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설명하며 ‘말’을 빼놓기란 어렵다. 석기시대 후기 또는 청동기 시대부터 말이 있었다고 추정할 정도로 오랜 역사만큼이나 말과 관련된 이야기와 유적이 즐비한 곳이 바로 제주도. 그중에서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는 조선 최고의 말을 길러낸 ‘갑마장’(甲馬場)이 있을 정도로 목축문화와 관련이 깊다.
한라산 동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병풍 같은 오름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온다. 표선면 전체 면적의 42%에 달하는 광활한 대평원을 품은 가시리. 이곳은 해발 90~ 570m이며 한라산 고산지대와 해안지대를 연결하는 전이지대로, 한라산과 오름이 뿜어낸 용암이 바다를 향하다 그대로 주저앉아 드넓은 화산 평탄면을 이뤄낸 중산간 지역이다. 걷는 여행은 좋지만 ‘올레길’은 여러 차례 가봤다면, 제주마의 역사와 자연을 느끼며 색다른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갑마장 길을 걸어보자.
초원과 삼나무 길, 오름 사이를 걸으며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갑마장 길은 갑마장과 그를 품은 가시리를 에두르는 코스로 구성돼 있다. 가시리 문화센터(마을회관)를 들머리 삼아 설오름→따라비오름→잣성→큰사슴이오름→행기머체→조랑말체험공원→마을회관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을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7시간 정도.
제주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짧다면 이 코스를 반으로 줄인 ‘쫄븐 갑마장 길’(약 10km)을 걸어보자. ‘쫄븐’은 제주 사투리로 ‘짧은’이라는 뜻이다. 갑마장 길이 제주의 목축문화와 고유의 습속을 만날 수 있는 코스라면, 쫄븐 갑마장 길은 갑마장 고유의 문화에 더 집중했다. 조랑말체험공원→따라비오름→큰사슴이오름→행기머체→조랑말체험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소요 시간은 약 3시간이다.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억새
트레킹 초보의 선택은 ‘쫄븐 갑마장 길’. 본격적인 걷기에 앞서 들머리에 있는 조랑말체험공원(070-4145-3456)을 방문했다. 제주의 목축문화와 관련된 유물 1백여 점이 전시돼 제주마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시야가 탁 트인 원형 건물의 옥상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를 감상하고, 말을 주제로 작품 활동 중인 국내외 작가들의 아트 상품도 구경할 수 있었다. ‘말의 소리’라는 뜻의 1층 카페 ‘마음’에서 말똥 모양을 본뜬 초콜릿 맛 말똥 과자와 신선한 당근, 감귤을 갈아 만든 조랑말 주스로 입가심했다. 조랑말 승마장에서 말을 타거나 먹이 주기 체험을 할 수도 있고, 원할 경우 몽골 텐트에서의 하룻밤도 가능해 가족과 함께 체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해가 지면 불빛이 없어 보석처럼 빛나는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공원 초입에는 식은 용암 덩어리 위에 나무가 자라 독특한 모양이 인상적인 ‘행기머체’가 있다. 화산섬 제주가 탄생하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다. ‘행기’는 놋그릇, ‘머체’는 제주도 사투리로 ‘돌무더기’를 뜻한다. 동양에 있는 이런 돌무더기 중 행기머체가 가장 크다고 한다.
갑마장 길을 걷다 보면 4백여 년의 시간을 넘어가며 쌓은 총 길이 31.4km의 잣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목장과 목장의 경계를 구분하고 말들을 가두기 위해 현무암으로 세운 돌담인 잣성은 대평원으로 실핏줄처럼 퍼져가며 제주 흑룡만리를 완성한다. 이곳의 잣성은 제주에서 가장 길고,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엉성해 보이지만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잣성에서 자연을 지배하기보다 공존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씀이 느껴졌다.
