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말 배우 이범수가 제작을 맡은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의 창립 작품 ‘자전차왕 엄복동’이 극장에 걸렸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신문물의 상징이던 자전차 한 대로 일본의 막강한 선수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동아시아 전역을 휩쓴 ‘동양 자전차왕’ 엄복동(1892~1951)을 소재로 한 영화다. 지금은 거의 잊힌 이름이지만 그 당시에는 엄복동이 출전하는 자전차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경성 인구 30만 중 10만여 명이 몰려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스포츠 스타요,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자긍심을 안긴 ‘민족 영웅’이었다고 한다.
주인공 엄복동 역을 맡은 가수 겸 배우 정지훈(37·예명 비)은 촬영 전부터 한국체육대학교(이하 한체대)에서 실제 엄복동 선수의 자전차를 그대로 재현한 자전차로 420m의 트랙을 하루 20바퀴씩 정주행하는 특훈을 감행했다. 촬영 기간 동안 그가 달린 거리는 무려 지구 반 바퀴인 2만km에 달한다. 어디 그뿐인가. 1983년 ‘동아일보’가 ‘어깨 폭이 넓고 가슴이 유달리 커서 심폐기능이 뛰어났고 하체가 잘 발달돼 있었다’고 묘사한 엄복동 선수의 다부진 체격을 완성하기 위해 훈련 중에도 상·하체 근력운동을 거르지 않았다. 또 엄복동 선수의 전매특허인 ‘엉덩이 들어올리기’ 기술을 익히려고 팔다리에 상처를 달고 살았다.
그 밖에 이범수·강소라·김희원·고창석·이시언·민효린 등 유명 배우가 출연하고, 1백억원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그럼에도 손익분기점인 4백만 명에 한참 못 미치는 흥행 성적에 그쳤다. 하지만 정지훈이 보여준 연기 투혼만큼은 빛이 났다는 평가가 많다. 화려한 가수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인 어리바리하고 순박한 물장수 엄복동으로 분해 조선 최고의 자전차 선수로 거듭나며 가슴 뭉클한 감동과 웃음을 자아낸 그를 이른 봄날에 만났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많지 않아요. 어떤 면에 끌려 이 작품을 하게 됐나요.
2016년 12월경 이범수 선배님에게서 ‘자전차왕 엄복동’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제목만 보고 만화 영화를 떠올렸는데 내용을 읽어보니 ‘일제강점기’라는 문구와 ‘엄복동’이라는 인물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더구나 엄복동이 실존 인물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욱 빠져들었죠. 사실 엄복동 선생님은 손기정 선수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에요. 독립투사는 아니지만 스포츠 영웅이라 표현할 만해요. 2002 한일 월드컵 때 광화문에 80만~1백만 명이 나가 응원을 했던 것처럼 일제강점기에 이분이 일본 선수를 제치고 계속 1등을 하니까 그 경기를 보려고 10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그것이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조선인들에겐 자부심과 자긍심이 된 거죠. 총칼보다 무서운, 정신을 지배하는 하나의 힘이 된 거고요. 이런 인물은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출연을 결심했어요. 엄복동이라는 이름만 알려도 이 영화는 성공한 거라 생각해요.
일각에선 역사 왜곡, 국뽕 의혹을 제기합니다.
제가 촬영 전 찾아보니 엄복동 선수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더군요. ‘동아일보’에 그나마 좀 있는 편이었는데 대부분 단신이었고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사실만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보드에 정리해봤어요. 영화에서는 극적인 재미를 위해 엄복동이 경기 평택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서울까지 자전차를 타고 오간 것으로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서울 태생이란 점, 엄복동 선수가 자전차로 달리기 힘든 모랫바닥에서도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서 타는 기술을 보여줬을 정도로 상체와 다리 힘이 대단했다는 걸 알게 됐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엄복동 선수를 일본군이 조준 사격하려고 할 때 우리 민중이 튀어나와서 방어벽을 쌓아주는 것도 사실이었고요. 다큐멘터리가 아니기에 실화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하긴 했지만 결코 엄복동을 미화하거나 국뽕으로 흥행하려고 만든 작품이 아니에요. 당시 조선인들이 엄복동 선수에게 너무 열광하니까 그 일이 있었던 자전차대회에서 일본이 근거도 없이 반칙패를 선언해요. 엄복동 선수가 화가 나 단상에 올라 일장기를 꺾어버리고요. 일제강점기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보통 깡이 아니고서는 힘들죠. 그래서 일본군이 엄복동 선수를 조준 사격하려 하니까 민중이 방어벽을 친 것까진 실화인데, 극에서는 엄복동 선수가 자전차를 던지고 방어벽을 쳤던 민중이 총을 맞자 울분에 찬 모습으로 엔딩을 그렸죠.
