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안철수(55) 전 국민의당 공동 상임대표의 부인인 김미경(54)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15년을 병리학 의사로 일하다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주립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법 공부를 새롭게 시작한다. 2005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스탠퍼드대학교 법과대학의 ‘생명과학과 법 센터’에서 특별 연구원으로 일한다. 그 와중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에서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한다. 2008년 초 스탠퍼드대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카이스트에 이어 모교인 서울대 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김 교수가 생애의 절반 이상을 의사이자 의학자로 지내는 동안 남편인 안철수 전 대표는 전도유망한 의사에서 벤처사업가로, 또 다시 정치인으로 직업을 바꿨다. 그런 남편의 결정을 묵묵히 응원하며 본업에 충실하던 김 교수는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후 매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을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다음날인 12월 10일 토요일 오후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만난 김 교수는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패딩 점퍼 차림이었다. 양손에는 바닥에 깔 휴대용 방석과 요즘은 잘 쓰지 않는 구형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남편이 쓰던 휴대전화”라고 했다. 김 교수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세련된 유학파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떠올렸던 기자의 예상이 보기 좋게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닷새 뒤인 12월 15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 의대 집무실에서 김 교수를 다시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가벼운 메이크업을 하고 정장을 입었지만 처음 봤을 때의 수수한 느낌 그대로였다. 김 교수는 질문에 답을 할 때도 담백했다. 연애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땐 소녀처럼 해맑게 웃기도 했다.
▼ 최근 촛불집회에 여러 번 참석하셨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지도자의 능력과 책임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판단력의 부재가 이번 사태와 같은 폐해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함께 찍힌 사진이 화제였어요. 박 대통령이 김 교수님을 ‘무섭게’ 견제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왔기 때문이죠.
그분(박 대통령)을 직접 대면한 건 그날 행사장에서가 처음인데 화면에서만 뵙던 분을 실제로 뵈니까 오히려 제가 많이 긴장됐어요. 그분이 저를 견제한다는 건 못 느꼈어요(웃음).
▼ 안 전 대표의 언행이 지나치게 신중했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남편은 평소에도 말수가 많지 않고 신중합니다. 특히 중요한 사안일수록 심사숙고하는데, 일단 결정을 하면 무서운 기세로 실행해 나가지요. 그리고 생각을 깊이 하고 행동에 옮기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적지 않나 싶어요. 되돌아보면서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게 있으니까요.
▼안 전 대표가 지난 11월 2일부터 당의 공식 입장보다 한층 강경한 태도로 ‘박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일관되게 외쳤습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안 전 대표는 11월 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최순실의 천문학적 국가횡령 음모를 박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고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며 박 대통령은 즉각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또 “더 이상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다. 당신에게 더 이상 헌법을 파괴하고 국민 자존심을 짓밟을 권한이 없다”며 “위대한 국민들과 함께 이 시간부터 정의를 되찾기 위한 길을 가겠다. 그 길에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번 사태는 정말 간과할 수 없는 위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이 위기상황에서 빨리 벗어나 안정된 정국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 골몰했고, 국정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좀 일찍 강경 발언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도 강경한 입장으로 초지일관했고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하야 요구를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 최근 안 전 대표의 지지율이 주춤하고 있는데 불안하시지 않습니까.
안 믿으시겠지만, 별로 불안하지 않습니다. 결국 국민이 남편의 진정성을 느끼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지율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김 교수는 서울대 의대 1년 선배인 안 전 대표를 교내 카톨릭학생회 진료봉사서클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캠퍼스커플로 발전했고, 1988년 결혼해 외동딸 설희 씨를 낳았다. 설희 씨는 현재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김 교수는 안 전 대표와 서울 노원구 상계동 아파트에서 단둘이 산다.
▼ 김 교수님도 일을 하시는데 어떻게 내조를 하십니까.
거의 매일 남편의 귀가예정 시간을 문자메시지로 확인해서 20~30분 일찍 집에 가 있어요. 바쁘니까 저녁식사를 못 할 때가 많아서 미리 음식을 좀 준비하려고요. 남편이 집에 있는 동안은 저도 함께 있으려고 애를 씁니다. 귀가 시간은 일정치 않아요. 일이 많을 땐 새벽에 귀가하기도 하는데 주로 과일, 야채, 파스타 같은 가벼운 식사를 즐기세요.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남편과 함께 집 근처 중랑천을 따라서 틈틈이 뜁니다. 한 30분 동안 남편은 5km 정도, 저는 4km 정도 뛰어요. 달리다 보면 점점 간격이 벌어져서 남편이 어느 지점까지 갔다 되돌아와요. 그러다 저를 만나면 같이 집에 오죠. 달리기는 건강에 정말 좋은 운동 같아요.
