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꾼 기색 없이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긴 생머리는 염색하지 않아 흰머리가 절반에 가까웠다. 눈가에 주름이 앉은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었다. 하지만 커다란 눈동자와 환한 미소는 여전히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70년대 탤런트 겸 영화배우로 큰 인기를 누리다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췄던 문숙씨(53). 30년 만에 다시 마주한 그의 얼굴에선 세월의 흔적과 여전한 아름다움이 동시에 읽혔다.
소식을 들을 수 없던 지난 시간 동안 미국 등에 머물렀던 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건 30년 전 불쑥 이곳을 떠났던 그때, 차마 얘기하지 못한 마음속 상처와 아픔을 풀어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당시 신출내기 배우였던 그를 휘감은 운명적인 사랑, 한국 영화계의 거장 고(故) 이만희 감독(1931~1975)과의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과 이별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씨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지난 72년 TBC 공채 탤런트로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고등학생은 응시자격도 없었는데도 교복에 단발머리 차림으로 시험을 보러 가 열두 명 합격자 안에 들었을 정도로 당차고 끼가 넘쳤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꿈도 컸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해 늘 극장에서 살았던 그는 공채시험에 합격한 뒤 탤런트로 활동하며 “연기는 자신의 천직”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74년 5월,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 영화사에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이만희 감독을 만난 것이다. 61년 ‘주마등’으로 데뷔한 뒤 13년 동안 40여 편의 영화를 만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이 감독은 당시 ‘충무로의 천재’라는 평을 듣던 명감독이었다. 그에 비하면 문씨는 TV를 통해 겨우 얼굴이 알려졌을 뿐, 영화는 한 편도 출연한 적 없는 신인 배우에 불과했다. 그러나 갓 스무 살 여배우와 마흔세 살 영화감독은 처음 본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심장이 멎는 듯했던 첫 만남, 운명처럼 시작된 사랑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마치 심장이 멎는 것 같았죠. 그분도 저를 처음 봤을 때 오랫동안 찾던 영혼을 비로소 만난 것 같았다고 하셨어요.”
이 자리에서 문씨는 바로 이 감독의 다음 작품인 ‘태양 닮은 소녀’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 신성일의 상대역으로 영화 촬영을 시작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만남도 시작됐다. 하루 종일 촬영을 마치고 충무로 뒷골목에서 스태프들과 저녁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만 따로 술자리를 갖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통금 무렵이 되면 이 감독은 문씨를 서대문구 현저동 집까지 바래다준 뒤 광진구 자양동 자신의 집까지 가지 못해 인근 여관에 묵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얘기를 나눴고,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고 한다.
“저는 그분이 저보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 줄도 몰랐어요. 재미있고 사람 편하게 해주고 잘 웃는, 비슷한 나이의 친구 같은 사람이었거든요.”
문씨는 “나는 그분에 대해 너무 몰랐고, 거리를 걷다가 간혹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지체없이 번쩍 들어올려 목말을 태우고 걸어갈 정도로 마음껏 애정을 표현하는 연인으로만 대했다”며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그는 나를 당신의 영혼을 이해해줄 영혼의 동반자로 여겼던 것 같다”고 말했다.
문숙이 주연을 맡은 이만희 감독의 유작 ‘삼포 가는 길’의 한 장면과 이 감독의 촬영 모습.
이 감독은 한창 창작열을 불태우던 60년대 여러 차례 검열과 삭제에 시달리며 고초를 겪었다. 지난 63년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제3회 대종상과 제l회 청룡상을 수상하고, 66년 ‘만추’로 제3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을 받는 등 전성기를 누렸지만, 65년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받아 구속되고, 이후 만든 ‘천국의 사랑’은 제작 정지, ‘휴일’은 개봉 불허 조치를 받는 등 부침이 심했던 것이다. 자신의 예술을 번번이 가로막는 사회에 불만이 많던 이 감독은 문씨에게 영화 창작에 대한 견해, 불합리한 사회, 이념, 도덕 등에 대한 의견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때때로 문씨의 눈을 들여다보며 “너는 알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라고 묻곤 했다고. 문씨는 “우리는 서로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현재와 과거를 막론하고 굳이 얘기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으며 묻지도 않았다. 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이미 알고 있는 듯 느껴졌고 그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이해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만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세상과 이상을 초월한 운명적인 연인이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문씨는 영화 ‘태양 닮은 소녀’의 촬영이 마무리될 무렵 이 감독 집을 찾아가 그의 자녀들도 만났다고 한다. 당시 이 감독은 이혼한 뒤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상태였는데, 문씨는 그날 이 감독과 그의 막내딸인 배우 이혜영씨 사이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것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보낸 밤이었다고.