실제 엄복동 선수와 흡사한 체격과 실력을 다지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감수했다죠.
한체대 옆에 있는 선수촌에 들어가 아침부터 기본기 훈련과 체력 단련을 위한 근력운동을 하고 자전차 타기 연습을 두 시간씩 했어요. 제 사무실에서도 연습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 하루 6~8시간씩 탔고요. 근데 그렇게 연습했어도 촬영장은 모랫바닥이어서 타이어가 헛돌고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웠어요. 실제로는 영화에서 달리는 모습의 3분의 1 정도의 속력이었어요. 더구나 옛날 자전차는 브레이크가 없어서 뒷바퀴 체인을 당겨야 멈출 수가 있어요. 한체대 국가대표 선수들도 타기 힘들어할 정도였죠. 그런 자전차로 달리며 일본 선수와 눈빛을 교환하고 기 싸움을 하는 것도 간단치 않았고요. ‘나는 왜 만날 이렇게 체력적으로 힘든 작품만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제가 결정한 일이니 어쩌겠어요.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영화에서 자전차 경주가 박진감 넘치게 나온 건 CG팀 덕분이에요.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자전차를 타는 이미지도 캐릭터를 각인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 같아요. 드라마 ‘풀하우스’에선 자전거 타는 모습이 섹시해 보인다는 반응을 얻었는데, 이번엔 어떤 이미지를 추구했나요.
촬영 중엔 어떤 이미지를 추구할 정신이 없었어요. 외적으로 비치는 이미지보다는 엄복동이라는 인물 자체를 살려내는 데 집중했어요. ‘이럴 때 엄복동 선수는 어떻게 했을까?’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던지며 같은 1등을 해도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표정이나 액션에 미묘한 차이를 두려고 했어요. 야수의 표정을 지어도 보고, 소처럼 침을 흘리는 모습도 흉내 내보고, 자전차를 타면서 토한 적도 있고, 악을 쓰기도 하고. 정말 별의별 것을 다 해봤어요. 이제 두 바퀴는 안 보고 싶어요. 하하.
‘자전차왕 엄복동’ 촬영이 한창이던 2017년 6월 기자는 한 가구 행사장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그해 4월부터 시작된 촬영이 경남 합천, 전북 전주 등 지방에서 이어져 첫째 딸을 임신한 아내 김태희 곁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을 미안해했다. 또 2월 26일 김태희의 소속사에서 그녀의 둘째 임신 소식을 공개하기 전까지 이 기쁜 소식을 애써 감췄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김태희와의 결혼 생활에 대한 물음에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가족에게 누가 되는 느낌”이라고 양해를 구하며 “내 삶의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가족이고, 여느 부부와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고 답했다.
휴식기에 재충전을 하는 나름의 비법은 뭔가요.
집에서 IPTV로 영화를 즐겨 보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재충전해요. 제가 god의 ‘보통날’과 ‘길’이라는 노래를 좋아해요. 평소에는 ‘보통날’의 상쾌한 에너지를 받으며 하루를 열고, 힘들 때는 ‘길’을 들어요. 가사가 제 상황과 딱 맞아떨어져서요.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 노래에 위안을 얻어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고, ‘보통날’의 가사처럼 친구들과 맥주 한잔하면서 사는 이야기하고, 집에서는 맥주 한 캔 먹고 ‘오늘도 잘 보냈구나!’ 해요. 저는 집에서 ‘혼술(혼자 술 마시기)’ ‘혼맥(혼자 맥주 마시기)’ 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주량이 궁금하네요.
저는 소주만 빼고 다 잘 마셔요. 특히 맥주는 일주일 동안 그것만 마시며 버텨보라고 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고된 날 샤워를 싹 하고 맥주 한 캔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한여름에 땀을 막 흘리잖아요. 그 상태로 집에 들어가 아주 뜨거운 물에 씻어요. 그러고 나서 시원한 맥주 두 캔을 꺼내 꾸역꾸역 다 먹죠. 그러면 카타르시스가 확실하게 느껴지거든요(웃음).
살다 보면 길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지 않나요.
