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민수PD(42)는 최근 올 가을부터 인정옥 작가, 고현정 등과 함께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할 것이라는 소식으로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표 PD가 어떤 드라마를 연출할 것인가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그가 마니아와 대중 양쪽으로부터 인정받는 몇 안되는 연출자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
표 PD는 지난 98년 KBS 드라마 ‘거짓말’을 연출한 뒤 국내 최초로 ‘드라마 팬클럽’이 조직될 정도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화제를 모았다. 이후 ‘바보 같은 사랑’ ‘슬픈 유혹’ 등의 작품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은 그는 지난해 청춘스타 송혜교와 비를 앞세운 KBS 드라마 ‘풀 하우스’를 히트시키며 대중적인 인기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지난 8월15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표 PD는 자신을 향해 있는 눈길들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시놉시스도 안 나온 작품인데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놀랐다”고 말하는 얼굴에서는 신인 PD 같은 풋풋한 수줍음마저 읽혔다. 그에게 ‘스타 PD’라는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사실 많이 낯설죠. ‘풀 하우스’를 하기 전까지는 꽤 오랫동안 ‘작가주의적’이라는 평을 듣는 작품만 만들었거든요. 시청률이 10% 이상 나온 작품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트렌디 드라마를 하고, 또 인기를 끌게 되니 ‘표민수가 변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생기더라고요. 하지만 전 그대로예요. 어떤 형식의 작품을 하든 ‘현실에 발을 딛고 선 사람’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은 변하지 않았죠. ‘스타’ ‘인기’ 그런 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는 ‘풀 하우스’의 남자 주인공 이영재(비)를 ‘아시아 최고의 배우’로 설정한 것도 드라마를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높은 산 밑의 그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해 보이는 사람 안에 있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높은 산은 햇빛을 제일 많이 받지만, 드리우는 그늘도 그만큼 짙잖아요. 이영재를 통해 일년에 단 하루도 빛이 들지 않는 그늘, 그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썩어가고 있는 존재의 아픔 같은 것을 표현하려고 했죠. 그러한 뜻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면 그건 제 부족함 때문이지, 제가 변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풀 하우스’에서 그가 변한 것이 있다면, 눈물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려 했던 이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웃음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실험했다는 것 정도인지 모른다. 이 드라마를 통해 난생처음 ‘시청자들을 웃기는’ 작품을 만든 표 PD는 새로운 드라마에도 웃음과 진지함을 6대 4 정도의 비율로 배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웃음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눈물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 드라마는 두 여자와 한 남자가 중심이 되어 끌고 가는 형식이 될 거예요. 현재는 고현정씨가 주인공을 맡는다는 것, 그리고 현실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거라는 정도 외에는 정해진 게 없어요. 고현정씨를 만나보지도 못했고요. 이제부터 작가, 배우와 함께 천천히 의논해봐야죠.”
새 드라마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
표 PD는 드라마가 빛나려면 배우와 그가 맡은 역할이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한다고 말했다. 원래 배우 안에 있는데 미처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을 끌어냈을 때 기쁨을 느낀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래서 드라마를 구상하기 전 먼저 배우와 만나 그의 숨어 있는 개성을 최대한 파악하려고 노력한다고.
20대 초반의 에어로빅 강사와 가정이 있는 중년 남성 사이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푸른 안개’의 주인공으로 이요원을 캐스팅한 것도 어느 날 문득 발견한 그의 남다른 모습 때문이었다고 한다.
표민수 PD가 연출한 드라마 ‘바보 같은 사랑’(위), ‘풀 하우스’의 한 장면.
“‘푸른 안개’를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전에 우연히 이요원씨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발랄한 이미지의 CF 모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이 친구가 처음 보는 PD 앞에서 의자 위에 책상다리로 앉은 채 밥을 먹더라고요. 제 눈치를 본다거나 분위기에 주눅드는 모습이 전혀 없었어요. 그 모습이 참 부럽데요. 저게 바로 우리 세대가 감탄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의 자신만만함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나중에 ‘푸른 안개’의 주인공을 캐스팅하려는 데 이요원씨의 그 모습이 생각났어요. 결과적으로 성공이었죠.”
이 작품 이후 표 PD는 이요원과 각별한 사이가 됐고, 결혼과 출산 등으로 한동안 브라운관을 떠나 있던 이요원이 최근 복귀를 결정하며 제일 먼저 그와 상의했을 만큼 깊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요원은 표 PD가 ‘풀 하우스’를 연출할 당시 촬영 현장까지 찾아와 그를 응원했고, 표 PD도 최근 이요원이 출연하고 있는 SBS ‘패션 70s’ 녹화장을 방문해 그를 격려했다고.
‘풀 하우스’에 송혜교를 캐스팅한 것도 한 정유회사 CF에서 명랑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풀 하우스’의 여주인공 역에 송혜교가 캐스팅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원작 만화 주인공과 이미지가 다르다며 비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송혜교의 매력을 믿었다고 한다.
“전 ‘풀 하우스’의 여주인공은 자신의 밝음으로 주위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혜교씨가 바로 그런 배우였죠. 드라마가 시작된 뒤에는 시청자들 모두 혜교씨가 여주인공 역할에 적임자라는 걸 인정했잖아요. 그는 정말 스스로 빛을 내는 지은이(‘풀 하우스’의 여주인공 이름), 그 자체였으니까요.”
일단 한번 믿고 인연을 맺으면 관계를 소중히 이어가는 표 PD의 성격은 자신의 ‘팬’들을 대할 때도 똑같이 나타난다. 지난 98년 표 PD가 연출한 첫 미니시리즈 ‘거짓말’이 방송된 뒤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표민수 팬클럽’은 8년 동안 한결같이 활동하고 있는데, 표 PD는 이들을 자신의 ‘식구’로 대한다. 팬 카페 게시판에 ‘저 민순데요…’로 시작되는 일상적인 글을 올리기도 하고, ‘풀 하우스’를 시작할 때는 자신의 새로운 실험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을 위해 따로 설명의 자리까지 마련했다. 그가 인정옥 작가와 함께 새로운 드라마를 하게 됐다는 소식을 처음 알린 곳도 언론이 아니라 자신의 팬클럽 카페였을 정도.
표 PD는 “전 국민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인원이지만, 나를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그들 앞에서 내 게으름이 탄로날까봐, 얄팍함이 드러날까봐 항상 두렵다. 그들은 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면서 동시에 무서운 채찍”이라고 털어놓았다. 이 팬들과 함께,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지켜보는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축제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싶은 것이 표 PD의 바람이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외로운 사람이든, 행복한 사람이든 함께 즐거워하며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축제 같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요. 축제가 끝나면 각자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테고, 또다시 쓸쓸해지고 불행해질지도 모르지만, 축제는 그 안에서 행복했다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거니까요. 그런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그제야 인터뷰 내내 드라마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가 단 한순간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드라마를 만들며 행복한 사람, 자신이 만든 드라마를 통해 많은 이들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 그가 만드는 다음 작품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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