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 트렌드가 이어지고 있다. ‘god’과 ‘삶(生)’을 합쳐 부르는 이 말은 부지런하고 모범이 되는 삶을 뜻하는 단어다.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미라클 모닝(이른 시간에 기상해 자기 계발을 하는 것)’ ‘N잡러(본업 외에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 등 갓생 사는 법은 저마다 다양하지만 목적은 하나, 바로 성장에 대한 욕구다.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성장은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문학부에서 역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대한민국 1호 기록학 학자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1999년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기록물관리법) 제정에 참여하고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근정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기록 전문가로서 정부 기관 등 공공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그는 이제 ‘문화제작소 가능성들’을 설립하고 대중을 상대로 기록하는 삶을 알리고 있다. 일상 루틴, 독서법 등 어른을 위한 공부법을 제안하는 그의 유튜브 채널 ‘김교수의 세 가지’에는 22만 명의 구독자들이 모였다. 3월 14일 서울 마포구의 문화제작소 가능성들 사무실을 찾아 그에게 기록을 통해 성장하는 법에 대해 물었다.
왜 기록이 중요한가요.
한국 사람들 정말 열심히 살잖아요. 모두에게 박수쳐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면 소모감과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시나요. 분명히 힘들었지만 ‘남는 게 없어’라는 생각을 많이 하죠. 그걸 막아주는 게 기록입니다.
어떻게요.
하루를 알차게 사는 직장인의 하루를 생각해보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고, 출근해서 업무와 관련된 여러 구상을 해요. 메일을 주고받다 지식을 얻기도 할 테고요. 밤엔 친구를 만나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죠. 이 모든 과정은 지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를 조금씩 메모해두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하루를 소모적으로 보냈다는 생각이 사라질 겁니다.
의미를 찾게 된다는 말인가요.
기록을 하면 지나간 시간이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경험을 통해 발생한 지적 산물이 몸에 남게 되는 거죠. 저는 이 과정을 반복하는 사람을 ‘기록형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기록형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삶을 기획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을 써야 하나요.
우리는 일상을 보내며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직장 동료와의 대화, 읽은 책, 강의나 회사 회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틈틈이 메모하면 됩니다. 포인트는 모든 걸 다 적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메모는 요약 작업이에요. 상사의 지시를 속기록 쓰듯 받아 적는 부하 직원은 유능한 사람이 아니죠. 강의를 들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맥락을 파악하고 몇 개의 키워드로 강의를 요약할 수 있죠. 메모한 뒤에는 기록으로 바꾸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메모와 기록은 어떻게 다른가요.
메모를 재정비해서 정제된 형태로 만든 게 기록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록은 메모의 ‘엑기스’입니다.
어떻게 메모를 엑기스로 바꾸나요.
메모를 다시 한번 요약하는 거죠. 저는 메모하는 노트와 매일 밤 이를 다시 요약해 정리하는 노트가 따로 있어요. 바빠서 메모를 기록으로 바꾸지 못한 건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일주일간의 메모와 기록을 되돌아보며 정리합니다. 가족들도 그 시간에는 저를 건드리지 않습니다(웃음).
대화도 메모해 기록으로 남겨둔다고요.
일주일간 있었던 일을 정리하다 보면 가장 흥미로운 게 대화 기록입니다. 인간은 책으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도 있지만 타인과 대화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깨달음도 많습니다. 누구나 이야기하다가 평소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을 느껴보셨을 거예요. 문제는 빨리 잊어버린다는 거죠. 그걸 대화하며 적어두라는 거예요. 대화가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그 대화의 내용을 한 번 더 요약하고 키워드로 남겨두면 됩니다.
아침엔 플래너 쓰기 그리고 밤엔 일기 쓰기 2가지부터 시작하길 권합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서 다이어리를 쓰세요. 하루를 계획해보는 거죠. 계획을 세우라고 하면 학창 시절 방학 계획표를 떠올려요. ‘몇 시엔 무엇을 한다’ 이렇게 시간과 해야 할 일을 연결하는 거죠. 그러면 오히려 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 자괴감만 커져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침에 하루를 시뮬레이션해보며 중요한 일 5가지 정도를 골라 써보세요. 오전 시간에 2가지, 오후엔 밥 먹고 졸리니까 하나, 저녁 시간에 2가지 이렇게 정하고 다이어리에 적는 겁니다. 일과를 시작하기 전 먼저 적어두면 하루를 내가 주관하고 있는 느낌을 받을 거예요. 그리고 밤이 되면 아침부터 뭘 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메모해보시고 이를 토대로 일기를 써보세요.
기록은 꼭 노트에 해야 하나요.
취향 문제라고 봐요. 저는 만년필로 종이에 쓸 때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걸 좋아합니다. 아날로그식 기록이 두뇌 각인 효과가 좋다는 것은 검증된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합니다. 어디에 메모를 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고 이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이죠.