지금까지 방황을 한 적이 없어요. 정신력이 강한 편이에요. 그 어떤 것도 제가 어릴 때 겪은 힘든 상황보다 더하진 않거든요.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어요. 더군다나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를 일찍 돌아가시게 한 죄보다 더 무섭고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억울하게 오해를 받거나 열심히 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금방 수긍하는 편이에요. ‘내게 잘못이 있겠지! 더 열심히 하자!’고 마음을 다지면서요. 다만 ‘내가 이런 기준으로 살아왔는데 사람들은 왜 나를 이렇게 볼까?’ 하는 억울함 때문에 약간의 힘든 과정들이 있긴 하죠. 그럴 때도 저는 대체로 잠도 잘 자는 편이에요. 연예인이 원래 쉽지 않은 직업이잖아요. 연예인에겐 침체기, 절정기, 호황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뭘 해도 다 잘되는 시기가 있는데 그 시기를 맞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고 그렇게 될 확률도 희박하지만요. 또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길을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다시 올라갈 수도 있고요. 연예인이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지만 오해를 바로잡아야 할 때도 있긴 하더라고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되새기는 좌우명이 있나요.
요즘 가장 많이 곱씹는 말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예요. 일만 열심히 하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10대 중반까지는 엄마, 아빠한테 만날 혼나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많이 맞기도 했어요. 하지만 사회 경력을 쌓은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남들이 평생 겪을 혹은 겪지 말아야 할 여러 감정을 느껴봤고 배우로서 열심히 살아볼 것이냐, 가수 겸 음반 제작자로서의 생활을 유지할 것이냐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어요. 근데 요즘은 일만 하다 50~60대를 맞기보다는 체력이 될 때 쉬고 노는 것도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보다 돈을 많이 벌어봤고 전 세계에 혁신을 가져온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 이런 말을 했대요. “나에게 남은 건 산소호흡기 유지 장치인 파란 불 하나”라고요. 그 말이 무척 심오하게 다가왔어요.
어떤 면에서 심오하게 다가왔나요.
저도 똑같거든요. 일을 되게 열심히 해왔지만 갑자기 내일 어떤 사고로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거죠.
현재 바람은 뭔가요.
올해는 몸 쓰는 작품을 안 하는 거요. 하하하. 거기에 큰 의미를 두고 제대로 병맛인 코미디에 도전하고 싶어요.
‘망가질’ 준비는 된 거죠.
제 필모그래피에서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 ‘상두야 학교 가자’예요. 2002년 그 작품에 출연하면서 이미 저란 사람을 내려놨어요. 사실 제가 코미디를 되게 좋아해요. ‘상두야 학교 가자’를 보면 반은 코미디인데 반은 진짜 슬퍼요. 그때처럼 다시 한 번 개그 본능을 불태워보고 싶어요.
디자인 최정미 사진제공 레인컴퍼니
주인공 엄복동 역을 맡은 가수 겸 배우 정지훈(37·예명 비)은 촬영 전부터 한국체육대학교(이하 한체대)에서 실제 엄복동 선수의 자전차를 그대로 재현한 자전차로 420m의 트랙을 하루 20바퀴씩 정주행하는 특훈을 감행했다. 촬영 기간 동안 그가 달린 거리는 무려 지구 반 바퀴인 2만km에 달한다. 어디 그뿐인가. 1983년 ‘동아일보’가 ‘어깨 폭이 넓고 가슴이 유달리 커서 심폐기능이 뛰어났고 하체가 잘 발달돼 있었다’고 묘사한 엄복동 선수의 다부진 체격을 완성하기 위해 훈련 중에도 상·하체 근력운동을 거르지 않았다. 또 엄복동 선수의 전매특허인 ‘엉덩이 들어올리기’ 기술을 익히려고 팔다리에 상처를 달고 살았다.
그 밖에 이범수·강소라·김희원·고창석·이시언·민효린 등 유명 배우가 출연하고, 1백억원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그럼에도 손익분기점인 4백만 명에 한참 못 미치는 흥행 성적에 그쳤다. 하지만 정지훈이 보여준 연기 투혼만큼은 빛이 났다는 평가가 많다. 화려한 가수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인 어리바리하고 순박한 물장수 엄복동으로 분해 조선 최고의 자전차 선수로 거듭나며 가슴 뭉클한 감동과 웃음을 자아낸 그를 이른 봄날에 만났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많지 않아요. 어떤 면에 끌려 이 작품을 하게 됐나요.