조선 선조 때부터 인조 때까지 1천6백여 마리 이상의 말을 진상해 ‘헌마공신’이라는 칭송을 받은 김만일의 묘도 만날 수 있다. 이 일대에서 말을 기르던 그는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키우던 말을 군마로 진상했고, 이후 갑마장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 길의 백미는 분화구 세 개로 구성된 높이 342m의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의 별칭은 ‘제주 오름의 여왕’이다. 오름의 능선이 만들어낸 완만한 곡선은 여인의 봉긋한 가슴 같기도, 날렵한 허리선 같기도 하다. 따라비오름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20분가량 걸리는데, 정상에 올라 땀이 기분 좋게 난 상태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본 풍경이 압권이었다. 저 멀리 높이 475m의 큰사슴이오름이 보이고 너른 초원지대와 군데군데 보이는 풍력발전기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억새도 한창이었는데, 제주 오름 3백68개 중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의 또 다른 재미는 가시리에 거주하는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 체험의 시간이었다. 마을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는 ‘머뭄작가’ 초록누룽지는 주민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대자연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그림 그리기 체험 활동을 진행해왔다. 가시리 창작지원센터는 문화마을을 만들자는 취지로 머뭄작가(입주작가)를 모집하고 있다. 그와 같은 머뭄작가들의 작품과 벽화는 가시리 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문화 체험을 하려면 예약은 필수. 따라비오름 정상에 앉아 그의 안내에 따라 멀리 보이는 오름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듯 천천히 눈에 담은 다음 준비해온 와인 잔에 풍경을 그려나갔다. 손에 잉크를 묻혀가며 세상 하나뿐인 나만의 와인 잔을 완성해가는 동안 학창 시절 사생대회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연필을 고쳐 쥐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바람을 맞으며 ‘작품’을 완성해가던 중 반대편에서 오름을 오르던 여행객의 휴대전화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귀신 같은 선곡에 정상에서 정취를 감상하던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초록누룽지는 “단순히 풍경을 따라 그리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느끼며 그렸기에 시간이 지나도 이곳의 풍경이 쉬이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서울에 돌아가면 꼭 잔에 색깔 있는 음료를 담아 마셔보라”고 덧붙였다. 전혀 다른 그림이 될 거라면서 말이다. 문의 가시리유채꽃마을만들기 064-787-1665
■ 도움말·안봉수 가시리유채꽃마을만들기 위원장, 지금종 조랑말체험공원 대표
한라산 동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병풍 같은 오름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온다. 표선면 전체 면적의 42%에 달하는 광활한 대평원을 품은 가시리. 이곳은 해발 90~ 570m이며 한라산 고산지대와 해안지대를 연결하는 전이지대로, 한라산과 오름이 뿜어낸 용암이 바다를 향하다 그대로 주저앉아 드넓은 화산 평탄면을 이뤄낸 중산간 지역이다. 걷는 여행은 좋지만 ‘올레길’은 여러 차례 가봤다면, 제주마의 역사와 자연을 느끼며 색다른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갑마장 길을 걸어보자.
초원과 삼나무 길, 오름 사이를 걸으며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갑마장 길은 갑마장과 그를 품은 가시리를 에두르는 코스로 구성돼 있다. 가시리 문화센터(마을회관)를 들머리 삼아 설오름→따라비오름→잣성→큰사슴이오름→행기머체→조랑말체험공원→마을회관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을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7시간 정도.
제주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짧다면 이 코스를 반으로 줄인 ‘쫄븐 갑마장 길’(약 10km)을 걸어보자. ‘쫄븐’은 제주 사투리로 ‘짧은’이라는 뜻이다. 갑마장 길이 제주의 목축문화와 고유의 습속을 만날 수 있는 코스라면, 쫄븐 갑마장 길은 갑마장 고유의 문화에 더 집중했다. 조랑말체험공원→따라비오름→큰사슴이오름→행기머체→조랑말체험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소요 시간은 약 3시간이다.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억새
트레킹 초보의 선택은 ‘쫄븐 갑마장 길’. 본격적인 걷기에 앞서 들머리에 있는 조랑말체험공원(070-4145-3456)을 방문했다. 제주의 목축문화와 관련된 유물 1백여 점이 전시돼 제주마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시야가 탁 트인 원형 건물의 옥상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를 감상하고, 말을 주제로 작품 활동 중인 국내외 작가들의 아트 상품도 구경할 수 있었다. ‘말의 소리’라는 뜻의 1층 카페 ‘마음’에서 말똥 모양을 본뜬 초콜릿 맛 말똥 과자와 신선한 당근, 감귤을 갈아 만든 조랑말 주스로 입가심했다. 조랑말 승마장에서 말을 타거나 먹이 주기 체험을 할 수도 있고, 원할 경우 몽골 텐트에서의 하룻밤도 가능해 가족과 함께 체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해가 지면 불빛이 없어 보석처럼 빛나는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1 쫄븐 갑마장 길 코스. 2 따라비오름 가는 길에 내려다본 마을 풍경. 3 현무암으로 세운 돌담인 잣성. 4 따라비오름 정상에서 직접 그린 가시리 풍경.
