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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에 관련된 기억 가진 일곱 여인의 남미여행기 ‘불륜과 남미’

기획·김동희 / 글·민지일‘문화 에세이스트’ / 그림·하라 마스미

입력 2005.11.15 14:02:00

‘불륜과 남미’는 일본의 여성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남미여행을 소재로 쓴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작품집. 주인공들은 모두 남미를 여행하는 일본 여성으로 현재 불륜 상태거나 본인 또는 가족이 불륜에 관련된 기억을 갖고 있다. 관능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제목과 달리 여행지에서 느끼는 애수와 삶의 쓸쓸함, 가족의 정 등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불륜에 관련된 기억 가진 일곱 여인의 남미여행기 ‘불륜과 남미’

여행은 꿈꿀 때가 훨씬 더 아름답다. 상상은 날개를 펴고 시름은 깃을 접는다. 그러나 실제의 여행은 여러 측면에서 상반된 천(千)의 얼굴을 지녔다. 어느 때 그것은 탈출인가 하면 자기발견이고, 행복 찾기인가 하면 슬픔으로 다가선다. 자유이자 고통이고 유혹인가 하면 고독이기도 하다. 호기심과 열정을 부르지만 일탈의 위험과 매력을 동시에 내포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졸던 감정을 일깨우는 활력소로 작용하지만 미지에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분명하다.
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있고 과정일 수 있으며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밖으로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안으로, 내면으로 더듬어 파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인가, 여행은 시기와 장소를 불문하고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프가 돼왔다. 사실 인생 자체가 바로 여행이고 문학이란 인생을 주제로 삼는 것인 만큼 그런 현상은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다.

감각적인 문체로 포착한 미묘한 감정의 흐름
일본의 40대 여성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단편소설집 ‘불륜과 남미’는 사람들이 여행에 대해 갖는 끌림을 한껏 이용했다. 열정과 관능이 저절로 연상되는 남미여행은 말만 들어도 설렐 텐데 거기다 은밀한 유혹, 불륜을 덧붙여 표제로 내세웠다. 아무리 도덕군자, 요조숙녀라도 이게 무슨 얘기일까 궁금하게 만든 것이다. 거기다 책 표지와 7개의 단편들 사이사이엔 흐드러지게 탱고 춤을 추는 일군의 남녀와 도발적 눈매의 여인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래도 안 볼 거냐고 채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책에는 농염한 정사나 부도덕한 유혹, 관능의 흐느적거림은 전혀 없다. 양심에 괴로워하며 또 잊기 위해 몸을 불태우는 불륜도 없다. 오히려 일본식 가족의 정이랄까, 여행객 또는 인생의 쓸쓸함, 40대 여자의 우울증 같은 것이 앙금처럼 배어 있다. 그것이 여행지를 바꿔가며 스멀스멀 스며나온다. 소녀 취향의 감각적·감상적 분위기가 전편에 흐르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포착해 툭 던지듯 그려놓는 작가의 재치는 상큼하다.
‘불륜과 남미’는 바나나가 98년 4월 아르헨티나를 여행하고 돌아와 한 달 간격으로 발표한 7개의 단편소설을 묶은 책이다. 우리로서는 다소 생소한 여행소설집인 셈인데 주제가 하나로 모이는 연작은 아니다. 개개의 단편 주인공은 모두 아르헨티나(부에노스아이레스, 멘도사, 이과수폭포)를 여행하는 일본 여자다. 그러니까 몸은 남미에 있지만 사고는 일본식으로 한다는 얘기일 터다. 나이는 20대 중반에서 30대. 현재 불륜 상태거나 본인 또는 가족이 불륜에 관계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냥 그것뿐, 그들에겐 불륜도 일상이다.

현대인은 많은 사람을 만나니까, 연애를 하지 않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특히 쌍방이일 때문에 바쁜 경우에는 불륜도 쉬 오래간다. … 특히 현대에는 연애나 결혼이나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 ‘전화’ 중에서

이런 식이다. 아르헨티나 도착 첫날 불륜관계인 남자의 부인으로부터 남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국제전화를 받고 떠올린 상념이 이러니 무슨 정염의 스토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튿날 부인의 전화가 악의에 찬 장난 전화였음이 밝혀진 다음 주인공은 기뻐서 ‘자신이 연애 중’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남자의 시체 옆에서 휴대전화가 울리는 상상을 했던 어제를 떠올리며 이 세상에 두 번 있을 수 없는 묘한 추억이라고 정리한다.

남미의 이국적인 풍광 속에서 섬세하게 풀어낸 일상의 정서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다. 방문지에서 경험한 소소한 감정이나 사소한 사건을 안으로 삭여 개인적인 경험으로 풀어낸다. 어떨 땐 점쟁이 외할머니가 손녀딸이 죽을 거라고 예언한 날과 남미의 도시풍경이 겹쳐지고, 또 어떨 땐 독재정권에서 죽거나 실종된 젊은이들의 어머니들과 일본의 가족이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남미의 여러 모습 -자연이건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이건-이 자신의 창작 혼을 뒤흔들어 소설로 재탄생되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로서의 구성보다 남미 묘사에 더 힘이 들어갔다.

폭포 역시 짙푸른 정글 속에 뒤엉켜 있는 뱀 같았다. 적토색과 회색 물이 뒤섞여기발한 무늬처럼 보였다. 정글에서 기어다니는 수많은 벌레처럼 수많은 방향으로뻗쳐 춤을 추듯 지면을 기다가 마침내 모든 물이 한 거대한 틈새로 쏟아져내린다.정말 에로틱한 광경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창밖’ 중에서

“이곳 자연 속에서 인간 따윈 밋밋한 알몸으로 겁에 질려 있는 힘없는 존재란 생각이 절로 들지.” “일본의 자연과는 전혀 달라.” “일본의 자연은 선이 훨씬 가늘어. 여기서 오래 살면 우리 역시 혼도, 겉모습도 사고방식도 전부 변해서, 그렇게 될 거야.” - ‘창밖’ 중에서

남미의 모습에만 기죽은 게 아니라 바나나는 남미의 문학도 ‘당돌하고 야만적인 생명력이 스며 있고, 아름다움과 생명에 관해서는 살인적인 힘마저 인정하는 듯 보인다. 광기에 가까운 정신의 고양과 함께 일상에 굳건하게 발 디딘 생활이 이루어지는 세계관이 있다. 무엇이든 인간의 이성으로 저울질하지 않는 그 힘을 남자든 여자든 대지에서 한껏 빨아들여 치열한 생명의 꽃을 피운다’고 평가한다.
우리는 이렇게 책 표제의 ‘남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구체적이기도 하고 뭉뚱그려지기도 한 ‘여행’ 그 자체였고 그녀를 흔들어 소설의 꽃을 피운 바탕이었다. 그렇다면 불륜은? 글쎄, 그것은 진짜 불륜일까, 아니면 사소한 일상이나 일본적 삶을 말하는 걸까, 혹은 거대한 자연의 힘에 대비되는 인간의 약함일까. 정답은 없겠지만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책 후기에 바나나의 “이번엔 정말 좋은 책이 되었다, 이제 소설의 요령을 파악했다, 제법 잘 썼다”라는 자평에 평점을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일 터다. 민음사 펴냄. 김난주 옮김.



여성동아 2005년 11월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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