▼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잘 활용하시네요.
남편이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해요. 굉장히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 집에서 혼자 책을 읽곤 해요.
▼ 평소에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딸아이를 낳은 뒤부터 서로 존댓말을 썼어요. 양가 부모님이 서로 존댓말을 쓰시는 걸 보고 자라선지 남편도, 저도 설희 엄마·아빠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른들이 계실 때도 남편이 제게 존댓말을 쓰니까 사실 좀 민망합니다(웃음).
▼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쓰면 싸울 일이 없지 않나요.
그렇진 않죠. 하하하.
▼ 남편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본과 3학년 때 진료봉사서클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굉장히 순수해 보이는데 썰렁한 농담을 많이 해서 진지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요. 앞에서 심각하게 회의하는데 뒤에서 장난치는 사람 있잖아요. 그래서 공부를 잘할 것 같지 않았는데, 한 학년 위의 선배 언니들이 제 생각을 빗겨가는 얘기를 하더군요. ‘철수는 완전 천재야. 철수는 한번 읽으면 다 기억해’라고요.
▼ 그 얘기를 듣고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나요.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서클에서 진료봉사 활동을 같이 하다 보니 본과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소위 말하는 CC(캠퍼스커플)로 함께 다니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만 3년 정도 연애하다가 제가 레지던트 1년차이던 1988년 4월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 누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나요.
저는 남편이 저를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본과 3학년 여름방학 기간에 곧 환자들을 진료할 준비를 하면서 선배들로부터 주위의 흔한 병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배우는 시간을 가졌어요. 당시 남편이 맡은 것은 고혈압 강의였는데 강의를 굉장히 잘했어요. ‘진짜 명석하구나’ 생각했죠. 그해 남편과 같이 하계 진료를 하고 돌아와 바로 시험 준비에 들어갔어요. 본과 3학년은 1년 가까이 시험을 안 보다가 11월부터 이듬해 1월초까지 몰아서 보거든요. 굉장히 힘든 시험이라 준비할 게 많았는데 남편이 제게 시험공부를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같이 공부를 시작했는데 방학 때는 공부를 했는지, 영화를 봤는지 모를 정도였죠(웃음).
▼ 이상형이 명석한 사람인가요.
공부와 독서를 즐기는 사람을 좋아해요. 남편과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도서관 밖에서 일회용 커피를 놓고 밤새도록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그동안 자기가 접한 책과 영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짧은 인생이지만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 털어놨어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우주 이야기, 퍼즐 맞추기처럼 서로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게 많아 코드가 서로 잘 맞았어요. 남편은 하나에 꽂히면 깊이 빠져요. 그런 모습에 매료된 면도 있죠. 원서 한권을 한 달 만에 독파하겠다고 얘기하면 그 어려운 걸 해내더라고요. 그럼 제가 맛있는 과자를 사줬죠(웃음).
▼ 교수님도 공부를 좋아했나봅니다.
제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는데 3살 때 가족이 모두 여수로 이사했어요. 아버지가 교육열이 대단한 분이셔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오빠와 함께 서울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아무리 친척이 잘해줘도 부모님이 많이 그리워 방학 전날이면 집에 갈 생각에 들떠있던 기억이 나요. 부모님이 고생하면서 저희를 뒷바라지하고 계셔서 공부라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습니다.
▼ 아버지가 정말 교육에 열성적이셨네요.
(서울대 의대 집무실 책꽂이에 진열돼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원서들을 가리키며)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셔서 그게 한이셨죠. 오빠와 제가 보기도 힘든 저런 책들을 마구 사주실 정도로요. 저건 일부고 친정에 더 있습니다. 질이 좋아서 지금도 볼만해요(웃음).
▼ 안 전 대표와 교수님이 굉장히 유명한 CC였다고 들었어요.
저희가 연애를 빨리 시작한 건 아닌데 같이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는 사람들의 이목에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아요. 서클에서든 도서관에서든 같이 앉아 있어서 사람들이 좀 불편해하고 특히 제 여자친구들이 싫어했어요. 자기들과 안 놀고 만날 ‘철수 형’ 뒤만 따라다닌다고요(웃음). 그때는 남자선배를 “형”이라고 불렀어요.