공원 초입에는 식은 용암 덩어리 위에 나무가 자라 독특한 모양이 인상적인 ‘행기머체’가 있다. 화산섬 제주가 탄생하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다. ‘행기’는 놋그릇, ‘머체’는 제주도 사투리로 ‘돌무더기’를 뜻한다. 동양에 있는 이런 돌무더기 중 행기머체가 가장 크다고 한다.
갑마장 길을 걷다 보면 4백여 년의 시간을 넘어가며 쌓은 총 길이 31.4km의 잣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목장과 목장의 경계를 구분하고 말들을 가두기 위해 현무암으로 세운 돌담인 잣성은 대평원으로 실핏줄처럼 퍼져가며 제주 흑룡만리를 완성한다. 이곳의 잣성은 제주에서 가장 길고,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엉성해 보이지만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잣성에서 자연을 지배하기보다 공존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씀이 느껴졌다.
조선 선조 때부터 인조 때까지 1천6백여 마리 이상의 말을 진상해 ‘헌마공신’이라는 칭송을 받은 김만일의 묘도 만날 수 있다. 이 일대에서 말을 기르던 그는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키우던 말을 군마로 진상했고, 이후 갑마장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 길의 백미는 분화구 세 개로 구성된 높이 342m의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의 별칭은 ‘제주 오름의 여왕’이다. 오름의 능선이 만들어낸 완만한 곡선은 여인의 봉긋한 가슴 같기도, 날렵한 허리선 같기도 하다. 따라비오름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20분가량 걸리는데, 정상에 올라 땀이 기분 좋게 난 상태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본 풍경이 압권이었다. 저 멀리 높이 475m의 큰사슴이오름이 보이고 너른 초원지대와 군데군데 보이는 풍력발전기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억새도 한창이었는데, 제주 오름 3백68개 중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의 또 다른 재미는 가시리에 거주하는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 체험의 시간이었다. 마을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는 ‘머뭄작가’ 초록누룽지는 주민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대자연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그림 그리기 체험 활동을 진행해왔다. 가시리 창작지원센터는 문화마을을 만들자는 취지로 머뭄작가(입주작가)를 모집하고 있다. 그와 같은 머뭄작가들의 작품과 벽화는 가시리 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문화 체험을 하려면 예약은 필수. 따라비오름 정상에 앉아 그의 안내에 따라 멀리 보이는 오름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듯 천천히 눈에 담은 다음 준비해온 와인 잔에 풍경을 그려나갔다. 손에 잉크를 묻혀가며 세상 하나뿐인 나만의 와인 잔을 완성해가는 동안 학창 시절 사생대회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연필을 고쳐 쥐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바람을 맞으며 ‘작품’을 완성해가던 중 반대편에서 오름을 오르던 여행객의 휴대전화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귀신 같은 선곡에 정상에서 정취를 감상하던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초록누룽지는 “단순히 풍경을 따라 그리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느끼며 그렸기에 시간이 지나도 이곳의 풍경이 쉬이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서울에 돌아가면 꼭 잔에 색깔 있는 음료를 담아 마셔보라”고 덧붙였다. 전혀 다른 그림이 될 거라면서 말이다. 문의 가시리유채꽃마을만들기 064-787-1665
조랑말체험공원에서는 말똥 과자와 조랑말 주스를 맛보고 박물관 관람과 승마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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