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이라면 누구나 일과 육아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는다. 두 가지 모두 잘 해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여성들이 대부분. MBC 아나운서 출신 최윤영(35) 또한 2009년 딸 서연이가 태어난 뒤로 지금껏 같은 고민을 해왔다. 결국 그는 지난 8월 MBC를 떠나 프리랜서의 길을 선택했다. 2001년 입사 후 ‘주말 뉴스데스크’ ‘아주 특별한 아침’ ‘생방송 오늘 아침’ ‘W’ 등을 진행하며 MBC 간판 아나운서로 활동해온 그였기에 갑작스러운 퇴사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표했다. 오랫동안 가족처럼 지내온 아나운서실 식구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던 날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MBC가 제게 어떤 의미인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올해가 입사 12년째인데, 그동안 MBC 직원으로 사는 게 정말 행복했고 고마운 분들도 참 많아요. 특히 아나운서국 식구들과 쌓은 정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죠. 퇴사하던 날 여자 아나운서들의 모임인 ‘초록회’에서 기념 목걸이를 선물해줬어요. 또 제가 입사한 이래 지금까지 출연했던 방송을 다 찾아서 하이라이트 영상을 엮어 2장의 CD에 담아줬어요. 이런 동료들이 또 어디 있을까 싶어요. 요즘도 선후배들과 연락해서 식사도 같이 하고 이런저런 사는 얘기도 나누고 그래요. 퇴사할 때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자주 못 본다는 사실이었어요.”
퇴사는 하루아침에 결정한 게 아니었다. 출산 후 ‘육아의 세계’에 들어감과 동시에 숱한 갈등의 순간들이 있었다. 육아 도우미의 힘을 빌리려고도 해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껏 도우미를 7번이나 바꿨다. 그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내 잘못도 있지만, 보육 도우미의 교육이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이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고 말한다.
직장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숙직 근무였다. MBC의 경우 한 달에 네 번, 즉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숙직이 돌아온다. 몸이 고된 건 둘째치고, 늘 옆에 끼고 자는 아이에게 한 달에 네 번이나 엄마 없이 잠들어야 하는 공포를 안겨줘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힘들게 했다. 그가 숙직을 서는 날이면 아이는 할머니나 외할머니 품에서 울면서 잠들었다. 외국계 증권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직업 특성상 평일에는 퇴근이 늦어 아이를 돌볼 형편이 안 됐다. 육아에 대한 고민이 극에 달했을 무렵, 아이가 심한 감기에 걸려 이틀 넘게 고열에 시달리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혔다.
“물론 저보다 힘든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는 분들도 많으실 거예요. 실제로 제가 이런 고통을 이야기하면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싶어 핑계를 댄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일하는 엄마가 아이에게 느끼는 죄책감이 뭔지를 아는 분이라면, 제 처지를 어느 정도 이해해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제 아이는 기질적으로 예민한 편에 속해요. 문득문득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간 내가 아이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결국 일과 육아 두 갈래 길에서 저는 후자를 택했어요.”
회사를 그만두자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처음 며칠간은 ‘과연 잘한 일일까’ 하는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동안 아이의 가장 큰 문제는 ‘분리불안’이라고 생각했는데, 퇴사 후 아이가 유치원 가 있는 동안을 빼고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쏟는데도 서연이의 행동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 더욱이 지난해 1년간 육아 휴직을 내고 온전히 아이를 돌본 적이 있기에 이번에도 그는 그때처럼 아이가 엄마만 옆에 있으면 문제될 게 없을 거라생각했다고 한다.
“섣부른 판단이었어요(웃음). 지난해만 해도 아이가 어려서 예쁜 행동만 했는데 ‘미운 네 살’이 되니까 행동이 확 달라지더라고요. 사표만 내면 아이가 다시 예쁜 천사의 모습으로 바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한편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더라고요. 하지만 이미 사표는 냈고 저 혼자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서 시어머니나 친정엄마에게 SOS를 쳐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퇴사 후 찾아온 불안감 EBS ‘부모’ 진행 맡으며 극복
그렇게 호되게 ‘퇴사 신고식’을 치르던 중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EBS ‘부모’ 제작진으로부터 MC 섭외를 받은 것. 하지만 최윤영은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육아에 전념하겠다고 힘들게 퇴사를 결정해놓고 또다시 일터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집불통인 아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던 터라 방송 복귀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두 달여에 걸친 방송작가의 끈질긴 구애로 결국 그는 당초 계획보다 빨리 카메라 앞에 다시 섰다.