김 교수는 남편을 ‘철수 형’이라고 부르던 연애시절의 사진과 함께 지금까지 고이 간직해온 그 당시 추억의 흔적들을 꺼내 보여줬다. 그 중에는 해리슨 포드 주연의 〈위트니스〉와 미셸 파이퍼 주연의 〈레이디 호크〉 등 안 전 대표와 함께 관람한 영화의 전단지들도 있고, 김 교수가 인턴이 됐을 때 안 전 대표가 선물했다는 야광 알람시계도 있었다.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메모장과 카드에는 ‘어디에서 나온 건지는 잘 모르지만 불어는 보기만으로도 아름다운 것 같다. 누구(김 교수를 지칭한 것) 같이.’‘ 점심 같이 먹자_AM 9:15’ ‘보고 싶다. 실습 빨리 끝났음 좋겠다_AM 9:50’ ‘마음 속의 평화로움과 행복감이 항상 미경이와 함께하기를_같이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서 기쁜 사람이_86.7.12’ 등의 글들이 안 전 대표의 사인과 함께 적혀 있었다. 안 전 대표가 이런 로맨티시스트일 줄 몰랐다고 하자 김 교수는 “남편이 준 사소한 것이라도 버리지 않았어요. 좀 오글거리죠”라며 해맑게 웃었다.
안 전 대표는 2009년 6월 MBC 〈무릎팍 도사〉에서 “두 분 다 첫사랑이시죠?”라는 MC 강호동의 물음에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다. 김 교수는 자신에게도 안 전 대표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 부산 남자와 결혼한다니 집안 어른들이 반대하진 않았나요.
지역 문화가 서로 다르니까 혹시나 시집가서 홀대를 받을까, 구박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도 있긴 했어요. 저도 지역 문화가 다른 건 알았지만 그것이 결혼할 때 고려의 대상이 되진 않았어요. 이렇게 진실하게 저를 끝까지 사랑해줄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가장 중요했어요. 남편과 함께 있으면 제가 온전해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대학생 때나 사회에 진출할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생각에 내심 불안했는데 남편이 자기와 같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용기를 북돋워줬어요. 함께하면서 그 말을 믿게 됐어요. 남편의 무한 긍정 마인드와 낙천적인 인생관이 제게도 옮겨왔어요. 그 덕분에 저도 정서적인 안정을 찾았죠.
▼ 남편이 의사에서 벤처사업가로 진로를 바꿀 때 반대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이 의대 졸업하고 기초의학을 선택했어요. 기초의학은 의대 졸업생 중에 소수만 선택하거든요. 대부분 임상의학을 하길 원하죠. 시아버님도 마찬가지셨고요. 그래서 청진기도 미리 사놓으셨는데 남편이 기초의학을 하겠다고 해서 다들 당황스러워했죠. 저는 기초의학이 남편에게는 올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요. 근데 그걸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말렸어요. 저는 남편이 기초의학을 하면서 학문적 성과를 내리라고 믿었거든요. 잘하면 노벨상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어요(하하). 정말 수학, 물리에 대한 이해는 정상 범위는 아니었어요. 그런 재능이 아까워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남편이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 문제는 자기밖에 해결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이유를 듣고 막을 도리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섭섭했지만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부부가 많이 닮아 보입니다. 교수님도 병리학 의사로 15년 일하다 미국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증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의대를 들어가기 전부터 법학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법학적인 사고의 틀이 의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고요. 그래서 성균관대 의과대학에서 부교수로 1~2년 일하다 미국 유학을 갔어요. 병리학자로서 안정궤도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학습 능력이 있을 때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 남편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설 때는 어땠나요.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IT혁명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왜 꼭 정치를 해야 하나 싶었죠. 남편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정치는 잘하면 표시가 안 나지만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딸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면 해야 한다’고요.
▼ 딸을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져요. 안 전 대표는 아버지로서 몇점 정도 되나요.
거의 만점이죠. 딸이랑 남편은 정말 찰떡궁합이에요. 둘이서 좋아하는 게 똑같아서 같이 전자오락도 하고, 게임도 하고,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해요. 설희가 아빠를 굉장히 좋아해요. 남편도 딸을 무척 좋아하고요. 경상도 남자가 말 없고 무뚝뚝하다고 하는데, 남편은 좀 달라요. 말수는 많지 않지만 무척 스위트한 면이 있어요. 아침에 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커피를 꼭 만들어다 주고, 잘 잤냐는 인사도 잊지 않거든요. 농담도 적절하게 잘해서 제가 많이 웃습니다. 하하.
▼ 워킹맘으로서 육아의 고충을 느낀 때는 언제인가요.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지방대학의 전임강사로 발령이 났는데 당시 남편은 군복무 중이어서 저 혼자 아이를 키우며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당시에는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제도가 유명무실했고 어느 직장에서는 여성의 출산을 달가워하지 않던 때여서 워킹맘들이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었어요.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분조차 육아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정도였죠. 그래서 도우미 아주머니의 시간이 안 될 때는 제 집무실에 아이를 두고 강의를 하러간 적도 있어요.
