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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감추고 싶었던 아픔과 방황, 재벌가 자제들 일탈의 이유…”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딸 박선영 대표

EDITOR 김지은

2020. 01. 23

부러울 것 없는 재벌 후계자들이 왜 갑질을 하고 마약에 빠질까.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장녀 박선영 씨가 이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박선영(46) 더 하우(THE HOW) 영성경영연구소 대표가 ‘여성동아’ 편집부로 연락을 해왔을 때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 대표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였던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의 1남 3녀 중 장녀로,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로 불리는 정·관계 로비 사건 발생 당시(2009년)부터 일선에서 태광실업을 이끌었다. 그는 박 회장이 2년 6개월의 형을 마치고 출소한 2014년 초까지 그룹의 대표이사 자격으로 대외 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은 다소 묘연하다. 간간이 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있지만 극히 제한적이었다. 2년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더 하우 영성경영연구소 대표이사로 자신을 소개했을 뿐 ‘태광실업’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가 태광실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박연차 회장의 딸이란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활동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박연차 회장의 딸이란 것을 내놓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숨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최근까지도 제 존재에 대한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박선영인데, 그 박선영이 두 아들의 엄마이고 영성경영연구소의 대표이며 박연차의 딸인 것이지 박연차의 딸이 먼저는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를 ‘박선영’이 아닌 ‘박연차의 딸’로 보는 것에 휘둘리거나 끌려다녔습니다. 그저 저를 이용하려고만 들고, 그게 싫어서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숨어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 박선영으로서, 내가 내 중심을 바르게 세웠으니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비단 자신이 처한 특수한 환경 때문에 비롯된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이건 저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죠. 전업주부들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만 살아가고 있는 것도 비슷합니다. 자기 삶에 정작 내가 없으니 아이만 좇고 남편만 내세우다 갱년기 우울증에 걸리게 되는 거죠. 그런데 스스로에 대한 의미를 내가 부여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나요? 저 또한 ‘모든 출발은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도 재력가 부모를 둔 여느 2세들처럼 결핍을 모르고 자랐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면 과외 선생이 따라붙었고, 어디를 가야 한다고 하면 운전기사가 동행을 했다. 돈을 받고 고용된 과외 선생은 그를 훈육하기에 역부족이었고 나이가 한참 많은 운전기사도 어린 그의 수발을 드는 정도의 위치였다. 




재벌 2세들의 심경, 백번 이해한다

“미국 가면 거지도 영어 하고 양담배를 피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냥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부모님 눈치만 좀 보면 되지 나머지는 신경 쓸 것이 없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했으니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큰 어려움 없이 가질 수 있었거든요. 이런 현상은 재벌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일반 가정의 아이들도 ‘오냐오냐, 너는 공부만 해라, 나머지는 엄마가 다 해줄게’ 이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나요. 심지어 다 해줘놓고도 ‘돈이 있으면 더 해줬을 텐데 돈이 없어 여기까지밖에 못 해줬다’며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결핍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공감 능력 부족이다. 다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받는 타격감은 상상 이상이다. 누군가를 위로할 줄도, 위로받을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아마 대부분의 재력가 부모를 둔 2세들도 ‘몰라서’ 그러는 면이 더 클 겁니다. 흔히 재벌 2세들은 네트워크가 풍부하고 대인관계 또한 다양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누가 감히 그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뒤에서는 욕을 할지언정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런 걸 알기나 할까요? 어릴 때부터 늘 자기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았는데. 누구도 그 아이들에게 사람의 근본을 가르치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재력가 부모를 둔 2세로서는 드물게, 초등학교부터 대학(중앙대 불어학과)까지 국내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해외 유학을 했다고 해서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세상을 좀 더 많이 알게 된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서양에서처럼 오너의 자식들이 밑바닥 견습생부터 시작해 차곡차곡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가졌고,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자신이 몹시 똑똑하고 잘난 줄로만 알게 된다. 무엇을 모르거나 실수를 해도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고, 설령 스스로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대부분 회사와 관련된 것이어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물어보거나 이야기할 수 없다. 오너가 된 마당에 시시콜콜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보기 곤란한 입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끼리끼리, 비슷한 처지의 2세·3세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유흥으로 괴로움을 풀려 한다”고 설명했다. 

