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터를 켜라(2002)’로 이름을 알린 장항준 감독(41)은 과거 방송국 예능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방송계 ‘입담꾼’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최근 방송에 얼굴을 자주 비치면서 ‘예능샛별’로 부각되고 있지만, 예전부터 그를 게스트로 ‘모시려는’ PD며 작가가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장항준 감독의 아내 김은희씨(38)의 말이다. 그러면서 또 김씨는 “남편은 초년병 시절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같이 글을 쓰는 입장에서 남편의 재능이 부럽다”고 했다. 그야말로 찰떡궁합의 부부가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은 현재 연출가와 작가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오는 10월 방영될 드라마 ‘헤븐(가제)’을 준비하며 제작사에서 내준 작업실을 나눠 쓰는 중이다. ‘헤븐’은 국내 최초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로 부검의들을 둘러싼 의문의 사건 및 조직 안에서의 권력다툼과 암투를 그릴 예정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하잖아요. 국과수에 들어오는 시체는 말 못할 사연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부검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거라 생각했어요. 드라마 ‘하얀거탑’을 좋아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국과수 부검의들 사이의 권력다툼과 암투 등을 그리려고 해요. 어느 조직이든 권력은 있기 마련이거든요. 권력과 무관할 것 같은 방송국 개그맨실에도, 만화가협회 내에도 말이죠. ‘하얀거탑’+‘대장금’을 표방한 작품으로 만들 생각인데, 결과는 나와 봐야 알겠죠(웃음).”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 초 방영된 tvN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도 두 사람이 만들었다. 물론 그때는 장 감독도 김 작가와 함께 대본을 집필했다. 방송작가로 데뷔해 2006년 영화 ‘그해 여름’시나리오를 쓴 김은희 작가는 남편을 예능국 ‘사수’로 처음 만났다. 하지만 당시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 중이던 장 감독은 프로그램을 배정받고 한 달이 다 지나도록 얼굴 한번 내보이질 않았다고 한다.
“남편은 작가들 사이에서 독특한 사람으로 유명했어요. 소문만 듣다가 처음 봤을 때는 촌스러운 옷차림에 먼저 놀랐었죠(웃음). 빛바랜 청남방을 청바지 안에 넣어 입은 모습이 정말 우스꽝스러웠거든요. 한 달 동안 얼굴도 안 내밀었으면 저한테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하는데, 남편은 사과는커녕 거만하게 앉아서 사람들한테 ‘어제 (윤)종신이 생일이어서 줄리아나(나이트클럽 이름)에서 밤새 놀았다’는 둥 시답잖은 얘기를 잔뜩 늘어놓더라고요. ‘뭐 저런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점차 친해지면서는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로 잘 따랐어요(웃음). 워낙 후배들한테 잘해서 저 말고도 따르는 사람이 많았죠.”
그렇게 몇년이 흐른 뒤 결혼식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지 1년 만인 98년에 올렸다. 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어느날 갑자기 전화를 해서 결혼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간 각자의 연애사까지 꿸 정도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한동안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친구를 좋아해 이들의 신혼집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댔다고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저희 집은 펜션이나 다름없었어요. 특별히 할 일 없는 친구들은 3박4일 동안 진을 치기도 했어요. 한번은 외출했다가 집에 왔더니 장정 10여명이 거실에 한 데 누워서 TV삼매경에 빠져 있더라고요(웃음). 신혼 초에는 무슨 배짱으로 일도 안하고 그렇게 놀았는지 모르겠어요. (정)웅인, 종신 오빠와 친하게 지냈는데, 웅인 오빠가 갑자기 뜨는 바람에 덩달아 저희들도 신났었죠. 웅인 오빠가 한턱 쏘면 다음엔 종신 오빠가 쏘고, 마냥 즐거웠던 시절이었어요(웃음).”
장 감독과 가수 윤종신은 15년지기 절친이다. 윤종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장 감독이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친구가 됐다고 한다. 당시 영화를 준비하느라 마땅한 수입처가 없었던 장 감독은 2년 가까이 윤종신의 집에 ‘얹혀’ 살기도 했다. 당시 음반판매량도 많고, 가수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윤종신은 ‘자선사업가’로 불릴 정도로 친구들에게 후했다고 한다.