▼ 설희 씨가 외동딸이라 귀하게 키웠을 것 같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집안일을 좀 많이 시키는 편입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분담해서 쓰레기를 버리고 방 정리도 스스로 하게 했어요. 자녀에게 공부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집안일을 시키지 않는 게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요. 가끔 바람도 쐬고 자기가 할 도리를 하게 해야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면서 효율적으로 쓸 수 있어요.
▼ 딸을 키우면서 사교육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초등학교 때는 학원에 좀 보냈어요.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이 성적이 안 좋으니 사교육을 해야 한다고 권하셔서요. 한국에서도 사교육을 많이 시킨 건 아니었는데 미국에 가서는 아예 안 시켰어요.
▼ 딸이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화학과 수학을 복수 전공하고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교육 노하우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그런 거 없어요.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반항하면서 공부도 안했어요. 수학을 정말 못하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희한하게 남보다 월등히 잘하더니 대학에 가서 5년만에 학사와 석사를 받았어요. 지금은 수학과 화학을 접목한 이론화학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죠. 설희가 수학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된 건 아빠를 의식한 측면도 있을 거예요. 남편이 예전에 수학을 신화적으로 잘했다고 하거든요. 미국 유학도 도움이 됐어요. 제가 법대를 3년 다니고 졸업할 때쯤 남편이 미국에 와서 MBA를 했는데, 아이를 집에 두고 다닐 수가 없어서 세 식구가 다 같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거든요. 그러면서 장시간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이 딸아이의 몸에 뱄죠.
▼ 한 매체에서 부부의 수입 등을 근거로 ‘월 3천만 원을 쓸 것으로 예상된다. 서민의 생활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한 달에 3천만원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정확히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을 빼면 월 생활비가 많아도 4백만~5백만원 수준이에요. 결혼 초에는 조교와 레지던트 월급이 얼마 안 돼 저금을 거의 하지 못했어요. 1995년 안철수연구소(이하 안랩)를 시작할 때도 먹고 사는 게 쉽지 않았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씀씀이는 비슷합니다. 저는 출퇴근할 때 지하철을 타고 다녀요. 그때는 사람들이 몰려 ‘지옥철’이 되곤 하지만, 사람들도 만나고 이동 시간도 아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 안 전 대표가 쓰던 휴대전화를 물려받아 쓰고 계셔서 놀랐어요.
재활용을 잘합니다. 남편이 몇 년 쓰다 줬고 저도 몇 년째 쓰고 있어서 화면 닫는 기능이 잘 안 되고 중간에 방전될 때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보완해주는 어플리케이션이 있더라고요. 요즘은 그걸로 불편함을 해소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쓰던 거, 딸이 쓰던 거를 쓰면 기분이 좋아요(웃음).
▼ 2011년 안 전 대표가 자신의 재산 중 현금 1천억 원과 주식 1백만 주를 ‘동그라미재단’을 만들어 기부하셨는데 지금 그 재단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좀 안타까운 게, 처음에 남편이 출연자로서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고 같이 운영해나가면 좋았을 것 같아요. 지금 재단에서 주로 하는 일이 창업 지원, 창업을 위한 기업가정신 교육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건 남편의 원래 관심분야고, 학교에서도 가르치던 영역이어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남편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재단 운영에 관여할 수 없게 돼 지금은 중요한 결정을 이사회 중심으로 하는 걸로 압니다. 이사님과 직원들이 좋은 분들이셔서 잘해주고 계십니다.
▼ 안 전 대표가 지나온 삶을 보면 나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남편이 항상 강조하는 게 복지, 정의, 평화, 상생이에요. 그리고 이를 실현하려면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죠.
▼ 지금 이재명 성남시장은 사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고구마, 박원순 서울시장은 김치, 안희정 충남지사는 밥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안 전 대표는 어떤 음식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남편을 보면 생수 같아요. 이미지도 깨끗하고, 실제 모습도 다르지 않은,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몸의 70~80%를 차지하는,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처럼요. 더 거창하게 말하면 제 남편은 문명이 태동하는 물줄기처럼 새로운 일을 하고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 남들이 생각지 못한 새로운 모델과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요. 안철수연구소가 좋은 예죠. 정치인으로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마치며 새해 소망을 묻자 김 교수는 “딸이 꼭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기를, 그리고 얼마 전 친정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친정어머니와 시부모님이 건강하시길 바란다”고 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안 전 대표의 새해 정치 행보도 찬란한 꽃길이기를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지러운 시국에 몸도, 마음도 추운 이 겨울을 안 전 대표가 채워주는 온기로 따뜻하게 나고 있을 듯하다.
“남편이 겨울에 참 유용합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는지 손이 분홍색이고 무척 따뜻해요. 인간 손 난로예요. 남편이 겨울에 파카를 입고 다닐 때 남편의 손을 잡거나 호주머니에 손을 함께 넣고 있으면 금세 효과가 나타나죠.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 남편과 악수하시면 좋을 겁니다(웃음).”