“저 역시 엄청나게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20대의 자신을 ‘부모 속깨나 썩이던 자식’으로 회고했다. 

“우리 또래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 한창 ‘신세대’니 ‘X세대’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던 때였어요. 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이던 부모님 세대와는 간극이 컸죠. 부모님은 대학을 졸업했으니 당연히 시집을 가야 한다 생각하셨고, 그렇게 끌려가다 결혼 날짜까지 받아놓고 해외로 도망을 갔더랬죠. 그때는 내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소위 말하는 정략결혼 그런 것도 아니었고 우리 부모님이 조건 같은 걸 따져가며 결혼을 시키려던 분들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금수저였지만 언제나 그는 마음 붙일 곳이 없다고 느꼈다. 술을 과하게 마시고, 쇼핑 중독에 빠져 이것저것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잔뜩 사다가 뜯지도 않은 채 처박아두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술을 마시고 미친 사람처럼 청담 사거리에서 강남구청까지 맨발로 뛰어다닌 적도 있었어요.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고 자기가 책임지는 건데, 스스로가 내 인생 하나도 어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던 거죠. 그때의 저를 생각하면 부모님께 무척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항간에는 박연차 회장이 거동도 힘들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문이 있다. 박 대표는 이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측근에 의하면 알려진 것처럼 건강이 나쁜 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수록 연로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애틋해지는 건 사실이다. 박 대표는 “어릴 때 아버지도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란 걸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업가도 실수를 하거나 술을 마시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아버지가 그럴 때마다 그 모습이 전부인 양 평가하려 들었다. 아버지가 존경할 만한 점이 많은 사업가라는 건 나이를 한참 더 먹고, 스스로가 ‘박선영’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 후에야 가능해졌다. 

“우연히 아버지에 관한 글을 보게 되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나는 젊은 사람들에게 직장이나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사업을 한다. 나는 한 번도 돈을 쫓은 적이 없고, 사람을 좇은 것이다. 그랬더니 그냥 돈이 따라왔다.’ 기업가로서 굉장히 명확한 철학이죠. 아버지가 대단한 사업가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공한 기업가라 해도 절대적이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들여다보면 결점도 많고, 안타까운 부분도 많은 그저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부족하다거나 잘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기 어려운 위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사람의 근본을 배우거나 가르치기 어렵기도 하고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아버지 박연차 회장의 구속으로 경영 일선에 나서게 된 그가 5년 동안 배운 것은 ‘자신이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였다고 한다. 한 회사를 이끌 준비도, 자세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시작한 회사 경영은 그에게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힘듦을 배울 최초의 기회가 되었다. 그래도 그는 ‘그것만 해도 굉장한 수확’이라고 평가했다. 

“진짜 성공한 사람은 숲과 나무를 동시에 봅니다.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숲 또는 나무만 보거나 숲과 나무를 둘 다 보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바람이 다 새게 됩니다. 내가 ‘모른다’는 걸 알아야 다른 사람에게 배우고 도움을 받을 자세가 되는데, 그마저도 안 되면 바람이 새는 줄도 모르고 누가 바람이 샌다고 해도 ‘그쯤이야 뭐’ 하면서 그냥 넘어가버리죠.” 