“그때만해도 종신이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어요. 친구들끼리 술을 먹으면 언제나 습관처럼 지갑을 열었고, ‘3만원만 줘’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고마운 친구였죠.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티셔츠가 맘에 든다고 하면 돈을 주면서 사라고 했을 정도예요. 결혼하고는 좀 달라졌지만요(웃음). 얼마 전에는 함께 술을 마시면서 제가 아이 앞으로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고 하니까 종신이가 깜짝 놀라면서 ‘너 아이한테 유산을 물려줄거야?’하고 묻는 거예요. 당연히 그렇다고 하니까 자기는 한 푼도 안 줄 거래요. 그래서 제가 ‘그럼 어떻게든 내가 너보다 오래 살 테니 그 돈 나 줘’ 그랬어요(웃음).”
딸 이름 통장에 수입의 5% 저금하는 알뜰한 아빠
장 감독은 경제관념이 ‘제로’일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누구보다 알뜰한 가장이라고 한다. 다섯 살배기 딸 윤서 이름으로 개설한 통장에는 언제나 수입의 5%가 저금된다. 늘 통장을 갖고 다니면서 아이에게 용돈을 주고 싶을 때, 지갑에 현금이 넉넉히 있을 때 은행을 찾아가 저금을 한다. 장 감독은 아이가 있기 전까지는 돈에 대한 중요함을 잘 몰랐지만 아이가 태어나자 자신이 부모에게서 받은 만큼은 아이에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 집 정원에서 야구를 했을 정도로 부잣집 도련님으로 귀하게 자랐다. 그러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버지가 건축업을 하셨는데, 부도나기 전까지는 전혀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어요. 자랑하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웃음), 어릴 때 아버지한테 썰매를 사달라고 했더니 당시 7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수제 썰매를 사주시더라고요. 식목일에도 학교에서 묘목 값으로 5백원씩 걷었는데, 어머니한테 그 날 아침 돈을 달라고 했더니 ‘그냥 학교나 가라’면서 끝내 돈을 안 주시는 거예요. 한창 수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들의 ‘와~’하는 소리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어머니가 나무를 한가득 실은 트럭에서 내리시더라고요. 한동안 교정에 있는 나무마다 ‘장항준 기증’이라고 적힌 깡통이 매달려 있었어요(웃음). 아버지는 경제관념이 투철한 분이세요. 제가 결혼할 때도 집을 그냥 사주신 게 아니라 어디에 있는 아파트가 값이 오를지, 어느 은행에서 대출받는 게 유리할지 등을 직접 발품 팔면서 알아보신 뒤 사주셨어요.”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절약정신을 닮아간다는 장 감독은 인터넷 가계부를 쓰는 것은 물론, 마트에 갈 때도 쇼핑 리스트를 적어간다고 한다. 남편이 변하자 아내도 덩달아 ‘짠순이’로 변해가는 중이지만 갑작스레 달라진 남편의 태도에 가끔은 서운할 때도 있다.
“지난해 ‘위기일발 풍년빌라’를 쓸 때였는데, 그때도 남편과 함께 출퇴근하는 상황이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거든요. 하루는 반찬도 마땅치 않고, 고기도 먹고 싶어서 스팸을 하나 사왔는데, 통조림 뚜껑을 따는 순간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돈을 물 쓰듯이 쓴다’면서 화를 내는 거예요. 무슨 쇠고기를 구운 것도 아니고, 정말 어이없고 서러웠어요(웃음). 그래도 남편이 알뜰모드로 돌입하면서 생활비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이제는 저도 남편 따라 택시 대신 버스 타고 다니고, 아이 물건도 꼭 필요한 거 아니면 안 사려고 해요.”
오누이 같이 해맑은 미소가 똑 닮은 두 사람은 비슷한 일을 하고, 영화라는 관심분야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소울메이트라 할 수 있다. 함께 작업하면서 불편한 점도 많을 테지만 두 사람 모두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다른 감독님들과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한데, 남편과 일할 때는 그런 시간이 필요 없으니까 효율적이에요. 또 본격적으로 일에 들어가서는 남편이 직설적인 성격이라 연출자로서의 의도를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기 때문에 글을 쓸 때 한결 편하죠. 물론 가끔은 상처받는 말도 하지만요(웃음).”
두 사람은 연출자로서 작가로서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서로의 장점을 말해달라는 제안에 장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술술 이어간다. 가장 먼저 김 작가의 부지런함과 높은 집중력을 꼽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한번 작정하고 책상에 앉으면 몇 시간이고 집중해서 일을 끝마친다는 것. 또 스릴과 서스펜스에 능하고 글을 빨리 쓴다는 점도 연출자로서 마음에 든다고 한다. 이어 김 작가는 남편의 장점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꼽았다.
오누이 같이 웃는 모습이 똑 닮은 장항준·김은희 부부.