2016년 12월경 이범수 선배님에게서 ‘자전차왕 엄복동’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제목만 보고 만화 영화를 떠올렸는데 내용을 읽어보니 ‘일제강점기’라는 문구와 ‘엄복동’이라는 인물이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더구나 엄복동이 실존 인물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욱 빠져들었죠. 사실 엄복동 선생님은 손기정 선수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에요. 독립투사는 아니지만 스포츠 영웅이라 표현할 만해요. 2002 한일 월드컵 때 광화문에 80만~1백만 명이 나가 응원을 했던 것처럼 일제강점기에 이분이 일본 선수를 제치고 계속 1등을 하니까 그 경기를 보려고 10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그것이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조선인들에겐 자부심과 자긍심이 된 거죠. 총칼보다 무서운, 정신을 지배하는 하나의 힘이 된 거고요. 이런 인물은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출연을 결심했어요. 엄복동이라는 이름만 알려도 이 영화는 성공한 거라 생각해요.
일각에선 역사 왜곡, 국뽕 의혹을 제기합니다.
제가 촬영 전 찾아보니 엄복동 선수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더군요. ‘동아일보’에 그나마 좀 있는 편이었는데 대부분 단신이었고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사실만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보드에 정리해봤어요. 영화에서는 극적인 재미를 위해 엄복동이 경기 평택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서울까지 자전차를 타고 오간 것으로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서울 태생이란 점, 엄복동 선수가 자전차로 달리기 힘든 모랫바닥에서도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서 타는 기술을 보여줬을 정도로 상체와 다리 힘이 대단했다는 걸 알게 됐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엄복동 선수를 일본군이 조준 사격하려고 할 때 우리 민중이 튀어나와서 방어벽을 쌓아주는 것도 사실이었고요. 다큐멘터리가 아니기에 실화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하긴 했지만 결코 엄복동을 미화하거나 국뽕으로 흥행하려고 만든 작품이 아니에요. 당시 조선인들이 엄복동 선수에게 너무 열광하니까 그 일이 있었던 자전차대회에서 일본이 근거도 없이 반칙패를 선언해요. 엄복동 선수가 화가 나 단상에 올라 일장기를 꺾어버리고요. 일제강점기에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보통 깡이 아니고서는 힘들죠. 그래서 일본군이 엄복동 선수를 조준 사격하려 하니까 민중이 방어벽을 친 것까진 실화인데, 극에서는 엄복동 선수가 자전차를 던지고 방어벽을 쳤던 민중이 총을 맞자 울분에 찬 모습으로 엔딩을 그렸죠.
실제 엄복동 선수와 흡사한 체격과 실력을 다지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감수했다죠.
한체대 옆에 있는 선수촌에 들어가 아침부터 기본기 훈련과 체력 단련을 위한 근력운동을 하고 자전차 타기 연습을 두 시간씩 했어요. 제 사무실에서도 연습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 하루 6~8시간씩 탔고요. 근데 그렇게 연습했어도 촬영장은 모랫바닥이어서 타이어가 헛돌고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웠어요. 실제로는 영화에서 달리는 모습의 3분의 1 정도의 속력이었어요. 더구나 옛날 자전차는 브레이크가 없어서 뒷바퀴 체인을 당겨야 멈출 수가 있어요. 한체대 국가대표 선수들도 타기 힘들어할 정도였죠. 그런 자전차로 달리며 일본 선수와 눈빛을 교환하고 기 싸움을 하는 것도 간단치 않았고요. ‘나는 왜 만날 이렇게 체력적으로 힘든 작품만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제가 결정한 일이니 어쩌겠어요.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영화에서 자전차 경주가 박진감 넘치게 나온 건 CG팀 덕분이에요.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자전차를 타는 이미지도 캐릭터를 각인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 같아요. 드라마 ‘풀하우스’에선 자전거 타는 모습이 섹시해 보인다는 반응을 얻었는데, 이번엔 어떤 이미지를 추구했나요.
촬영 중엔 어떤 이미지를 추구할 정신이 없었어요. 외적으로 비치는 이미지보다는 엄복동이라는 인물 자체를 살려내는 데 집중했어요. ‘이럴 때 엄복동 선수는 어떻게 했을까?’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던지며 같은 1등을 해도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표정이나 액션에 미묘한 차이를 두려고 했어요. 야수의 표정을 지어도 보고, 소처럼 침을 흘리는 모습도 흉내 내보고, 자전차를 타면서 토한 적도 있고, 악을 쓰기도 하고. 정말 별의별 것을 다 해봤어요. 이제 두 바퀴는 안 보고 싶어요. 하하.
‘자전차왕 엄복동’ 촬영이 한창이던 2017년 6월 기자는 한 가구 행사장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그해 4월부터 시작된 촬영이 경남 합천, 전북 전주 등 지방에서 이어져 첫째 딸을 임신한 아내 김태희 곁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을 미안해했다. 또 2월 26일 김태희의 소속사에서 그녀의 둘째 임신 소식을 공개하기 전까지 이 기쁜 소식을 애써 감췄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김태희와의 결혼 생활에 대한 물음에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가족에게 누가 되는 느낌”이라고 양해를 구하며 “내 삶의 최우선 순위는 당연히 가족이고, 여느 부부와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고 답했다.
