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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란 제목으로 시 써 화제 뿌린 괴짜 시인 김윤식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지호영 기자

2006. 11. 17

최근 KBS ‘스펀지’에 ‘시인 김윤식의 2001년 작 시 제목은 (송혜교)다’라는 문제가 출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송혜교뿐 아니라 이효리, 비를 제목으로 삼은 시도 쓴다”고 말하는 괴짜 시인 김윤식을 만나 그의 시세계에 대해 들었다.

‘송혜교’란 제목으로 시 써 화제 뿌린 괴짜 시인 김윤식

“시인이 꼭 꽃, 별, 하늘 같은 소재로만 시를 써야 한다는 법 있습니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잖아요.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인 연예인을 소재로 한 시도 있을 수 있는 거죠.”
KBS 프로그램 ‘스펀지’에 시 ‘송혜교’가 소개돼 화제를 모은 김윤식 시인(59)을 만나러 인천에 갔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그는 한국문인협회 인천광역시회장을 맡고 있는 명망 있는 시인. 화제의 시 ‘송혜교’를 쓴 건 5년 전, 잠시 인천을 떠나 전북 김제에 머물고 있던 때라고 한다.
친지도 없이 외로운 곳에서 적적하게 지내던 그때를 김씨는 시집 ‘사랑한다는 것은’의 서문에서 “낮에는 드넓은 망국의 들판 여기저기를 다니며 스산한 바람 소리를 많이 들었고 밤이면 낙엽을 덮고 편안히, 생애의 깊은 잠에 들고 싶었던 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송혜교’를 처음 알 게 된 건,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밤 깊은 시간에 재방송되는 한 드라마를 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다른 배우들은 다 알겠는데 여주인공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평소 TV 드라마를 안 보는 편이라 ‘아마 신인인 모양이다’ 하며 봤죠. 연기는 다소 서툴지만, 솜털 보송한 얼굴에 참 청순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감탄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드라마는 MBC가 방영한 ‘호텔리어’였다. 그 배우가 하도 예뻐서 한밤중에 드라마를 보는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는 드라마 시작 전부터 TV를 틀어놓고 기다리다가 그 배우의 이름이 ‘송혜교’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한다. “이름도 얼굴처럼 참 곱다”고 생각했다고.
그가 시를 쓰게 된 건 며칠 뒤 전북 김제에 있는 대학도서관에서 백과사전을 넘기다 보게 된 에델바이스 꽃이 그 예쁜 배우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면서였다. 김 시인은 그 자리에서 ‘쌍떡잎식물 초롱꽃목’으로 시작되는 에델바이스의 학명을 메모했다고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에델바이스라는 이름을 학명으로 웅숭그려 감추는 맛을 띄우면 송혜교의 이미지에 맞을 것 같아서였다.

‘송혜교’란 제목으로 시 써 화제 뿌린 괴짜 시인 김윤식

김윤식 시인의 시집 ‘사랑한다는 것은’에 실린 시 ‘송혜교’.(오른쪽)


시의 나머지 부분이 완성된 것은 며칠 뒤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 갔을 때였다고 한다.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이 세운 절터. 그는 그곳에서 서동요의 전설을 떠올렸다고 한다. 서동요는 신라 진평왕 셋째 딸 선화공주를 보고 첫눈에 반한 서동이 지은 노래로, ‘선화공주가 서동을 사랑해서 밤마다 몰래 서동을 만나러 나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동은 아이들을 꼬여 이 노래를 퍼뜨린 뒤, 소문에 화가 난 왕이 공주를 내쫓자 아내로 맞아 백제의 무왕이 됐다. 시인은 서동요의 전설과 함께 “그 어여쁘고 청순한 여배우의 이름으로 노래를 지었다가, 아버지한테 쫓겨나면 내가 데려오고 싶다”는 시적 판타지를 꿈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시가 바로 ‘송혜교’다.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 신랑 진평왕, / 달 그늘에 숨어 밤마다 궐 밖으로 나가던 셋째 딸, / 그 눈시울.
웃는 사진을 오려놓고 깊어 가는 가을을 보낸다. / 노을처럼 아름답게 조금 더 죄 짓는 계절. / 그래야 할까 보다. / 서늘한 물 한 그릇.”

“‘쟁반노래방’ 보고 이효리를 제목으로 쓴 시도 있어요”
김 시인은 ‘송혜교’ 등 전북 김제에서 쓴 시들을 묶어 시집을 냈는데, 그걸 본 장석남 시인이 한 일간지 시 소개란에 이 시를 소개했다고 한다. 눈 밝은 독자 한 사람이 그걸 보고 ‘스펀지’ 프로그램에 제보해 방송 출연까지 하게 된 거라고.
“‘스펀지’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와서는 연예인 이름을 제목으로 시 쓴 사람은 저밖에 없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시인들 참 이상하네. 난 ‘이효리’라는 시도 썼는데’라고요(웃음).”
그가 또 다른 시 ‘이효리’를 쓴 건 ‘쟁반노래방’이라는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를 모으고 있던 지난 2003년이었다고 한다.
“그 프로그램이 동요 가사를 듣고 따라 부르는 내용이잖아요. 숟가락으로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하다 깔깔대고 웃는 이효리를 보다보니, 웃을 때 가늘어지는 눈이 마치 아지랑이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른 봄 하얗게 깔린 벚꽃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겹쳐지고요.”
그래서 쓴 시가 미발표작 ‘이효리’다.

“어쩌면 계집애가 그리 고우냐. / 어린 것이 봄밤의 향기를 혼자 머금었는지. / 머리채에 밤새 이슬이나 내리게 할 것을. / 넌 어른이 되지 마라. / 아니, 어서 여자가 되어라. / 아니, 아니, 파랑새가 되거나 물에 뛰어드는 푸른 별이 되거나 / 그냥 달빛 같은 작은딸이 되어도 좋다.
어쩌면 계집애, 그리도 고우냐. / 세상 아지랑이가 모조리 실눈을 뜨고 효리, 효리, 효리, 하면서 아른거리고 있다. / 봄을 타는지 하마터면 내가 마음 위에 떨어진 벚꽃 이파리들을 밟을 뻔했구나. / 오늘 하루, 나는 홀로 뜰을 거닐며 지내는 게 어떻겠느냐.”



김 시인은 ‘연예인 시리즈’의 다음 작품은 가수 비에 대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스펀지’ 담당 PD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비”라며 시를 한 편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비는 어느 정치가나 사업가보다 더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높인 한류스타로 평소 대견하게 생각했다”며 한번 써보겠다고 대답했다는 것. 그는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인천시 옹진군 시도에 있는 드라마 ‘풀하우스’ 세트장에도 답사차 다녀왔다고 한다.
요즘도 TV를 통해 종종 송혜교나 이효리의 모습을 본다는 김 시인은 “몇 년 전 시를 쓸 때 느꼈던, 보는 이의 심성까지 맑아지게 할 것 같은 이미지는 이제 지나갔고, 대신 성숙하고 열정적인 젊음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자신을 비롯해 세상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세월의 무상함이 새삼 느껴진다고.
아름다운 여배우도, 중년 고개를 넘긴 시인도 공평하게 흘러가는 세월 앞에 모두 늙고 변해간다. 그러니 송혜교와 이효리가 가장 눈부시던 시절, 그들의 아름다움이 한 시인의 시 속에 남아 언제까지나 붙박인 채 반짝이게 된 건 행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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