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살배기 딸을 둔 가정주부 이한숙씨(33·가명)는 알코올 중독 때문에 지난해 무려 8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8년 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그는 “아무리 술을 끊고 싶어도 퇴원만 하면 나도 모르게 술을 찾게 된다”며 한숨을 쉬었다.
“술을 처음 마시기 시작한 건 8년 전 첫 남편과 이혼한 후부터예요.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마침내 이혼했는데, 혼자 살면서 외로움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재혼한 후에도 술을 끊을 수 없었죠. 시어머니와의 불화가 심했는데, 시어머니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날에는 임신 중에도 혼자서 소주 한두 병을 마시곤 했어요.”
이씨는 딸을 출산한 후에도 술을 끊을 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면 다른 어떤 일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고. 갓난아기인 딸을 데리고 여관방을 찾아가 밤새 소주만 마시다 여관주인의 연락을 받은 남편이 부랴부랴 달려오는 일도 여러 차례 겪었다고 한다. 이씨가 이러한 자신을 가장 용서할 수 없었던 때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안 여기저기에 머리를 쿵쿵 부딪치는 자신의 모습을 어린 딸이 흉내내는 것을 보았을 때. 이씨는 “친정어머니도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일찍 돌아가셨는데, 내 딸도 어른이 된 뒤 엄마처럼 술에 의존하게 될까봐 너무 걱정된다”며 눈물을 흘렸다.
가정주부 임미자씨(56·가명)는 알코올 중독에 걸린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됐지만 아직도 완치되지 못한 상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세 아이를 키우고 몸이 불편한 친정 부모,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힘들 때마다 임씨 부부는 함께 소주를 마시곤 했다. 하지만 현재 남편은 술을 끊은 반면 임씨는 술을 끊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다.
“술이 깬 상태에서는 마음이 불안하고 손이 떨리거든요.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식구들 몰래 소주 한 병을 마신 다음 술기운에 의지해 아침밥을 하고 아이들 도시락을 싸곤 했어요. 술 취한 상태에서 집 밖으로 나가면 지갑을 잃어버리기 일쑤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에서 승용차로 두 시간 떨어진 고향 마을에 가 있기도 하고…. 남편과 며느리한테 미안해서라도 하루빨리 술을 끊어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사회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개방적인 술문화가 정착되면서 여성이 술을 마시는 것 또한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2003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만 18세 이상의 여성 4백50여 명을 대상으로 음주 실태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 달에 2∼4회 마신다’고 응답한 비율이 31.5%로 가장 높았으며 주 2∼4회 마신다고 응답한 비율은 12.4%로 나타났다. ‘거의 매일 마신다’고 답한 사람도 1.3%에 달했다. 음주량은 소주 반 병∼한 병이 43%로 가장 높았고 한 병 이상 마신다고 응답한 사람도 17.6%나 됐다.
술 마시는 여성이 증가하면서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는 여성 또한 증가하는 추세다. 2001년 실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국민보건조사(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여성 알코올 중독 환자는 10.5%로 약 55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3년 만에 3배 이상 증가한 수치(1998년 3.1%)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현재 분석 중인 2004년 여성 알코올 중독 환자의 수는 이보다 훨씬 늘어날 전망이다.
부부문제, 시집 갈등 등 생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여성 알코올 중독 불러
남성의 음주 원인과 여성의 음주 원인은 사뭇 다르다. 많은 남성들이 술을 즐기다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데 비해 여성들은 부부문제, 시집과의 갈등 등 생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함 때문에 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서 소개한 이한숙씨는 시어머니와의 갈등 때문에 알코올 중독 증세가 악화됐으며, 임미자씨는 과중한 가사일과 시집 식구들과의 갈등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경우. 2003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여성 음주 실태 조사에서도 여성들은 음주의 주요 원인으로 가족 간 불화, 남편의 무시, 시집에 헌신을 강요하는 남편, 시부모와의 갈등, 가사노동에서 보람을 느낄 수 없음 등을 꼽았다.
드물기는 하지만 직장일 때문에 술을 마시기 시작해 알코올 중독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8년 만에 완치한 김숙현씨(가명)가 그러한 경우. 전문직 여성인 김씨는 술을 마시면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는 등 업무 성과가 좋아지자 술에 의존하기 시작하다 직장에 알코올 중독인 사실이 알려져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일까지 겪었다고 한다.
이처럼 알코올 중독에 걸린 여성들은 남성 환자에 비해 치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술 취한 여성’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가족들조차 아내나 딸, 엄마가 드러내놓고 적극적으로 치료받기를 꺼려한다는 것. 서울알코올중독상담센터 박애란 소장은 “알코올 중독에 걸린 딸을 둔 많은 아버지들이 치료에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집안 망신’이라며 숨기기 급급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여성 알코올 중독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이혜화 상담사는 “가족 교육시간에 남성 환자 가족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반면 여성 환자 가족들은 참여율이 미미하다”고 전했다. 여성 알코올의존증 전문의료센터인 다사랑중앙병원·한방병원의 이호영 교육연구원장은 “알코올 중독환자가 술을 끊고 다시 마시게 되는 확률이 매우 높은데, 남성 환자에 비해 여성 환자의 재입원 비율이 낮은 형편”이라고 말했다. 알코올 중독을 완치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많은 남성들이 중도에 치료를 포기하고 아내를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
실제로 여성 알코올 중독 환자들 중에는 이혼이나 별거 등 가족에게 버림받는 경우가 많다. 다사랑병원이 지난 6월 입원환자 3백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혼 환자 중 이혼이나 별거 상태에 있는 여성 환자가 33.3%나 차지했다.
“이혼 당하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사실상 버림받은 여성 환자들도 많습니다. 20대 여성 환자들은 가족들이 면회 오는 경우가 많은데, 40~50대 여성 환자들 중에는 가족들이 면회오는 분이 거의 없어요. 몰래 술을 마시다 적발되면 제발 남편한테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해요. 남편에게 이혼당할까봐 두려워하는 거지요.”(이혜화 상담사)
신체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알코올에 약해 단시간에 중독돼
음주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해롭기 때문에 여성들의 주의가 특히 더 요구된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남성에 비해 술에 약하게 태어나 중독도 빠르게 진행된다. 여성은 체내 수분이 적고 체지방 비율이 높다. 지방은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며 체내 수분이 적은 탓에 여성은 남성보다 알코올 혈중농도가 높게 나타난다. 남성과 여성이 같은 양의 술을 계속 마실 경우 남성이 10년 걸려 알코올 중독이 된다면 여성은 2~4년 안에 중독이 된다는 것. 다사랑병원 신재정 원장은 “특히 알코올은 여성에게 호르몬 분비의 교란을 가져온다”고 경고한다. 오랜 기간 술을 자주 마실 경우 젖분비 자극 호르몬인 ‘프로락틴’이 많이 나오게 돼 몸이 임신 상태로 잘못 작동할 수 있다는 것. 이로 인해 생리 불순, 더 심할 경우 무월경 증상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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