막상 뭘 적으려고 해도 무엇이 중요한지 헷갈립니다.
메모를 싫어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그런 질문을 합니다(웃음). 그래서 더 중요한 질문이고요. 책으로 따지면 오독(誤讀)에 대한 우려라고 생각해요. 저는 살면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네 번 정도 읽었는데요. 그때마다 느끼는 바가 달랐어요. 작가 역시 독자가 읽는 때에 따라 자신의 저서를 다르게 봐주길 바랐을 겁니다. 그 모든 게 저자와 독자의 대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관점으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게 좋은 독서법이듯, 평소 메모할 때도 자신을 믿으세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쓰고 정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주기적으로 기록을 다시 살펴봐야 하나요.
저는 한 달, 1년 단위로 다시 기록하는 시간을 가지는데요. 그때는 삶을 다양한 영역으로 쪼개길 권합니다. 관계, 일, 공부 등 분야를 나누고 각 영역을 통시적으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지속하면 삶이 달라지나요.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메시아적 시간’을 말했습니다. 신은 영겁의 시간을 보는 존재잖아요. 그럼 신은 그 시간을 응축해서 볼 겁니다. 벤야민은 인간도 신처럼 시간을 압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하루의 일을 기록으로 남겨뒀다고 해보죠. 그걸 돌이켜보면 시간이 응축돼서 몸에 달라붙는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메시아적 시간이 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지식이 축적돼 쌓이면 ‘양질전화(量質轉化·양의 증가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옴)’가 일어납니다. 컵에 물이 꽉 차서 넘치듯 그게 아이디어가 되고, 영감이 되는 거죠. 그래서 기록을 습관적으로 하는 분들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유를 드는데, 이 역시 기록을 통해 가능합니다.
자유요.
자유엔 2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대개 사회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것들이 우리 생각을 옭아매고 있거든요. 기록은 물처럼 흘러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붙잡아서 명시화하는 작업이에요. 그러니까 기록을 지속하면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물론 그걸 알았다고 해서 바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요. 이 역시 메모와 기록이 동반돼야 그 기술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왜 두 책인가요.
‘세컨드 브레인’은 기록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정리해 모아두느냐에 대한 책입니다. 기록학으로 말하면 아카이브 능력이죠. 기록을 평소에 실천하면 그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이를 활용할 수 있는지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릿’은 기록과 함께 개인의 삶에서 자유를 얻는 데 도움을 줄 거예요. 그릿(grit)은 열정과 집념이 있는 끈기라는 뜻인데요. 쉽게 말하면 미친 듯이 지속하는 거죠. 저자가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기록을 좋아해서 기록학 연구를 시작했나요. 혹은 그 반대인가요.
대학교 3학년 때의 경험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79년 대학에 입학해서 2학년이 될 때까지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러다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하기 전 3개월의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대학 4년 동안 배울 공부를 한꺼번에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독서실을 끊어서 3개월 동안 하루 18시간씩 공부했습니다. 하루에 4시간 30분 동안 자고 1시간 30분 동안 세끼 밥을 먹고 나머지는 공부하는 거죠. 일주일이 지나니 논문 스무 편과 책 두 권을 읽었더라고요. 그런데 남는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후엔 공부한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야 내 걸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걸 3개월 동안 하면서 요령도 생겼고요. 대학원에서 기록학을 공부하며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 걸 그때 미리 경험한 거죠. 기록에 대한 저 나름대로 명확한 인식을 갖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이제는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25년간 국가나 조직 차원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데 소임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개개인이 무엇을 기록하고 이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반응이 좋은 걸 보면 그만큼 많은 분이 자기 삶을 기록으로 정리하는 데 갈증을 느껴왔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앞으로도 기록을 통해 많은 분이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강조했다.
“우선 문구점으로 달려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기장을 사세요. 그리고 3개월만 써보세요. 그다음부터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기록형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겁니다.”
#김익한 #김교수의세가지 #기록 #메모 #여성동아
사진 조영철 기자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성장은 기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문학부에서 역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대한민국 1호 기록학 학자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1999년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기록물관리법) 제정에 참여하고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근정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기록 전문가로서 정부 기관 등 공공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그는 이제 ‘문화제작소 가능성들’을 설립하고 대중을 상대로 기록하는 삶을 알리고 있다. 일상 루틴, 독서법 등 어른을 위한 공부법을 제안하는 그의 유튜브 채널 ‘김교수의 세 가지’에는 22만 명의 구독자들이 모였다. 3월 14일 서울 마포구의 문화제작소 가능성들 사무실을 찾아 그에게 기록을 통해 성장하는 법에 대해 물었다.
왜 기록이 중요한가요.