사진 박해윤·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김 교수가 생애의 절반 이상을 의사이자 의학자로 지내는 동안 남편인 안철수 전 대표는 전도유망한 의사에서 벤처사업가로, 또 다시 정치인으로 직업을 바꿨다. 그런 남편의 결정을 묵묵히 응원하며 본업에 충실하던 김 교수는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후 매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을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다음날인 12월 10일 토요일 오후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만난 김 교수는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패딩 점퍼 차림이었다. 양손에는 바닥에 깔 휴대용 방석과 요즘은 잘 쓰지 않는 구형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남편이 쓰던 휴대전화”라고 했다. 김 교수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세련된 유학파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떠올렸던 기자의 예상이 보기 좋게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닷새 뒤인 12월 15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 의대 집무실에서 김 교수를 다시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가벼운 메이크업을 하고 정장을 입었지만 처음 봤을 때의 수수한 느낌 그대로였다. 김 교수는 질문에 답을 할 때도 담백했다. 연애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땐 소녀처럼 해맑게 웃기도 했다.
▼ 최근 촛불집회에 여러 번 참석하셨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지도자의 능력과 책임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판단력의 부재가 이번 사태와 같은 폐해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함께 찍힌 사진이 화제였어요. 박 대통령이 김 교수님을 ‘무섭게’ 견제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왔기 때문이죠.
그분(박 대통령)을 직접 대면한 건 그날 행사장에서가 처음인데 화면에서만 뵙던 분을 실제로 뵈니까 오히려 제가 많이 긴장됐어요. 그분이 저를 견제한다는 건 못 느꼈어요(웃음).
▼ 안 전 대표의 언행이 지나치게 신중했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남편은 평소에도 말수가 많지 않고 신중합니다. 특히 중요한 사안일수록 심사숙고하는데, 일단 결정을 하면 무서운 기세로 실행해 나가지요. 그리고 생각을 깊이 하고 행동에 옮기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적지 않나 싶어요. 되돌아보면서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게 있으니까요.
▼안 전 대표가 지난 11월 2일부터 당의 공식 입장보다 한층 강경한 태도로 ‘박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일관되게 외쳤습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안 전 대표는 11월 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최순실의 천문학적 국가횡령 음모를 박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고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며 박 대통령은 즉각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또 “더 이상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다. 당신에게 더 이상 헌법을 파괴하고 국민 자존심을 짓밟을 권한이 없다”며 “위대한 국민들과 함께 이 시간부터 정의를 되찾기 위한 길을 가겠다. 그 길에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번 사태는 정말 간과할 수 없는 위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이 위기상황에서 빨리 벗어나 안정된 정국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 골몰했고, 국정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좀 일찍 강경 발언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도 강경한 입장으로 초지일관했고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하야 요구를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 최근 안 전 대표의 지지율이 주춤하고 있는데 불안하시지 않습니까.
안 믿으시겠지만, 별로 불안하지 않습니다. 결국 국민이 남편의 진정성을 느끼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지율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김 교수는 서울대 의대 1년 선배인 안 전 대표를 교내 카톨릭학생회 진료봉사서클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캠퍼스커플로 발전했고, 1988년 결혼해 외동딸 설희 씨를 낳았다. 설희 씨는 현재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김 교수는 안 전 대표와 서울 노원구 상계동 아파트에서 단둘이 산다.
▼ 김 교수님도 일을 하시는데 어떻게 내조를 하십니까.
거의 매일 남편의 귀가예정 시간을 문자메시지로 확인해서 20~30분 일찍 집에 가 있어요. 바쁘니까 저녁식사를 못 할 때가 많아서 미리 음식을 좀 준비하려고요. 남편이 집에 있는 동안은 저도 함께 있으려고 애를 씁니다. 귀가 시간은 일정치 않아요. 일이 많을 땐 새벽에 귀가하기도 하는데 주로 과일, 야채, 파스타 같은 가벼운 식사를 즐기세요.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남편과 함께 집 근처 중랑천을 따라서 틈틈이 뜁니다. 한 30분 동안 남편은 5km 정도, 저는 4km 정도 뛰어요. 달리다 보면 점점 간격이 벌어져서 남편이 어느 지점까지 갔다 되돌아와요. 그러다 저를 만나면 같이 집에 오죠. 달리기는 건강에 정말 좋은 운동 같아요.
▼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을 잘 활용하시네요.
남편이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해요. 굉장히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 집에서 혼자 책을 읽곤 해요.
