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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사랑을 나눠요

임시 아동보호시설에서 미술지도 봉사하는 주부 나영숙

■ 기획·최호열 기자 ■ 글·송구슬‘자유기고가’ ■ 사진·정경진‘프리랜서’

입력 2005.03.31 14:56:00

부모의 학대나 가정의 해체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시설인 아동복지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종이접기 등을 가르치는 주부 나영숙씨(38).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에 생긴 주름을 곱게 펴주고 싶다는 그가 들려주는 봉사활동 체험기.
임시 아동보호시설에서 미술지도 봉사하는 주부 나영숙

수요일 아침. 설거지며 청소 등 집안일을 서둘러 마치고 서울시 아동복지센터로 향한다. 이곳과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10개월이 지났다.
서울시 아동복지센터는 경제적인 문제, 부모의 이혼 등으로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거나 부모의 학대를 당한 아이들을 잠시 보살피는 곳이다. 아이들은 이곳에 머물며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한 뒤 사랑을 줄 수 있는 양부모에게 입양되거나 적절한 보육시설로 가게 된다. 따라서 이곳에선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매주 수요일 오전에 2시간씩 종이접기 등을 가르치고 있다.
내게는 마음의 빚이 하나 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큰아이가 두 살 무렵, 한동네에 사는 열 살 된 소년가장 종훈이를 알게 되었다. 우리 식구는 일년쯤 종훈이 형제와 한가족처럼 지냈지만 이사를 한 후 이런저런 핑계로 연락을 못하다 인연이 끊어지고 말았다. 가난 속에서도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던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나의 무정함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종훈이에 대한 빚을 갚고 싶다는 마음에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교실에 들어서는데 지난주보다 훨씬 조용하다. 아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새로 들어온 아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아이들 머리수부터 세어 보니 아홉 명. 아는 얼굴은 경미(7)와 현수(8) 둘뿐이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라 채 정이 들기도 전에 헤어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하루빨리 안정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종이로 공을 접기로 했다.
“가장 좋아하는 색깔의 색종이를 골라보자. 선생님은 분홍색으로 할게.”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아이가 눈에 띈다. 색종이를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는 사내아이.
“이름이 뭐니?” “김형진이요.” 날 쳐다보지도 않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어떤 색깔 고를 거야?” 그제야 파랑색 색종이를 집는다.
“먼저 색종이를 이렇게 대각선으로 접는 거야.”
“선생님, 이렇게요?” 형진이가 아닌 현수가 대답을 한다. 그래도 나와 낯을 익힌 아이다.
“그래. 자꾸 접었다 펴면 나중엔 어떤 선인지 모르게 되니까 처음에 꼼꼼하게 접어야 해.” “네, 선생님!”
하지만 형진이는 종이접기는 뒷전이고 옆에 앉은 친구에게 장난을 건다.
“오늘 가장 늦게 접은 친구는 벌칙으로 엉덩이로 이름쓰기를 하면 어떨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이들 얼굴에 잠시 웃음이 스친다. 오늘은 형진이 옆에서 수업을 하기로 한다. 형진이처럼 유난히 사람을 경계하는 아이가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덜미에 생긴 시퍼런 멍 자국이 채 가시지 않은 아이들이 마른 손으로 애써 종이접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곤 한다. 문득 지난 가을에 만났던 항주(7)가 떠오른다.
“선생님, 우리 아빠가요, 옛날엔 절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아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어요. 그 아줌마가 절 싫어해요. 저만 보면 화가 난대요. 그래서 여기로 왔어요.”
항주는 자기 물건에 애착을 갖지 않았다. 항주가 만든 작품은 책상 위를 굴러다니기 일쑤였다. 우리 집 큰아이가 자기가 만든 것을 동생이 만질까 봐 높은 곳에 올려놓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만지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몸과 마음에 가해지는 학대가 한창 ‘자기애(愛)’를 길러야 할 아이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자, 이렇게 접었지? 이걸 여러 개 접어서 이렇게 모아 붙이면 공 모양이 되는 거야. 이제 공을 완성해 보자.”

임시 아동보호시설에서 미술지도 봉사하는 주부 나영숙

마칠 시간이 다가오면 서두르게 된다. 다음 시간에 이 아이들을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면 영원히 완성시켜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가족에게 돌아가는 아이들은 자신이 접던 것을 챙겨가 마저 완성을 하지만 보육시설로 가는 아이들은 자기가 만들던 것을 버려둔 채 간다. 그래서 자꾸 마음이 급해지는 것 같다.
“선생님, 이렇게 하면 되는 거죠?”
자기가 잘 접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확인하려는 형진이. 아마도 인정받고 싶은가 보다.
“응, 아주 잘했네. 색깔도 예쁘다. 엉덩이로 이름 안 써도 되겠네.”
아이들이 웃는다. 아이들이 웃을 때가 가장 기분 좋아지는 순간이다.
“선생님, 이따가 밥 먹고는 뭐 접을 건데요?”
아이들은 자기가 잘해낸 일은 또 하고 싶어 한다.
“응. 오늘은 이것만 접고 다음 주엔 파인애플 접을 거야.”
아이들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 예쁜 민경이, 다음 주에도 오늘처럼 잘 접을 거지?”
작은 칭찬이지만 민경이의 얼굴에는 이내 환한 웃음이 번진다.
나의 작은 봉사가 아이들이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말 한마디에 눈빛이 달라지는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 주고 있다는 것이 기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조금 더 놀다 보니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다음 주에 올게. 그때까지 밥 잘 먹고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잘 있어야 해?”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나의 작은 봉사로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지기를 바라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여성동아 2005년 4월 4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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