“퇴사할 때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다시 방송을 시작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다른 프로그램도 아니고 ‘부모’였기 때문에 선택했어요. 어느 날 작가와 전화 통화를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지금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육아 코칭인데, 방송을 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육아 전문가들에게 살아 있는 조언을 얻을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아이 때문에 방송을 거절할 게 아니라 오히려 아이를 위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은 ‘부모’를 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EBS ‘부모’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요일별로 정해진 주제를 가지고 전문가와 함께 육아, 교육, 가족 관계 등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프로그램. 최윤영은 지난 9월 말 지승현 아나운서 후임으로 이 프로그램에 투입됐다. ‘부모’를 진행한 지 아직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그는 방송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그동안 몰랐던 귀한 육아 정보를 날마다 생생하게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의 양육 태도가 바뀌지 않고서는 아이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제가 맡은 프로그램이어서가 아니라 같은 엄마로서 모든 부모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프로그램이에요. 제가 직접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방송이 끝난 뒤에도 전문가들께 상담을 많이 하는데, 정말 신기하게 그분들의 조언대로 따라 하면 아이가 하루아침에 달라지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와 앞으로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같은 반 친구가 ‘내가 거인처럼 커져서 너를 포크로 꽉 찍어서 먹어버릴 거야’ 하고 겁을 줬대요. 마침 다음 날 ‘부모’ 녹화가 있어서 선생님께 이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아이의 고민을 엄마가 덩달아 크게 부풀려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어요.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엄마는 절대 당황하지 말고 무심을 가장한 담담함으로 아이에게 그 일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줘야 한다는 거였죠. 그러면서 서연이에게 ‘내일 친구한테 내가 너보다 더 큰 거인이 될거라고 이야기하렴. 그럼 그 친구가 서연이를 잡아먹지 못할 거잖아’라고 말해주라고 코치를 하셨어요. 집에 돌아가서 그대로 아이에게 말했더니 금세 아이의 얼굴이 환해지더라고요. 다음 날 유치원에 씩씩하게 갔어요(웃음).”
이번 일을 계기로 최윤영은 좋은 부모가 되려면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이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올바른 해결책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그에게 가장 큰 변화라면 아이의 이상 행동에 더는 마음 졸이지 않게 됐다는 것. 과거에는 내 아이의 타고난 기질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예민하고 까다롭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월령별로 다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최윤영은 “아이가 짜증 부리고 떼쓸 때 엄마가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며 “그걸 알게 되자 육아에 대한 자신감도 커지고, 그동안 느꼈던 좌절감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EBS ‘부모’ 진행을 맡으며 새삼 자신에게 방송에 대한 갈망이 있었음을 깨달았다는 최윤영 아나운서. 오른쪽 사진은 그의 파격적인 변화로 화제를 모았던 MBC 시사프로그램 ‘W’ 진행 당시 모습.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라주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
‘부모’는 그에게 비단 육아에 대한 해답만 안겨주지 않았다. 방송인으로서의 자긍심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그동안 그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방송에 대한 갈증을 ‘부모’를 통해 해소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1년간의 육아 휴직과 MBC 노조 파업으로 2년 가까이 방송을 할 수 없었다.
“사표를 낸 뒤 제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회사에 다닐 때보다 몸과 마음이 더 지친다는 거였어요. 하루 종일 집안일에 시달리는 것도 아닌데 아이가 놀아달라고 보채면 저도 모르게 ‘서연아, 엄마가 너무 힘들어. 엄마도 조금만 쉬자’라고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부모’를 시작하고부터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어요. 흔히 사람들이 ‘탈출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제게 탈출구는 방송이었더라고요. 솔직히 MBC를 그만두기로 했을 때, 아무리 아이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어쩌면 다시는 방송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제 몸의 절반이 떨어져나간 것 같은 허전함도 있었죠. 그런데 이렇게 다시 방송을 하게 되면서 그런 불안감이 사라졌어요. 더욱이 ‘부모’는 일주일에 두 번, 그것도 서연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녹화로 진행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요. 잠시였지만 온전한 가정주부로 생활해보니까 전업주부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들인지 새삼 알겠더라고요.”
예전에 비해 남편 내조에도 신경을 쓰는지 궁금해하자 그는 “아직 그럴 여유는 없다”며 웃었다. 남편은 새벽 6시에 출근해 자정이 가까워 퇴근하는 날이 대부분이어서 주말에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이 교육도 전적으로 아내에게 일임한 상태. 최윤영이 남편에게 부탁한 건 하나뿐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혼나서 속상해할 때 언제든지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아빠가 돼달라는 것. 한마디로 악역은 그가, 천사 역은 남편이 맡기로 했다고 한다.
“솔직히 남편이 육아에 능숙하지 못해요(웃음). 결혼 전에는 조카들을 예뻐해서 아빠가 되면 아이를 잘 돌볼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가 울고 떼쓰면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한편으론 아이 교육 문제로 남편과 부딪힐 일이 없어서 편해요. 육아 전문가들도 엄마와 아빠의 교육관이 달라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만약 부부의 견해가 다르면 아이가 안 보는 곳에서 서로 합의하고 아이에게는 언제나 일관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요. 저희는 남편이 바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제가 육아와 교육 모두를 책임지고 있지만 그만큼 남편이 저를 믿고 지지해주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어요. 육아에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각자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최윤영이 원하는 아이의 미래상은 명확해 보였다.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라는 것. 그것이 그가 아이에게 바라는 전부라고 한다. 탄탄한 고무공처럼 외부에서 어떤 압력과 충격이 가해지더라도 잠시 우그러들었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내면이 튼튼한 아이, 자존감 높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공부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최윤영은 “유치원에서 한글을 모르는 아이는 서연이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 스스로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하기 전까지는 강제로 가르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당분간 방송 욕심은 크게 부리지 않을 계획이다. 현재 하고 있는 ‘부모’ 외에는 새로운 일을 맡을 계획이 없다고. 아직은 아이에게 좀 더 집중하고, 지금의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제2의 방송 인생을 펼쳐볼 생각이다. 잠시의 휴식이 훗날 방송에서 더 큰 에너지로 발산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닐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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