▼ 평소에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딸아이를 낳은 뒤부터 서로 존댓말을 썼어요. 양가 부모님이 서로 존댓말을 쓰시는 걸 보고 자라선지 남편도, 저도 설희 엄마·아빠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른들이 계실 때도 남편이 제게 존댓말을 쓰니까 사실 좀 민망합니다(웃음).
▼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쓰면 싸울 일이 없지 않나요.
그렇진 않죠. 하하하.
▼ 남편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본과 3학년 때 진료봉사서클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굉장히 순수해 보이는데 썰렁한 농담을 많이 해서 진지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요. 앞에서 심각하게 회의하는데 뒤에서 장난치는 사람 있잖아요. 그래서 공부를 잘할 것 같지 않았는데, 한 학년 위의 선배 언니들이 제 생각을 빗겨가는 얘기를 하더군요. ‘철수는 완전 천재야. 철수는 한번 읽으면 다 기억해’라고요.
▼ 그 얘기를 듣고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나요.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서클에서 진료봉사 활동을 같이 하다 보니 본과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소위 말하는 CC(캠퍼스커플)로 함께 다니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만 3년 정도 연애하다가 제가 레지던트 1년차이던 1988년 4월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 누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나요.
저는 남편이 저를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본과 3학년 여름방학 기간에 곧 환자들을 진료할 준비를 하면서 선배들로부터 주위의 흔한 병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배우는 시간을 가졌어요. 당시 남편이 맡은 것은 고혈압 강의였는데 강의를 굉장히 잘했어요. ‘진짜 명석하구나’ 생각했죠. 그해 남편과 같이 하계 진료를 하고 돌아와 바로 시험 준비에 들어갔어요. 본과 3학년은 1년 가까이 시험을 안 보다가 11월부터 이듬해 1월초까지 몰아서 보거든요. 굉장히 힘든 시험이라 준비할 게 많았는데 남편이 제게 시험공부를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같이 공부를 시작했는데 방학 때는 공부를 했는지, 영화를 봤는지 모를 정도였죠(웃음).
▼ 이상형이 명석한 사람인가요.
공부와 독서를 즐기는 사람을 좋아해요. 남편과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도서관 밖에서 일회용 커피를 놓고 밤새도록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그동안 자기가 접한 책과 영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짧은 인생이지만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 털어놨어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우주 이야기, 퍼즐 맞추기처럼 서로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게 많아 코드가 서로 잘 맞았어요. 남편은 하나에 꽂히면 깊이 빠져요. 그런 모습에 매료된 면도 있죠. 원서 한권을 한 달 만에 독파하겠다고 얘기하면 그 어려운 걸 해내더라고요. 그럼 제가 맛있는 과자를 사줬죠(웃음).
▼ 교수님도 공부를 좋아했나봅니다.
제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는데 3살 때 가족이 모두 여수로 이사했어요. 아버지가 교육열이 대단한 분이셔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오빠와 함께 서울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아무리 친척이 잘해줘도 부모님이 많이 그리워 방학 전날이면 집에 갈 생각에 들떠있던 기억이 나요. 부모님이 고생하면서 저희를 뒷바라지하고 계셔서 공부라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습니다.
▼ 아버지가 정말 교육에 열성적이셨네요.
(서울대 의대 집무실 책꽂이에 진열돼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원서들을 가리키며)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셔서 그게 한이셨죠. 오빠와 제가 보기도 힘든 저런 책들을 마구 사주실 정도로요. 저건 일부고 친정에 더 있습니다. 질이 좋아서 지금도 볼만해요(웃음).
▼ 안 전 대표와 교수님이 굉장히 유명한 CC였다고 들었어요.
저희가 연애를 빨리 시작한 건 아닌데 같이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는 사람들의 이목에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아요. 서클에서든 도서관에서든 같이 앉아 있어서 사람들이 좀 불편해하고 특히 제 여자친구들이 싫어했어요. 자기들과 안 놀고 만날 ‘철수 형’ 뒤만 따라다닌다고요(웃음). 그때는 남자선배를 “형”이라고 불렀어요.
김 교수는 남편을 ‘철수 형’이라고 부르던 연애시절의 사진과 함께 지금까지 고이 간직해온 그 당시 추억의 흔적들을 꺼내 보여줬다. 그 중에는 해리슨 포드 주연의 〈위트니스〉와 미셸 파이퍼 주연의 〈레이디 호크〉 등 안 전 대표와 함께 관람한 영화의 전단지들도 있고, 김 교수가 인턴이 됐을 때 안 전 대표가 선물했다는 야광 알람시계도 있었다.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메모장과 카드에는 ‘어디에서 나온 건지는 잘 모르지만 불어는 보기만으로도 아름다운 것 같다. 누구(김 교수를 지칭한 것) 같이.’‘ 점심 같이 먹자_AM 9:15’ ‘보고 싶다. 실습 빨리 끝났음 좋겠다_AM 9:50’ ‘마음 속의 평화로움과 행복감이 항상 미경이와 함께하기를_같이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서 기쁜 사람이_86.7.12’ 등의 글들이 안 전 대표의 사인과 함께 적혀 있었다. 안 전 대표가 이런 로맨티시스트일 줄 몰랐다고 하자 김 교수는 “남편이 준 사소한 것이라도 버리지 않았어요. 좀 오글거리죠”라며 해맑게 웃었다.