그가 스스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배움을 청한 것은 노련한 전문경영인이나 CEO가 아닌 박연차 회장의 ‘인생상담사’로 알려진 김규덕 씨였다. 현재 박 대표가 몸담고 있는 더 하우 영성경영연구소 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박연차 게이트 발생 당시 한 시사 월간지 인터뷰를 통해 박 회장이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에 대해 “자신의 주변이 변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돈이 어느 정도 있을 때 남에게 주는 건 별문제가 안 되지만 그 돈이 일정 수준 넘어서면 주변에 권력자들이 몰려들면서 고통이 시작된다. 자신의 환경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몇 차례 이야기 했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박연차 회장이 젊은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호기롭게 베풀던 버릇이 화를 자초했다는 뜻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박 대표에 대해 “아버지를 닮아 통이 큰 사람이다. 배짱도 있고 일도 꼼꼼히 처리하는 편이어서 아버지보다 더 큰 기업인이 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박선영 대표와 김규덕 씨의 인연은 2003년부터 시작되었다. 다리를 놓아준 것은 아버지 박연차 회장이었다. 

“스승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제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저도 요즘 언론에 보도되는 재벌 2세, 3세들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전까지의 저는 어머니가 ‘눈이 하도 살벌해서 쳐다보기가 힘들다’고 하셨을 정도로 날카롭고 제멋대로였거든요.” 

그가 스승으로부터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내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주제 파악’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짓은 죄다 해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잘못되면 남 탓만 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하나씩 깨달음이 오더군요. 과거 나의 잘못과 어리석음까지도 다 나의 자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의 딸, 그 누구의 엄마가 아닌 ‘박선영’이라는 인간의 근본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가 내 중심을 세우고 나니 욕심을 버리고 세상과 당당히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있는 기업이 성공한다

그는 ‘영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인류의 영성은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인간 본성에 관한 것으로 특정 종교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돈을 벌 때도 돈 그 자체가 아닌 사람에 목적을 두는 것이 영성경영입니다. 쇼핑을 하고 비싼 음식을 사 먹는 것은 ‘확장성’이 없습니다. 좋은 차나 보석을 산다고 내 인생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돈이 확장성을 가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물질적인 것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피곤하지만 그 돈이 영성경영을 통해 확장성을 가진다면 사람의 근본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성경영은 ‘지속 가능한 기업’을 만드는 바탕의 힘이 된다고도 말했다. 

“이어령 교수가 말씀하셨죠. ‘지성의 시대는 갔다. 영성의 시대다’라고요. 미국의 학자들도 요즘에는 ‘Spritual Management’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작 어떻게 해야 영성경영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저 스스로는 영성경영을 통해 제가 많이 달라진 걸 느꼈지만 그것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기엔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게 과연 실현 가능할까, 의구심이 생기더군요.” 

그가 2013년을 끝으로 태광실업을 떠났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이후의 그는 수련과 기도, 실천의 생활로 접어들었다. 경기도 광주 곤지암 인근에 터를 잡고 두 아이들과 함께 전원생활에 들어갔다. 여느 재력가 3세들처럼 사립학교나 국제학교에 보내는 대신 동네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리도록 했다. 학원을 보내거나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대신 동네 친구들이 자연스레 그의 집을 놀이터 삼아 드나들도록 했다. 아이들은 스스로가 정한 룰대로,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어질러놓은 자리를 말끔히 치운다. 아무리 좋은 조건과 환경이 있어도 본인이 중심을 잘 잡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그의 육아 방식은 오히려 심플하다. 그가 아이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용기와 자신감이다. 

“용기와 자신감은 교만함과 다른 겁니다. 당당한 아이들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할 줄도 알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고집을 피우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최근 10여 년에 걸친 기나긴 별거 생활을 끝내고 이혼서류를 정리했다. 싱글맘으로서의 부담은 없다. 함께 영성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함께 돌본다. 

“애들은 남의 손을 타야 잘 큰다는 옛말이 있죠. 덕분에 아이들은 너무 밝고 구김살이 없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야 세상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영성경영을 세상에 전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과 자신감도 생겼다. 1월 말 숭실대학교에서 열리는 토크 콘서트를 시작으로 올 상반기 중에는 재미교포 CEO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도 준비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해, 근본을 바로잡지 못해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영성회복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소망이다.

기획 김명희 기자 사진 홍태식 디자인 최정미 장소협찬 로얄라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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