엄마와 같은 존재였어요. 출근하는 엄마 대신 하교 후에 먹을 것을 챙겨주고 숙제도 도와주고. 그런 오빠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병 수발하느라 좋은 직장까지 그만뒀는데 IMF 이후라 재취업도 쉽지 않았어요. 결혼해서 살고 있는 오빠는 지금도 ‘엄마’처럼 잘 해줘요.”
주씨 곁에는 그의 삶을 지탱시켜 준 또 다른 인연이 있다. 주씨가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 살며시 다가와 그에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준 김혜영씨(32)였다. 당시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재학중인 김씨가 이화여대에 캠퍼스 전도를 나섰다 주씨를 만났던 것.
“투병경험 바탕으로 해맑은 아이들의 꿈 키워주는 교사 되고 싶어요”
“학교고 뭐고 다 싫고 귀찮다는 생각에 한창 방황하고 있을 때 그 언니(김혜영)를 만났어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있다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겨 있어서 쉽게 기독교에 귀의하지 못했는데 언니의 도움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언니는 두번째 골수이식 수술을 할 당시 오빠 못지않게 내 곁을 지키면서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를 해줬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삶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도 변화를 가져왔고 ‘교사가 되겠다’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죠.”
주씨는 오랜 투병생활 끝에 지난 2월 마침내 완치 진단을 받았고 평점 3.84의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 졸업생 7백5명중 22명에게만 주어지는 ‘우등 졸업’의 영광도 안게 됐다.
“엄마 뒤를 잇기 위해 초등교육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어요. 올해 4월엔 이대부속초등학교에서 교생실습도 했어요. 그때 유난히 새초롬하고 우울해 보이는 한 아이가 눈에 띄었어요. 알고 보니 부모가 이혼하고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이더라고요. 그 아이를 보고 남몰래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나도 모르게 더 마음이 쓰이고 사랑을 더 베풀게 되더라고요.”
10년이 훌쩍 넘는 길고 긴 투병생활을 거쳐 맑고 초롱초롱한 아이들을 가르칠 꿈에 부풀어 있는 주씨는 오는 11월에 치러질 초등학교 교원임용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다.
현재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주씨는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엄마의 꿈을 대신 이루며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가르치며 해맑은 아이들의 꿈을 소중히 키워 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가녀린 몸에 웃는 얼굴이 곱디고운 주씨의 작은 소망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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