안 전 대표는 2009년 6월 MBC 〈무릎팍 도사〉에서 “두 분 다 첫사랑이시죠?”라는 MC 강호동의 물음에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다. 김 교수는 자신에게도 안 전 대표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 부산 남자와 결혼한다니 집안 어른들이 반대하진 않았나요.
지역 문화가 서로 다르니까 혹시나 시집가서 홀대를 받을까, 구박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도 있긴 했어요. 저도 지역 문화가 다른 건 알았지만 그것이 결혼할 때 고려의 대상이 되진 않았어요. 이렇게 진실하게 저를 끝까지 사랑해줄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가장 중요했어요. 남편과 함께 있으면 제가 온전해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대학생 때나 사회에 진출할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생각에 내심 불안했는데 남편이 자기와 같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용기를 북돋워줬어요. 함께하면서 그 말을 믿게 됐어요. 남편의 무한 긍정 마인드와 낙천적인 인생관이 제게도 옮겨왔어요. 그 덕분에 저도 정서적인 안정을 찾았죠.
▼ 남편이 의사에서 벤처사업가로 진로를 바꿀 때 반대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이 의대 졸업하고 기초의학을 선택했어요. 기초의학은 의대 졸업생 중에 소수만 선택하거든요. 대부분 임상의학을 하길 원하죠. 시아버님도 마찬가지셨고요. 그래서 청진기도 미리 사놓으셨는데 남편이 기초의학을 하겠다고 해서 다들 당황스러워했죠. 저는 기초의학이 남편에게는 올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고요. 근데 그걸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말렸어요. 저는 남편이 기초의학을 하면서 학문적 성과를 내리라고 믿었거든요. 잘하면 노벨상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어요(하하). 정말 수학, 물리에 대한 이해는 정상 범위는 아니었어요. 그런 재능이 아까워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남편이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 문제는 자기밖에 해결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이유를 듣고 막을 도리가 없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섭섭했지만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부부가 많이 닮아 보입니다. 교수님도 병리학 의사로 15년 일하다 미국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증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의대를 들어가기 전부터 법학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법학적인 사고의 틀이 의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고요. 그래서 성균관대 의과대학에서 부교수로 1~2년 일하다 미국 유학을 갔어요. 병리학자로서 안정궤도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학습 능력이 있을 때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 남편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설 때는 어땠나요.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IT혁명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왜 꼭 정치를 해야 하나 싶었죠. 남편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정치는 잘하면 표시가 안 나지만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딸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면 해야 한다’고요.
▼ 딸을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져요. 안 전 대표는 아버지로서 몇점 정도 되나요.
거의 만점이죠. 딸이랑 남편은 정말 찰떡궁합이에요. 둘이서 좋아하는 게 똑같아서 같이 전자오락도 하고, 게임도 하고,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해요. 설희가 아빠를 굉장히 좋아해요. 남편도 딸을 무척 좋아하고요. 경상도 남자가 말 없고 무뚝뚝하다고 하는데, 남편은 좀 달라요. 말수는 많지 않지만 무척 스위트한 면이 있어요. 아침에 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커피를 꼭 만들어다 주고, 잘 잤냐는 인사도 잊지 않거든요. 농담도 적절하게 잘해서 제가 많이 웃습니다. 하하.
▼ 워킹맘으로서 육아의 고충을 느낀 때는 언제인가요.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지방대학의 전임강사로 발령이 났는데 당시 남편은 군복무 중이어서 저 혼자 아이를 키우며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당시에는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제도가 유명무실했고 어느 직장에서는 여성의 출산을 달가워하지 않던 때여서 워킹맘들이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었어요.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분조차 육아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정도였죠. 그래서 도우미 아주머니의 시간이 안 될 때는 제 집무실에 아이를 두고 강의를 하러간 적도 있어요.
▼ 설희 씨가 외동딸이라 귀하게 키웠을 것 같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집안일을 좀 많이 시키는 편입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분담해서 쓰레기를 버리고 방 정리도 스스로 하게 했어요. 자녀에게 공부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집안일을 시키지 않는 게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요. 가끔 바람도 쐬고 자기가 할 도리를 하게 해야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면서 효율적으로 쓸 수 있어요.
