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몇 년 사이 스티브 잡스의 룩처럼 평범하거나, 촌스럽거나 아니면 아예 패션에 대한 센스가 없어 보이는 콘셉트가 패션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평범함이 최고로 스타일리시하다고 주장하는 ‘놈코어(Normcore)’와 촌스러움을 일부러 더 부각시키며 자유자재로 소화해내는 ‘너드 패션(Nerd Fashion)’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과 함께 등장한 E걸과 E보이들의 패션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게임 생중계 사이트인 트위치(Twitch)에서 패션쇼를 공개한 버버리.
E걸과 E보이들은 먼저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같은 SNS의 해시태그에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는 Electronic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터넷 상에서 특히 마니아 층이 두꺼운 코스프레(Costume Play), 아니메(Animation), 고스(Goth), 메이드 카페(Maid Cafe), 이모지(Emoji), 스케이트보드(Skateboard), 하드 코어 메탈 밴드(Hardcore Heavy Metal Band), K팝 등 소위 ‘서브컬처’라 불리는 문화에 영향을 받은 스타일들을 모방하거나 즐긴다.
MZ세대가 즐기는 서브컬처, 새로운 패션 주류가 되다

헌터 샤퍼(좌).티모시 샬라메.(우)
이들은 젠더 뉴트럴 세대이기에 남녀에 상관없이 진한 메이크업과 헤비한 액세서리를 즐긴다. 또한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좀 괴팍하거나 기괴하다고 해도, 실생활이 아닌 집에서 즐기고 가상 공간 안에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보니 코로나19가 만연한 2020년에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2020년 한 해 동안 #Eboy 해시태그와 관련된 콘텐츠는 틱톡에서 1억 뷰를 돌파했고, 인스타그램에서도 1만 개 이상의 게시물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미국의 팝 가수 도자 캣은 보그닷컴(VOGUE.COM)에 E걸 스타일로 헤어와 메이크업하는 방법을 게시해 2천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E걸의 메이크업 방식에 관한 노래까지 발표해 E걸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미국의 MZ세대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HBO의 드라마 시리즈 ‘유포리아’에서도, 트랜스젠더 모델이자 배우인 줄스 역의 헌터 샤퍼를 비롯한 많은 캐릭터들이 E걸에게 영향을 받은 스타일과 메이크업을 선보이고 있다. E걸과 E보이들의 특징은 철저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시선과, SNS에서 어떻게 노출될지 미리 계산된 이미지들을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이런 E걸과 E보이들의 트렌드를 패션계가 간과할 리 없다. 셀린 옴므의 2021 S/S 컬렉션인 ‘더 댄싱 키즈(The Dancing Kids)’는 E보이의 스타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게임 생중계 사이트인 트위치(Twitch)에서 패션쇼를 공개한 버버리 또한 E보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선점하려는 전략이 엿보인다. 매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개최되는 패션계의 빅 이벤트 멧 갈라(Met Gala)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 E보이들을 대표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와 E걸들이 즐겨 하는 비비드 컬러 헤어 염색 및 투박한 액세서리들로 무장한 가수 빌리 아일리시를 공동 호스트로 선정했다. 서브컬처로 간주됐던, 인터넷상에서 더욱 꽃을 피워왔던 문화가 패션과 만나 이제 메인스트림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빌리 아일리시.
어느 시대나 그렇듯 패션은 자기만족이다. 하지만 패션 산업은 다르다. 트렌드를 만들고 그 트렌드라는 흐름에 맞춰 얼마나 많은 소비를 창출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따라서 개인의 해석이나 만족보다는 시장과 소비자가 중요하다. 너드와 긱 그리고 E걸과 E보이, 이들은 자신의 패션에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대중은 촌스럽다거나 기괴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스타일이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트렌드로 전환되자 대중의 눈에 패셔너블하다는 필터가 씌워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것이 패셔너블하다며 각광받기도 하고, 어글리한 것도 시선에 따라 스타일리시해 보일 수 있는 것이 트렌드의 묘미다. 그렇게 또 패션은 트렌드를 타고 끊임없이 돌고 돌게 될 것이다.
조엘 킴벡의 칼레이도스코프

뉴욕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네스 팰트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작업해왔다. 현재 브랜드 컨설팅 및 광고 에이전시 ‘STUDIO HANDSOME’을 이끌고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미우미우 발렌티노 샤넬 크리스찬 디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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