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행동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다윈 지능’이라는 책에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는 것일진대 그러자면 이 세상 모든 수컷은 결국 암컷의 몸을 빌려야 한다. 천하의 나폴레옹도 마지막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조세핀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며 수컷의 본능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XY염색체의 반, Y염색체를 남기며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보전한다. 분명 반이나 닮았는데 별스럽게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면서도 모르는 사이도 없다.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왜 이리 서로에 대해 무심한 걸까.
2011년 아이돌 그룹 ‘포커즈’까지 탈퇴하며 뮤지컬에 집중하고 있는 이승현(22)과 가수 설운도(55·본명 이영춘) 부자도 몇 년째 같은 고민 중이다. 닮아도 너무 닮았지만 유독 친해지려고 다가서면 움찔 하고 멀어지는 이들을 위해 ‘절친 노트’를 쓸 시간을 마련했다.
유명 가수 아버지와 배우 출신 어머니에게 외모와 재능을 물려받은 이승현은 데뷔할 때 쓰던 예명인 이유 대신 본명으로 2012년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대작 뮤지컬 ‘엘리자벳’의 캐스팅보드에 이름을 올려 화제가 됐다. 그가 맡은 역은 루돌프. 주인공 엘리자벳의 아들로 출연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극 중 이야기에 큰 전환점을 마련하는 주연급 조연이다. 그는 첫 뮤지컬 무대임에도 두둑한 배짱으로 좋은 연기와 노래를 보여준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얀 얼굴을 덮을 만큼 큰 눈, 빨갛고 작은 입술의 꽃소년 이승현이 먼저 나타났다. 그는 “다래끼가 나서 눈이 좀 부었죠?” 하면서 웃어 보인다. 거의 다 나아간다고 하면서 소년 같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대화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오늘따라 머리에 힘을 더 주고 계신다”면서 미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아들의 말에서 뭐든지 완벽하길 바라는 설운도의 성격이 드러났다.
설운도를 기다리며 그가 출연하고 있는 뮤지컬 ‘엘리자벳’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가 환하게 웃는다. 지금 자신이 선 무대를 좋아하는 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뮤지컬 배우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끼를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뮤지컬은 음악 방송과 전혀 달라요. MR 틀고 카메라에 비칠 때만 멋지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죠. 뮤지컬은 오케스트라도 라이브고, 함께하는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컨디션이 어떤지에 따라 달라서 좋아요. 같은 작품을 하지만 매번 다른 작품을 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뮤지컬에 푹 빠진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설운도가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등장했다. 처음에는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는데 부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붕어빵이 따로 없었다.
“아버지가 가수 설운도가 아니었으면…”
한창 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느라 아버지는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나이 들고, 한가해질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훌쩍 자라 가족 대신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부자의 나이 차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다. 40대에 최고 인기를 누리며 하루가 모자랄 만큼 바빴던 설운도 역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친구 아빠들처럼 평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죠.”
그는 초등학생 시절 운동회 한 번 와주지 않은 아버지에게 서운한 적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나마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가족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어요. 다 함께 명동성당을 갔다가 근처에 있던 충무김밥집에 갔어요. 어릴 때는 매운 걸 못 먹어서 왜 그 매운 충무김밥을 사주는지 아버지가 야속하기도 했죠(웃음). 시간이 조금 나면 옆에 있는 극장(중앙극장)에서 영화를 보여주셨던 것도 기억나요.”
어릴 때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고도 덧붙였다. 설운도는 자식들이 같은 잘못을 세 번 하면 매를 들었는데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냈다. 게다가 원체 무뚝뚝한 아버지라 대화도 제대로 나눈 적이 없다며 “경상도 출신이라서 더 무뚝뚝하신 것 같아요”라고 덧붙이자 옆에서 설운도가 “우리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며 핀잔을 줬다. 아들은 입을 삐죽 내민다. 그에게 아버지가 무서우면 반항한 적도 있겠다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절대요. 물론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엄두를 못 냈어요.”
