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정보석, ‘신데렐라 언니’ 김갑수, ‘시크릿 가든’ 이병준…, 이들의 공통점은 요즘 잘나가는 중견 남성 탤런트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 연예계에는 ‘미중년’을 뛰어넘은 ‘중견돌’의 인기가 눈부시다. 심지어 이들을 따르는 무리의 연령대도 다양한데 10대부터 60대, 아니 그 이상까지 전 세대를 아우른다. 그야말로 전방위적 인기를 얻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단 한 우물을 팠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중견 연기자가 가진 저력과 인기의 배경을 알아봤다.
# 연기, 잘하고 볼 일이다
‘진짜 연기자’로 평가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역시 연기력이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자이언트’에서 악인 조필연으로 나온 정보석(49)은 소름 끼치는 연기로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그의 연기 인생에서 최고의 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들린 듯한 악랄한 연기는 드라마 방영 내내 화제를 모았고, 결국 그는 연말 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팬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가 대상을 타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냈다(심지어 네이버 지식인 코너에는 ‘정보석이 왜 대상을 타지 못했나요?’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아쉬움을 담은 수많은 댓글이 올라왔다). 그만큼 정보석의 연기는 강했고, 흡입력 있었다.
‘필연神’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조필연이라는 캐릭터에 머물지 않고 드라마의 배경인 70·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상을 그리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곧 매주 시청자를 TV 앞으로 불러모은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정보석은 “과도기적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조필연에게 투영하려 애썼다”고 말한다.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조필연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괴로운 마음을 달래려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는 고백도 그가 얼마나 캐릭터에 빠져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정보석은 드라마가 끝난 후 “성격이 예민해지고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약을 먹었을 정도다. 정신과 치료를 받을 생각도 했지만 괜한 오해를 살까봐 캐릭터를 잊기 위해 매일 술을 마셨다”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어떤가. 주눅 든 중년 남성의 비애를 온몸으로 표현한 그에게서 훗날 조필연과 같은 악인의 이미지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극과 극을 달리는, 캐릭터의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 또한 정보석의 연기가 빛나는 이유다. 대중문화평론가 이문원은 “TV라는 매체가 안고 있는 한계 때문에 연기자들이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캐릭터를 선보이는 것만큼 시청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런 면에서 정보석이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자이언트’로 극적 변신을 꾀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평한다.
사실 정보석이 처음부터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는 아니었다. 데뷔 초부터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잠시도 쉬지 않고 활동했지만, 그의 연기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그 자신도 이점을 십분 인정한다.
“지금도 만족하진 않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기에 자신이 없었어요. 무조건 열심히 하는 수밖엔 없었죠. 대본을 읽고 또 읽고, 이렇게 연기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봤다가 하면서요. 젊어서부터 대본을 많이 읽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읽기 중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손에 뭔가 쥐어져 있지 않으면 불안하거든요. 한번 읽기 시작하면 또 끝을 봐야 해서, 식탁 위 음식이 다 식을 때까지 대본을 읽기도 했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촬영에 늦은 적도 있어요(웃음).”
연기력 하면 김갑수(54)를 빼놓을 수 없다. TV와 영화에서 얼굴을 알리기 전, 70·80년대 연극계에서 이미 이름을 떨친 김갑수는 차분하면서 정제된 연기로 호평을 받고 있다. ‘신데렐라 언니’에서는 세상에 냉소적인 딸 은조(문근영)를 향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으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몇 마디 안 되는 대사에도 그의 연기가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건 선한 눈빛, 다정한 목소리, 듬직한 자태 등 김갑수라는 배우 그 자체의 존재감이 컸기 때문이다.
이는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은호(손예진)의 아버지로 출연했을 때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세상의 관습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려는 딸 은호에게 라디오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하느님에게는 내가 용서를 빌어주마. 행복해져라, 은호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오직 목소리만으로 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줬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잔잔한 중년의 로맨스를 연기했고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이선준(박유천)의 아버지이자 권력의 중심에 있는 좌의정으로 등장해 비슷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김갑수식’ 연기를 보여줬다.
그의 존재감을 이해하자면 그동안 그가 숱하게 맡아온 단역을 떠올려볼 일이다. 최근 3년 동안 출연한 작품 수는 무려 19편, ‘생계형 연기자’라 할 만큼 많다. 더욱 재미있는 건 그가 지난해 출연한 드라마 ‘추노’ ‘아이리스’ ‘신데렐라 언니’ ‘거상 김만덕’ ‘제중원’ 등에서 연이어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자 김갑수에게는 ‘단명 전문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고, 급기야 MBC 수목드라마 ‘즐거운 나의 집’에서는 1회 때 극이 시작되자마자 2분54초 만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 시청자들에게 놀라움과 웃음을 동시에 안겨줬다.