“얼마 전 오랜만에 이혜영씨를 만났어요. 제가 라면을 끓여주던 게 기억난다고 하더군요. 제게 이혜영씨는 약간 수줍은 듯하지만 눈빛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정이 많아 보이는 귀여운 아이로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이 감독은 ‘태양 닮은 소녀’가 개봉될 즈음, 문씨에게 ‘문숙’이라는 예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당시 이 감독은 “나는 같이 일했던 여배우들에게 ‘문’자가 들어간 이름을 지어주는데 그 ‘문’에 본명 ‘오경숙’ 중 한 자인 ‘숙’을 더해 ‘문숙’이라고 부르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문씨는 바로 승낙을 했다고 한다. 그는 한참 후에야 이 감독이 말한 ‘문’자를 넣어 이름을 붙여준 배우가 문희, 문정숙씨 등이며 특히 문정숙씨와는 오랫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저 이전에 그분에게 다른 여자들이 있었다는 건 아무 문제가 안 됐어요. 우리가 만난 이후 ‘이 사람은 오직 나를 위해 태어난 남자’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태양 닮은 소녀’로 문씨는 그해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세상은 차츰 유명 영화감독과 촉망받는 신인 배우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눈치 채기 시작했다. 둘 다 배우자가 없었으므로 불륜 관계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나이 차 때문에 사랑을 드러내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해 가을 두 사람은 조그마한 절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고 금반지를 한 개씩 나눠 꼈다. 그와 오지명이 함께 주연을 맡은 ‘삼각의 함정’ 촬영을 막 끝내고 이 감독의 유작이 된 ‘삼포 가는 길’ 제작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서울 토박이로 평소 서울 뒷골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샅샅이 알고 있던 이 감독은 서울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영화 소재로 삼곤 했다고 한다. 문씨에게 술집 작부 출신인 ‘삼포 가는 길’의 주인공 ‘백화’ 캐릭터를 생생히 설명하기 위해 그를 종로3가 뒷골목 술집에 데려가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과 술자리를 갖게 하기도 했다.
“그분은 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제 안의 어떤 면을 찾아내 영화 속에 살려내곤 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함께 영화를 찍는 게 즐거웠고 무척 편안했죠. 또 이미 머릿속에 모든 콘티가 완벽하게 들어 있어서 나머지 사람은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됐어요.”
문씨는 사방이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세상과 고립된 듯 느껴지던 강원도 산골에서 이 감독, 배우 김진규·백일섭 등과 함께 ‘삼포 가는 길’을 촬영했던 그해 겨울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순간 순간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기만 했던 그때, 문씨는 그것이 두 사람이 함께 연출한 짧은 사랑의 마지막 무대였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촬영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와 편집작업을 지휘하던 이 감독이 갑자기 쓰러져 75년 4월 세상을 떠난 것이다. 병명은 급성 위출혈이었다.
30년 만에 다시 본 영화 ‘삼포 가는 길’에서 만난 그의 숨결
“그토록 건장하고 힘차게 현장을 지휘하던 분이 병으로 쓰러졌다는 걸 믿을 수 없었어요. 쓰러지기 전 간경화를 앓았다는 얘기를 얼핏 듣긴 했지만,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죠.”
그러나 아무런 예고도 없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이 감독은 열흘 만에 44세라는 젊은 나이로 눈을 감았고, 문씨는 내내 중환자실 문밖을 지켰지만 끝내 단 한마디의 말도 주고받지 못한 채 그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던 순간, 죽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존재가 그 사람을 데려간 거예요. 시간이 더 흘렀으면 우리의 연애 관계도 한껏 부풀어오른 고무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조금씩 조금씩 변했을 텐데…. 우리의 사랑은 그만 한순간에 뻥 터져 자취도 없이 사라진 거죠.”