▼ 딸을 키우면서 사교육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초등학교 때는 학원에 좀 보냈어요.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이 성적이 안 좋으니 사교육을 해야 한다고 권하셔서요. 한국에서도 사교육을 많이 시킨 건 아니었는데 미국에 가서는 아예 안 시켰어요.
▼ 딸이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화학과 수학을 복수 전공하고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교육 노하우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그런 거 없어요.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반항하면서 공부도 안했어요. 수학을 정말 못하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희한하게 남보다 월등히 잘하더니 대학에 가서 5년만에 학사와 석사를 받았어요. 지금은 수학과 화학을 접목한 이론화학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죠. 설희가 수학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된 건 아빠를 의식한 측면도 있을 거예요. 남편이 예전에 수학을 신화적으로 잘했다고 하거든요. 미국 유학도 도움이 됐어요. 제가 법대를 3년 다니고 졸업할 때쯤 남편이 미국에 와서 MBA를 했는데, 아이를 집에 두고 다닐 수가 없어서 세 식구가 다 같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거든요. 그러면서 장시간 앉아서 공부하는 습관이 딸아이의 몸에 뱄죠.
▼ 한 매체에서 부부의 수입 등을 근거로 ‘월 3천만 원을 쓸 것으로 예상된다. 서민의 생활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한 달에 3천만원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정확히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을 빼면 월 생활비가 많아도 4백만~5백만원 수준이에요. 결혼 초에는 조교와 레지던트 월급이 얼마 안 돼 저금을 거의 하지 못했어요. 1995년 안철수연구소(이하 안랩)를 시작할 때도 먹고 사는 게 쉽지 않았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씀씀이는 비슷합니다. 저는 출퇴근할 때 지하철을 타고 다녀요. 그때는 사람들이 몰려 ‘지옥철’이 되곤 하지만, 사람들도 만나고 이동 시간도 아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 안 전 대표가 쓰던 휴대전화를 물려받아 쓰고 계셔서 놀랐어요.
재활용을 잘합니다. 남편이 몇 년 쓰다 줬고 저도 몇 년째 쓰고 있어서 화면 닫는 기능이 잘 안 되고 중간에 방전될 때도 있는데 그런 것들을 보완해주는 어플리케이션이 있더라고요. 요즘은 그걸로 불편함을 해소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쓰던 거, 딸이 쓰던 거를 쓰면 기분이 좋아요(웃음).
▼ 2011년 안 전 대표가 자신의 재산 중 현금 1천억 원과 주식 1백만 주를 ‘동그라미재단’을 만들어 기부하셨는데 지금 그 재단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좀 안타까운 게, 처음에 남편이 출연자로서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고 같이 운영해나가면 좋았을 것 같아요. 지금 재단에서 주로 하는 일이 창업 지원, 창업을 위한 기업가정신 교육인 걸로 알고 있어요. 그건 남편의 원래 관심분야고, 학교에서도 가르치던 영역이어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남편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재단 운영에 관여할 수 없게 돼 지금은 중요한 결정을 이사회 중심으로 하는 걸로 압니다. 이사님과 직원들이 좋은 분들이셔서 잘해주고 계십니다.
▼ 안 전 대표가 지나온 삶을 보면 나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남편이 항상 강조하는 게 복지, 정의, 평화, 상생이에요. 그리고 이를 실현하려면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죠.
▼ 지금 이재명 성남시장은 사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고구마, 박원순 서울시장은 김치, 안희정 충남지사는 밥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안 전 대표는 어떤 음식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남편을 보면 생수 같아요. 이미지도 깨끗하고, 실제 모습도 다르지 않은,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몸의 70~80%를 차지하는, 생명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처럼요. 더 거창하게 말하면 제 남편은 문명이 태동하는 물줄기처럼 새로운 일을 하고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 남들이 생각지 못한 새로운 모델과 무대를 만드는 사람이요. 안철수연구소가 좋은 예죠. 정치인으로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마치며 새해 소망을 묻자 김 교수는 “딸이 꼭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기를, 그리고 얼마 전 친정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친정어머니와 시부모님이 건강하시길 바란다”고 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안 전 대표의 새해 정치 행보도 찬란한 꽃길이기를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지러운 시국에 몸도, 마음도 추운 이 겨울을 안 전 대표가 채워주는 온기로 따뜻하게 나고 있을 듯하다.
“남편이 겨울에 참 유용합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는지 손이 분홍색이고 무척 따뜻해요. 인간 손 난로예요. 남편이 겨울에 파카를 입고 다닐 때 남편의 손을 잡거나 호주머니에 손을 함께 넣고 있으면 금세 효과가 나타나죠.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 남편과 악수하시면 좋을 겁니다(웃음).”
사진 박해윤·조영철 기자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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