그럼에도 그의 연기가 매번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건 김갑수가 가진 존재감 말고는 다른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말하자면 그는 드라마라는 전체 그림 안에서 뚜렷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잘 아는 배우다. 최근 한 인터뷰를 보면 김갑수 스스로 “나는 어떤 역을 맡을 때 존재감이 없으면 잘 안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드라마에서 몇 회만 출연하고 죽는 건 상관없다. 다만 작품 안에서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남길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아이리스’ 같은 경우 단 2회만 나갔지만 그 분량이 드라마 안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김갑수의 인기는 ‘신데렐라 언니’를 기점으로 매우 단단해졌다. 당시 형성된 ‘팬심’은 ‘성균관 스캔들’로 그대로 이어졌는데, 디시인사이드 ‘신데렐라 언니’ 갤러리 회원들은 ‘성균관 스캔들’ 제작발표회장에 ‘이정무 대감, 우릴 버리지 마라. ‘신데렐라 언니’ 갤러리를 의지해도 좋다’는 재치 있는 문구의 화환을 보내 눈길을 끌었다. 이른바 아이돌 스타나 받는다는 ‘조공화환’이었다.
요즘 그는 시트콤 ‘몽땅 내 사랑’에서 보습학원 원장 역을 맡아 코믹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극중 미선(박미선)의 아들 옥엽(조권)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극중 그는 걸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나르샤로 변신하기도 하고, 인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입고 나온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소시지 가든’이라는 패러디를 낳는 등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닌다. 김갑수는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최근 연기 인생 처음으로 CF모델로도 발탁돼 소화제와 초콜릿 과자 광고를 찍었다.
# 묵직한 존재감, 조연이어도 괜찮아
또 다른 중견돌 이병준(47)의 활약도 만만치 않다.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 꽃무늬 쫄쫄이를 입고 에어로빅 하는 영어 교사 앤서니 양으로 등장해 강한 인상을 남긴 그는 최근 ‘시크릿 가든’과 ‘드림하이’에 연달아 출연해 가히 ‘미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낮고 굵은 목소리와 부리부리한 눈, 여기에 코믹함까지 대중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시크릿 가든’에서는 로엘백화점 사장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지만 언제나 젊은 사장(현빈)에게 당하는 ‘허당’ 박 상무를 연기했고, ‘드림하이’에서는 기린예고 이사장(배용준)과 대립하며 권력을 쥐고자 고군분투하는 예술부장으로 나온다. 두 캐릭터가 비슷하다 보니 인터넷에서는 “박 상무가 로엘백화점에서 잘린 뒤 기린예고에 취업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매 작품에서 그가 찾는 웃음 코드는 다르다. ‘드림하이’에서는 무대가 스타사관학교인 만큼 그 역시 예술적인 끼로 악기 연주 모습을 선보였다. 이사장이 떠난 사무실에서 야망 가득한 얼굴로 색소폰을 연주하는 장면이 큰 웃음을 줬는데, 원래는 팝송 ‘마이웨이’를 연주하기로 했으나 그가 촬영장에서 즉석으로 ‘학교 종이 땡땡땡’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처럼 이병준은 촬영장 스태프들 사이에서 센스 있는 애드리브로 유명하다. 이병준은 “연기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먹고 하면 더 웃길 수 있는데 지난번 ‘시크릿 가든’ 때는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돼서 연기하는 데 좀 답답했다”고 말한다.
그의 노련함은 오랜 무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뮤지컬 경력 20년인 그는 그동안 ‘춘향전’ ‘명성황후’ ‘아가씨와 건달들’ 등 굵직한 뮤지컬 작품에 출연했고, 96년 영화 ‘영원한 제국’을 시작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고 있다.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건 드라마보다 영화가 먼저. 대표작으로 ‘구타유발자’ ‘복면달호’ 등이 있다. 이병준은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대에 서면서 영화에 대한 꿈은 항상 있었어요. 결국 ‘영원한 제국’ 캐스팅이 다 끝난 상태에서 감독에게 사정사정해 대사 한 마디 없는 무관내시 역을 맡았죠. 3일 정도 주연배우 옆에 묵묵히 서 있었더니 감독님이 ‘목소리도 좋고 체격도 괜찮은 것 같다’며 포도대장으로 역할을 바꿔줬어요. 덕분에 대사도 생기고 멋지게 말 탈 기회도 얻었죠(웃음). 영화는 뮤지컬과 같이 거의 오픈 세트라 영상매체 출연은 처음이었지만 크게 떨리거나 긴장되진 않았어요.”
