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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활어회 보다 꽁치가 좋은 이유

입력 2005.03.31 15:29:00

활어회 보다 꽁치가 좋은 이유

나이가 들면서 주제 파악을 잘하는 내가 기특해진다. 얼마 전 50대 저명인사와 함께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와 교제 중인 20대 여성을 만났다. 그 남성은 ‘활어회’같이 싱싱한 그 젊은 여성만 챙기며 우리 아줌마들을 하찮은 ‘꽁치와 청어’ 취급했지만 웬일인지 질투심보다는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칭찬이 앞섰다. 언제 어디서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지만 주인공은 갈채를 받지 못하면 곧바로 퇴장당하게 마련.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영양가 높고 맛 좋은 ‘꽁치’임을 인정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이가들면서 나 자신이 점점 기특하게 여겨진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 아직도 십대들이 보는 만화책을 보고 인터넷 사이트를 즐겨 방문하면서 아이들과 유머 감각을 공유하며 미키마우스 티셔츠를 ‘딸 아이 줄 것’이라고 속여 산 다음 내가 입는 등의 유치함을 간직하는 것도 대견하지만 때론 너무나 주제 파악을 잘해서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지혜(?)를 가진 것도 그렇다.
얼마 전 50대의 한 저명인사와 저녁식사를 했다. 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해 실명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아무튼 매우 유쾌하고 유명한 사람이다. 나, 그리고 나보다 몇 살 더 많은 여인 한 명이 동석했다. 서로 10여년 이상 성숙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인지라 50대 아저씨인 그는 우리 중년 아줌마들을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일단 ‘아줌마들’에게 밥을 산다는 것부터가 감동스러운데 메뉴도 최고급이었고 오랜 시간 이야기도 재미있게 나눴다. 남자 한 명에 여자 두 명,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삼각관계 구도였지만 위기나 긴장감 없이 수다떨기에 몰두했다.
식사 도중에 그 남성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50대 남성과 교제 중인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전화를 받는 그의 얼굴에서 환한 봄기운이 확 느껴졌다. 목소리도 봄바람처럼 가볍고 맑았다.
“우린 거의 다 먹었어. 그래, 어서 와. 기다릴게.”
‘활어회’같이 싱싱한 젊은 여성, 질투 하지 않고 칭찬하기
잠시 후 전화의 주인공인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맛있게 밥을 얻어먹던 우리 아줌마들의 신분이 갑자기 추락했다. 반찬이 없으면 꽁치나 청어에도 만족하며 맛있게 먹던 사람이 싱싱한 활어회가 나타나자 눈빛이 달라지고 먹던 생선들은 쳐다도 안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쉬운 대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던 그 남성은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나자 그 이후로 우리 아줌마들에게는 거의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얼른 시켜. 이 집 음식 다 괜찮은데… 밖은 아직 추워?”
그 여성이 유리로 된 공예품이나 되는 양 애지중지 다루는가 하면, 줄곧 그의 눈에는 그 여성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 여성 역시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안다는 듯 확신에 찬 표정으로 온갖 애교를 다 떨었다. 아름답고 싱싱한 젊음을 보석처럼 뽐내면서 말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초면인 그 여성은 언뜻 보니 키도 크고 날씬한 미인이었다. 전문직 여성이라는 걸 보니 꽤 지적일 것도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어머, 쌍꺼풀 수술한 지 얼마 안 되나 보네. 아직도 자국이 선명한걸?” “아니, 그 부모는 딸이 영감이랑 사귀는 걸 알고 있나 몰라. 이 사람이 자기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을 것 같은데 뭐가 아쉬워서 이러나.” “아유, 내 딸이 저러면 난 자살하겠다.” 등등 궁시렁거리며 온갖 단점을 다 찾아내서 비방하려고 애썼을 텐데 웬일인지 시기나 질투의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숭떨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애교도 잘 부리는 것이 젊은 여성다워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도 추락한 우리의 처지가 조금은 서운했는지 함께 있던 연상의 아줌마가 입을 열었다.
“아유, 신선한 활어회가 들어오니까 우리를 꽁치나 청어 취급하는군요.”
하지만 그 아저씨는 “아니, 무슨 그런 말을…”이라며 부인하기는커녕 우리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대꾸도 없었다.
그러나 꽁치와 청어가 어디 예사 생선인가? 우리 식탁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꽁치와 청어는 이미 소금에 절여지고 불에 구워져 못 견딜 일도 없을 것 같다. 비록 지금이야 화려하고 싱싱한 회에 밀려 반찬 정도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활어회 보다 꽁치가 좋은 이유