정지훈은 다음 작품에선 그동안 눌러왔던 개그 본능을 깨우는 병맛 코미디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집에서 IPTV로 영화를 즐겨 보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재충전해요. 제가 god의 ‘보통날’과 ‘길’이라는 노래를 좋아해요. 평소에는 ‘보통날’의 상쾌한 에너지를 받으며 하루를 열고, 힘들 때는 ‘길’을 들어요. 가사가 제 상황과 딱 맞아떨어져서요.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 노래에 위안을 얻어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고, ‘보통날’의 가사처럼 친구들과 맥주 한잔하면서 사는 이야기하고, 집에서는 맥주 한 캔 먹고 ‘오늘도 잘 보냈구나!’ 해요. 저는 집에서 ‘혼술(혼자 술 마시기)’ ‘혼맥(혼자 맥주 마시기)’ 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주량이 궁금하네요.
저는 소주만 빼고 다 잘 마셔요. 특히 맥주는 일주일 동안 그것만 마시며 버텨보라고 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고된 날 샤워를 싹 하고 맥주 한 캔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한여름에 땀을 막 흘리잖아요. 그 상태로 집에 들어가 아주 뜨거운 물에 씻어요. 그러고 나서 시원한 맥주 두 캔을 꺼내 꾸역꾸역 다 먹죠. 그러면 카타르시스가 확실하게 느껴지거든요(웃음).
살다 보면 길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지 않나요.
지금까지 방황을 한 적이 없어요. 정신력이 강한 편이에요. 그 어떤 것도 제가 어릴 때 겪은 힘든 상황보다 더하진 않거든요.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어요. 더군다나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를 일찍 돌아가시게 한 죄보다 더 무섭고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억울하게 오해를 받거나 열심히 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금방 수긍하는 편이에요. ‘내게 잘못이 있겠지! 더 열심히 하자!’고 마음을 다지면서요. 다만 ‘내가 이런 기준으로 살아왔는데 사람들은 왜 나를 이렇게 볼까?’ 하는 억울함 때문에 약간의 힘든 과정들이 있긴 하죠. 그럴 때도 저는 대체로 잠도 잘 자는 편이에요. 연예인이 원래 쉽지 않은 직업이잖아요. 연예인에겐 침체기, 절정기, 호황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뭘 해도 다 잘되는 시기가 있는데 그 시기를 맞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고 그렇게 될 확률도 희박하지만요. 또 정상에 오르면 내리막길을 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다시 올라갈 수도 있고요. 연예인이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지만 오해를 바로잡아야 할 때도 있긴 하더라고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되새기는 좌우명이 있나요.
요즘 가장 많이 곱씹는 말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예요. 일만 열심히 하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10대 중반까지는 엄마, 아빠한테 만날 혼나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많이 맞기도 했어요. 하지만 사회 경력을 쌓은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남들이 평생 겪을 혹은 겪지 말아야 할 여러 감정을 느껴봤고 배우로서 열심히 살아볼 것이냐, 가수 겸 음반 제작자로서의 생활을 유지할 것이냐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어요. 근데 요즘은 일만 하다 50~60대를 맞기보다는 체력이 될 때 쉬고 노는 것도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보다 돈을 많이 벌어봤고 전 세계에 혁신을 가져온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 이런 말을 했대요. “나에게 남은 건 산소호흡기 유지 장치인 파란 불 하나”라고요. 그 말이 무척 심오하게 다가왔어요.
어떤 면에서 심오하게 다가왔나요.
저도 똑같거든요. 일을 되게 열심히 해왔지만 갑자기 내일 어떤 사고로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거죠.
현재 바람은 뭔가요.
올해는 몸 쓰는 작품을 안 하는 거요. 하하하. 거기에 큰 의미를 두고 제대로 병맛인 코미디에 도전하고 싶어요.
‘망가질’ 준비는 된 거죠.
제 필모그래피에서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 ‘상두야 학교 가자’예요. 2002년 그 작품에 출연하면서 이미 저란 사람을 내려놨어요. 사실 제가 코미디를 되게 좋아해요. ‘상두야 학교 가자’를 보면 반은 코미디인데 반은 진짜 슬퍼요. 그때처럼 다시 한 번 개그 본능을 불태워보고 싶어요.
디자인 최정미 사진제공 레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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