영화 출연에 이어 드라마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히자 그때부터 그는 무대, 스크린, 브라운관을 동시에 누비기 시작했다. 지난해 그가 한 작품을 보면 앞서 소개한 드라마 세 편 외에도 영화 ‘파괴된 사나이’, 드라마 ‘국가가 부른다’ ‘버디버디(2월 방영 예정)’, 뮤지컬 ‘로키호러쇼’가 더 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병준은 “무대에서 경험한 것들이 영상을 통해 인정받는다는 게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2월 중순부터는 창작뮤지컬 ‘NEW 씨저스패밀리’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 장르를 뛰어넘는 연기 활동
중견 탤런트가 나이 들수록 각광받는 또 다른 이유로는 장르의 제한 없는 연기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정보석과 김갑수는 연극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다. 정보석은 ‘자이언트’ 이후 숨 돌릴 새도 없이 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 무대에 서고 있다. 극중 그는 조필연과는 상반된, 소심한 성격과 어눌한 말투 때문에 아내를 위하는 마음과는 달리 곧잘 오해를 받는 평범한 중년 남성 안성기를 연기한다. 사실 정보석은 지난해 ‘지붕 뚫고 하이킥’을 끝낸 뒤에도 연극 ‘新시집가는 날’에 출연했다. “무대는 드라마 할 때와는 또 다른, 연기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그가 쉬지 않고 무대에 오르는 이유다. 심지어 그는 배우가 되기 전 분식집을 운영하면서 그곳에 연극배우를 초청해 다른 연기 지망생들과 함께 연기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연기 공부는 하고 싶고, 돈은 벌어야 해서 20평 남짓한 공간에 분식집을 차렸어요. 라면, 떡볶이 판 돈으로 연기 선생님을 모셔와서 분식집 한쪽에서 연기 공부를 했죠. 그래서 무대에 서면 열정 하나로 똘똘 뭉쳐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이 떠올라요.”
김갑수 또한 그를 여전히 영화배우나 탤런트가 아닌 연극배우로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영화 ‘태백산맥’으로 주목받기 전 연극에서 이중섭·한용운·이상 등 예술가 역을 주로 맡았고, 동아연극상을 비롯해 연극판의 상을 휩쓸었다. 연기 인생 30년째가 되던 2006년에는 서울 대학로에 1백석 규모의 소극장을 열어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연기교실도 운영 중이다. 후배들이 연기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기본기를 탄탄히 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주변에서 사서 고생한다고 하지만 내게 연극은 보금자리와 같아서 떠날 수가 없다. 드라마나 영화 출연 때문에 지금은 무대에 서지 못하지만 연극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앞으로 젊은 작가들의 창작극을 주로 선보일 예정이다”라며 연극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처럼 젊은 연기자들을 품어주는 푸근한 성격은 역으로 그가 젊은 세대에게 인정받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실제 그의 삶 자체가 젊은 감각으로 점철돼 있음이 ‘무릎팍도사’ 출연으로 밝혀졌다. 아침식사는 샌드위치와 에스프레소로 해결하고, 트위터에 익숙하며, 바이크를 타고 다니는 모습은 ‘차도남’에 가깝다. 또한 그는 막걸리 대신 와인을 좋아하고, 이발소 대신 헤어숍을 찾으며, 트로트보다 에미넴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한다. 그가 화면에서 살아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것도 카메라 밖에서 청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중년 연기자의 인기가 더욱 높아진 또 다른 이유로 외부적인 요인도 꼽힌다. TV를 즐겨 보는 주 시청층이 10·20대에서 중장년층으로 옮겨가면서(젊은 시청자들은 인터넷이나 DMB, 스마트폰을 통해 드라마를 시청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위한 콘텐츠가 활발하게 만들어져 자연히 중년 연기자가 활동할 기회도 많아지고 있다는 것. 또한 트렌디 드라마가 퇴조하고 장르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중견 탤런트에게 맞는 캐릭터들이 많이 창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드라마 평론가인 충남대 윤석진 교수는 “2005년 ‘천국의 계단’ 이후 순수 멜로드라마가 히트를 한 경우는 드물다. 최근 ‘시크릿 가든’이 인기였지만 그 역시 판타지라는 또 다른 장치가 있었다. 멜로드라마가 한계를 부딪히면서 ‘하얀 거탑’ ‘베토벤 바이러스’ ‘추노’ 등 장르 드라마가 인기를 주도하고 있다. 덕분에 연기력이 뒷받침되는 중견 배우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됐다고 볼 수 있다”고 평한다. 과연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이 맞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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