‘꽁치’로 정확히 주제 파악을 하고 난 후 나는 부지런히 ‘활어회’를 칭찬해주었다. 정말 예쁘다, 입은 재킷도 예사 패션 감각이 아니다, 그 어려운 분야에서 일한다니 대단하다 등등…. 그런 말을 척척 하는 자신이 조금 비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말을 함으로써 내가 관대해지고 착해지는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모두 함께 식당을 나왔다. 그 남녀 커플이 “함께 차라도 마시러 가자”고 제안을 했지만 우리 ‘꽁치와 청어’ 커플(?)은 “우리는 아줌마고, 집안이 엄격해서 일찍 가야겠다”며 거절했다. 의례적인 제안이었던지 곧바로 “그럼 이만…” 하며 총총히 사라지는 두 남녀. 눈치없이 그들 사이에 끼었다가 괜한 미움만 받을 뻔했다.
그 커플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한 ‘꽁치와 청어’는 우리의 노련한 처세 철학에 스스로 감탄하고 ‘활어회’가 들어온 순간 변하던 그 영감의 눈빛을 흉보며 길거리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곤 자신있게 말했다.
“그래도 활어회가 상하거나 다 떨어지면 꽁치나 청어가 그리울걸?”
시간이 지날수록 ‘꽁치’의 영양가를 인정하고 다시 찾게 돼
아름답고 지순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직장에서 오래 버티고 살아남는 비결은 스스로가 ‘꽁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무대 위에서 주목이나 갈채를 받지 못하면 곧바로 퇴장당한다. 반면 조역들은 빛나는 역할을 맡지는 못하더라도 감초처럼 여기저기 넓은 범위에서 활동하며 꾸준히 생명을 이어간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젊고 유능하고 예쁜 후배들이 들어오면 당연히 모든 이들의 관심은 그들에게 쏠린다. 그걸 서운해하거나 질투하면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 오히려 그 후배를 더 칭찬해주고 돋보이게 해주는 것이 선배의 미덕이자 직장에서 오래 견디는 비결이다. 모임에서도 마찬가지. 항상 혼자 발언하고 모두의 시선을 독차지하려고 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진다. 다른 사람이 빛나는 아이디어를 발표할 때 박수쳐주고, 감탄해주고, 맞장구를 쳐주면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굴하게 모든 영광과 사랑을 ‘활어회’에게 던져주고 쭈그려 있는 게 능사는 아니다. 또 밥상마다 너무 자주 올라가도 식상함을 주어 가치를 잃게 된다. ‘꽁치’ 역시 전략이 필요하다.
하찮은 꽁치라 해도 가끔은 신비감 유지를 위해 몇 번 모임에 빠지기도 하고, 돌연 등장해 꽁치가 얼마나 영양가 있고 우수한 생선인지 자랑도 해보고, “요즘 천연 활어회가 있나, 다 양식을 하는데다 항생제를 써서 키운다는데…” 등의 활어 비방도 기술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남들도 꽁치의 영양가를 인정해주고, 익숙하고 그리운 맛을 다시 찾게 되며 “역시 꽁치야”를 연발하게 된다.
이렇게 조금만 비굴하고 조금만 영악해지면 남녀노소를 초월한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그나마 나처럼 독특한 식성을 가져 회는 잘 안 먹지만 꽁치구이는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그전에 만난 50대 영감이 다시 전화를 걸어와 다음 주에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활어회는 어쩌구 꽁치를 다 찾냐”는 나의 질문에 “활어는 좀 위험하기도 하고, 관리하기도 힘들고…”라고 대답했다. 새삼 안전한 꽁치 신분임이 행복해졌다.
음식은 신선도뿐만 아니라 영양가와 맛도 중요하다. 사람 역시 젊어보이려고 억지로 노력하기보다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여성동아 2005년 4월 4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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