스물한 살 나이에 ‘하늘이 내려준 사랑’이라고 믿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잃고 나니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고 했다. 삶의 열정과 활기로 가득 차 있던 젊은 배우 문숙은 그의 죽음과 함께 영영 사라져버린 것 같았고, 자신에게 남은 건 모든 의욕을 잃은 껍데기뿐인 것 같았다는 것이다. ‘삼포 가는 길’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그는 껍데기만 남은 채로 몇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더 출연했지만, 배우로 일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를 더 힘들게 한 건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저는 영화감독과 살던 여배우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아무나 건드려도 되는 여자’로 여긴 거예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어떻게 해보겠다고 접근하는데, 정말 황당할 뿐이었죠.”
그러던 중 그는 외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한 남자를 만났다고 한다. 그의 청혼은 자신을 힘든 세상에서 지켜줄 바람막이이며 구원 같았고 문씨는 77년 그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78년과 84년 아들, 딸을 차례로 낳았지만 92년 이혼했고, 이후엔 플로리다주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매년 개인전을 열며 작품활동을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겪은 충격 때문인지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항상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요가와 명상도 공부해 몸의 건강을 음식으로 다스리는 치유음식 조리사 자격을 얻었으며 지금은 미국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자연건강음식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가 30년이 흐른 지금 이 감독에 대해 얘기하게 된 건 지난 2004년 뉴욕에서 우연히 ‘삼포 가는 길’을 다시 보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75년 봄, 이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 열린 시사회 때 원작자 황석영씨 옆에 앉아 울음을 참고 본 것을 마지막으로 애써 피해왔던 영화였다.
“뉴욕에 머물고 있는데 한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링컨센터에서 ‘삼포 가는 길’이라는 영화를 곧 상영한다며 같이 보러 가자고 했어요. 저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듯 놀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죠. 미국으로 떠난 뒤 누구에게도 제 이력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그 영화 제목조차 입 밖에 낸 적이 없었거든요.”
그는 “왜 얘기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당신이 그 영화 주인공인 게 분명하다. 같이 보러 가면 좋겠지만, 당신이 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는 혼자라도 보러 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엔 아무 일 없는 듯 생각하려 했어요. 하지만 무관심한 척하기엔 덫에 걸린 발목이 너무 아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떼어놓을 수가 없었죠. 만나지 않으려고 그토록 도망다니던 영화 ‘삼포 가는 길’이 30년 만에 나를 찾아낸 것이, 게다가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상영된다는 것이 우연치고는 너무 운명적으로 여겨졌어요. 게다가 제 딸이 마침 그 영화를 찍을 때의 저와 정확히 같은 나이였죠. 저는 우연이라는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나는 숙명적인 사건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문씨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네 나이였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으냐”고 묻고 함께 영화를 봤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자 30년 전의 기억이 한꺼번에 생생하게 밀려왔다. 긴 세월 동안 유리병에 넣어 간직한 보석들이 색깔 하나 바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면서 그는 오랜 세월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뒀던 한 사람의 숨결이 다시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며 살았지만 사실 제 마음속엔 큰 상처가 있었던 걸 알았어요. 말 한마디 없이 내 곁을 훌쩍 떠난 그에 대한 미움, 그리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저 자신에 대한 실망과 증오, 그리고 그를 끝내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뒤엉켜 굳은 철문이 돼 저를 가두고 있었죠. 하지만 영화 속에서 백화가 나오는 장면마다 놓치지 않고 그를 따라잡는 카메라 뒤편, 그분의 눈길을 의식하는 순간 제 마음속 무거운 철문 사이에 균열이 생기더군요.”
문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 감독과의 강렬하고 짧은 사랑을 가졌던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담아 최근 이 감독과 함께한 1년의 추억을 담은 책 ‘마지막 한 해-이만희 감독과 함께한 시간들’을 펴냈다.
“황석영 선생님이 제 책에 그런 글을 써주셨어요. 우리는 이만큼 늙었는데 이만희 감독은 지나간 세월 속에 우리보다 젊은 나이로 머물러 있다고요.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감독님은 제 마음속에 영원히 젊은 연인으로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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