“결혼하고 남편이 책 한권 읽는 걸 못 봤어요. 그런데도 어떻게 글을 잘 쓸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서울예대 시절 도서관에 있는 극본 중 안 읽어 본 게 없을 정도로 학창시절을 열심히 보냈더라고요. 영화관련 기관에도 매일같이 다니면서 흑백필름부터 영화란 영화는 모조리 섭렵했고, 클래식에 대한 지식도 남부럽지 않아요. 시나리오 작가로 처음 데뷔했을 때도 출발이 꽤 성공적이었어요. 처음 집필한 시나리오가 영화 ‘박봉곤가출사건’으로 만들어진 데다 흥행도 좋았고, 그해 백상예술대상 각본상 후보에도 올랐거든요. 물론 이후에 이렇다할만한 작품이 없어서 아쉽지만요(웃음).”
김 작가는 최근 들어 남편이 예능인으로 활약하는 것에 대해 반반의 입장을 보였다. 수입이 많아졌다는 면에서는 “두 손 들어 반길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본래의 직업에 충실하길 바란다는 것. 장 감독 역시 자신의 일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거의 몇 년째 준비하고 있는 영화가 있는데,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면 예능일은 접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야행성’ 시작하기 전에도 미리 방송 관계자들에게 얘기를 해뒀어요.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 그만두기로요. 영화 ‘라이터를 켜라’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불어라 봄바람(2003년)’에서 ‘삐끗’한 걸 아직까지 만회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대작을 한번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작품 하나는 촬영 직전까지 갔다 무산되고, 또 하나는 투자단계에서 무산되고…, 6년 가까이 시련의 시간을 보냈죠. 이번 드라마를 끝내고 곧 촬영에 들어갈 작품이 있는데,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면 방송일은 접고 영화에만 올인할 생각이에요.”
“한 차례 갈등 겪고 난 뒤 전보다 훨씬 훌륭한 가장 됐어요”
그가 감독으로서 좌절을 경험하는 동안 아내와도 한차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둘째 치더라도 아내로서 점점 권위적으로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꼈던 것. 김은희 작가는 “‘감독병’이 그렇게 무서운 건 줄 몰랐다”며 고개를 저었다.
“주위 사람들이 ‘감독님 감독님’ 하니까 정말 자기가 왕이라도 된 줄 알더라고요. 예전에는 누구보다 제 일을 존중해주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자기만 위해 주길 바라는 사람으로 변해 있는 거예요. 제가 영화 ‘그해 여름’ 집필 막바지에 이르렀을 땐데, 스태프들과 함께 워크숍을 가겠다고 하자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화를 내더라고요. 그 일 이후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죠. 다행히 그 무렵 친한 후배가 제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남편에게 ‘감독님, 요즘 변하신 거 아세요?’하고 따끔하게 한 마디 던졌는데, 당시 남편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면서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 일 이후 남편은 예전의 모습으로, 아니 예전보다 더 훌륭한 남편의 모습으로 바뀌었어요(웃음).”
그가 남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아이가 태어난 뒤 모시기 시작한 친정어머니에게 딸보다 더 살갑게 사위노릇을 잘 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 작가는 “스팸 한 조각에 잔소리를 늘어놓을지언정 친정엄마 용돈 드리는 건 절대 아까워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얼마 전에는 “사위 때문에 오래 살고 싶다”는 친정엄마의 말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고.
“저희 집이 딸만 셋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힘들게 세 자매를 키우셨어요. 늘 하시던 말씀도 ‘이렇게 살다가 주님이 불러주시면 편하게 가야지’였는데, 얼마 전에는 ‘우리 사위랑 같이 살면서 죽기가 싫어졌다’고 하시더라고요. 3년 전부터는 외할머니까지 모시게 되는 바람에 엄마가 알게 모르게 저희 눈치를 보셨을 텐데, 남편이 흔쾌히 모시자고 하고 또, 딸처럼 곰살궂게 잘 하니까 좋으신가 봐요. 날마다 점점 더 행복해하시는 느낌이에요”
쑥스러운 듯 고개만 끄덕이며 아내의 말을 듣고 있던 장 감독은 “연애할 때보다 결혼해서가 더 좋았고, 한 차례 위기를 겪고 난 뒤로는 신혼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말했다. 내년에는 둘째도 낳을 생각이라고 한다.
집에서든 밖에서든 언제나 유쾌한 남자, 장항준 감독. 그에게 기자는 개인적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지난해 겨울 ‘지붕뚫고 하이킥’에 윤종신과 ‘허약한 형제’로 출연, 배꼽빠질 듯한 코믹연기로 기자의 산후우울증을 한방에 날려줬기 때문이다. 누구나 행복하게 만드는 장항준식 웃음코드가 영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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