열다섯 살 때 미국으로 유학 갔다 돌아온 장남 이승현부터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인 둘째아들 승민과 막내딸 승아 역시 부모의 기대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 둘째 승민은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있고, 딸 승아는 예술고등학교에 다니며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 부모님의 끼를 이어받아 연예계 활동이 꿈인 이들 3남매는 아버지 이름을 생각하면 엇나갈 수 없었단다. 아버지는 바른 이미지인데 자식들이 사고를 치면 아버지에게 큰 피해를 줄 거란 생각에서였다.
“얘도 그렇고 동생들도 그렇고 크게 엇나가진 않았어요. 고맙죠. 이해해줘서.”
그나마 이승현이 가장 크게 사고 친 것을 꼽자면 고등학교 시절 면허도 없이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가 집 앞에서 경찰에게 단속된 것이란다. “이 정도 반항이면 애교죠?”라고 되묻는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혀를 찬다. 그건 반항이 아니라 죽겠다고 차도에 뛰어드는 것이라며 아들을 혼내는 설운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아들은 가수가 되겠다고 나섰다. 연예계가 얼마나 힘든 곳인지 경험해 온 아버지로선 이 길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아들은 쉽지 않은 싸움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입었다.
“포커즈 활동을 할 때 깨달았죠.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요. 2010년에 데뷔 싱글 앨범을 냈는데 천안함 사건이 터졌어요. 1주일 만에 활동을 접었죠. 이름만 반짝 알리다 만 정도였죠. 그 정도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8개월 더 준비를 해서 정규 1집 앨범을 냈고, 그가 쓴 곡을 포함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일본에도 소문이 퍼져 일본 활동까지 고려하던 중이었다. 멤버 중 한 명이 드라마 ‘아테나’에 출연하기도 해 이제는 궤도에 오르겠다 생각할 무렵, 악재가 또다시 찾아왔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던 멤버가 빙판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2011년 1월 말의 일이다. 이로 인해 그룹 포커즈는 잠정적인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마침 그와 소속사의 계약도 끝나갈 무렵이어서 같은 해 여름부터 몇 달 동안 휴식기에 돌입했다. 가끔 곡을 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 아버지의 속을 태웠다.
“집에서 노는 걸 보니 얼마나 답답한지. 어느 부모가 안 그렇겠습니까. 다 큰 아들한테 잔소리도 못하겠고. 속만 푹푹 끓인 거죠.”
아버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길로 들어선 것은 자신의 판단이니 스스로 해답을 찾길 기다렸다. 실패도 공부고, 새롭게 인생을 설계할 시간도 가져봐야 큰 기회가 있을 때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의 손에 낚싯대만 쥐어줬을 뿐이에요. 물고기를 잡는 건 자식이 직접 해야죠.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 불안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꿈은 스스로 실현해야 하는 것이죠.”
아들의 첫 뮤지컬 보고 엉엉 울다
설운도 아내 이수진 씨가 운영하는 서울 한남동 소재 이탤리언 레스토랑 ‘ON21’에서 만난 부자. 웃는 모습이 정말 많이 닮았다.
이승현은 자신의 이름으로 조용히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알려지기보다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주변에다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새로운 출발을 준비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친하게 지내던 그룹 JYJ 멤버 김재중의 추천으로 뮤지컬 ‘엘리자벳’의 오디션을 보았다. 마침 ‘엘리자벳’ 팀이 아이돌의 마스크와 노래 실력을 갖춘 배우를 찾고 있었다. 다른 연기자들보다 짧은 오디션 준비 기간이었지만 연출가 로버트 요한슨과 프로듀서 김지원에게 극찬을 받고 캐스팅됐다. 결국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닌 가수 이승현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이제 제 프로필에 ‘그룹 포커즈 탈퇴’만 있는 게 아니라 ‘뮤지컬 엘리자벳 출연’이 추가됐어요(웃음). 신인으로서는 감지덕지할 일이죠. 제 손으로 직접 따낸 일이기도 하고요.”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는 몇 달 동안 이제까지 아이돌로 활동했던 것보다 배운 것이 몇 배는 더 많다고 웃어 보이는 이승현. 설운도도 아들의 공연을 두 번 봤다고 했다. 아들의 무대를 직접 보니 어떤 느낌이었냐고 물었더니 “불안해서 못 보겠더라”고 털어놨다.
“만날 놀러 다니는 줄 알았죠. 그러니 더 불안하지. 그런데 첫 무대치고는 괜찮았어요. 아직 갈 길은 멀지만요.”
아버지의 말을 옆에서 들은 이승현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졌다.
“이 정도면 아버지한테 큰 칭찬을 들은 거예요. 보고도 아무 말씀 없으셔서 서운했는데 나중에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아버지가 네 공연 보고 엉엉 울었다’라고요.”
‘설운돌프’라는 애칭에 입이 벌어진 아버지
요즘 이승현은 뮤지컬뿐 아니라 작곡에도 물이 올랐다. 얼마 전 작곡한 세 곡이 모두 팔렸다며 수줍게 웃는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트로트를 듣고 자란 것이 도움이 많이 됐다고 아버지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엘리자벳’ 지방 공연 이후 새로 시작하는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 캐스팅됐다. 2012년 들어서 좋은 일이 자꾸만 생긴다며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전에는 가수 설운도의 아들로만 불리는 것이 싫기도 했다던 그는 이제는 ‘엘리자벳’의 팬들이 자신을 ‘설운돌프’라고 불러주는 것도 감사하다고 했다. 설운돌프라는 단어가 아들의 입에서 나오자 설운도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이는 ‘엘리자벳’ 팬들이 붙여준 별명. 팬들은 루돌프 역에 캐스팅된 배우 3명에게 각각 별명을 붙여줬는데 이승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 설운돌프, 전동석은 동돌프, 김승대는 승돌프다. 설운도는 그 이야기를 듣고 “요즘 사람들 참 별명도 잘 짓네” 하며 한참을 웃었다.
“어떻게 보면 질책의 대상도 될 수 있어요. 아버지는 국내 최고의 가수로 꼽히는 분인데 제가 실력이 부족하면 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되잖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되죠.”
이어지는 말에 아버지는 아들이 언제 이렇게 의젓해졌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버지가 느끼기에 이승현은 어떤 아들일까.
“일단 저를 빼닮았죠. 얼굴도 성격도요. 젊었을 때 딱 제 모습입니다.”
옆에서 “그건 아니다”라고 반박하던 아들은 “절대로 머리만큼은 닮지 않으면 좋겠어요”라고 중얼댄다. 아들의 말을 가만히 듣던 설운도는 인터뷰 내내 아끼던 말을 했다.
“일본에 공연 갔을 때도 그렇고, 지방 공연에 갔을 때도 그렇고 저를 가수 설운도가 아니라 이유, 이승현의 아버지로 여기는 어린 친구들도 많아졌어요. 개중에는 아내 가게에 들러 제 선물과 아내 선물을 놓고 가는 일본 팬들도 간혹 있어 놀랍니다. 아들이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바라보니 당연히 기분이 좋지요.”
3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부자. 이들이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며 남기는 발자국에서 서로에 대한 진한 애정이 우러나온다. 뒤를 따르다 놓쳐 잘못된 길로 간다면 바른 길로 인도해주고픈 아버지의 마음. 한 번쯤은 튕기지만 아버지 손을 잡고 싶은 아들의 마음. 가끔은 서로가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쯤 뒤를 살펴본다. 설운도, 이승현 부자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아버지와 아들은 다 그럴 것이다.
■ 장소협찬 | ON21(02-79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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