한국 사람들 정말 열심히 살잖아요. 모두에게 박수쳐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면 소모감과 피곤함을 느끼지 않으시나요. 분명히 힘들었지만 ‘남는 게 없어’라는 생각을 많이 하죠. 그걸 막아주는 게 기록입니다.
어떻게요.
하루를 알차게 사는 직장인의 하루를 생각해보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고, 출근해서 업무와 관련된 여러 구상을 해요. 메일을 주고받다 지식을 얻기도 할 테고요. 밤엔 친구를 만나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영화를 볼 수도 있죠. 이 모든 과정은 지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를 조금씩 메모해두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하루를 소모적으로 보냈다는 생각이 사라질 겁니다.
의미를 찾게 된다는 말인가요.
기록을 하면 지나간 시간이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경험을 통해 발생한 지적 산물이 몸에 남게 되는 거죠. 저는 이 과정을 반복하는 사람을 ‘기록형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기록형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삶을 기획할 수 있게 됩니다.
메모는 속기록이 아니다
무엇을 써야 하나요.
우리는 일상을 보내며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직장 동료와의 대화, 읽은 책, 강의나 회사 회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틈틈이 메모하면 됩니다. 포인트는 모든 걸 다 적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메모는 요약 작업이에요. 상사의 지시를 속기록 쓰듯 받아 적는 부하 직원은 유능한 사람이 아니죠. 강의를 들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맥락을 파악하고 몇 개의 키워드로 강의를 요약할 수 있죠. 메모한 뒤에는 기록으로 바꾸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메모와 기록은 어떻게 다른가요.
메모를 재정비해서 정제된 형태로 만든 게 기록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록은 메모의 ‘엑기스’입니다.
어떻게 메모를 엑기스로 바꾸나요.
메모를 다시 한번 요약하는 거죠. 저는 메모하는 노트와 매일 밤 이를 다시 요약해 정리하는 노트가 따로 있어요. 바빠서 메모를 기록으로 바꾸지 못한 건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일주일간의 메모와 기록을 되돌아보며 정리합니다. 가족들도 그 시간에는 저를 건드리지 않습니다(웃음).
대화도 메모해 기록으로 남겨둔다고요.
일주일간 있었던 일을 정리하다 보면 가장 흥미로운 게 대화 기록입니다. 인간은 책으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도 있지만 타인과 대화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깨달음도 많습니다. 누구나 이야기하다가 평소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을 느껴보셨을 거예요. 문제는 빨리 잊어버린다는 거죠. 그걸 대화하며 적어두라는 거예요. 대화가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그 대화의 내용을 한 번 더 요약하고 키워드로 남겨두면 됩니다.
오늘 하루 중요한 일 5가지부터
‘기록하는 삶’이 쉽지는 않네요.아침엔 플래너 쓰기 그리고 밤엔 일기 쓰기 2가지부터 시작하길 권합니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서 다이어리를 쓰세요. 하루를 계획해보는 거죠. 계획을 세우라고 하면 학창 시절 방학 계획표를 떠올려요. ‘몇 시엔 무엇을 한다’ 이렇게 시간과 해야 할 일을 연결하는 거죠. 그러면 오히려 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 자괴감만 커져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침에 하루를 시뮬레이션해보며 중요한 일 5가지 정도를 골라 써보세요. 오전 시간에 2가지, 오후엔 밥 먹고 졸리니까 하나, 저녁 시간에 2가지 이렇게 정하고 다이어리에 적는 겁니다. 일과를 시작하기 전 먼저 적어두면 하루를 내가 주관하고 있는 느낌을 받을 거예요. 그리고 밤이 되면 아침부터 뭘 했는지 기억나는 대로 메모해보시고 이를 토대로 일기를 써보세요.
기록은 꼭 노트에 해야 하나요.
취향 문제라고 봐요. 저는 만년필로 종이에 쓸 때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걸 좋아합니다. 아날로그식 기록이 두뇌 각인 효과가 좋다는 것은 검증된 사실이긴 합니다. 하지만 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합니다. 어디에 메모를 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고 이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이죠.
막상 뭘 적으려고 해도 무엇이 중요한지 헷갈립니다.
메모를 싫어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그런 질문을 합니다(웃음). 그래서 더 중요한 질문이고요. 책으로 따지면 오독(誤讀)에 대한 우려라고 생각해요. 저는 살면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네 번 정도 읽었는데요. 그때마다 느끼는 바가 달랐어요. 작가 역시 독자가 읽는 때에 따라 자신의 저서를 다르게 봐주길 바랐을 겁니다. 그 모든 게 저자와 독자의 대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관점으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게 좋은 독서법이듯, 평소 메모할 때도 자신을 믿으세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쓰고 정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주기적으로 기록을 다시 살펴봐야 하나요.
저는 한 달, 1년 단위로 다시 기록하는 시간을 가지는데요. 그때는 삶을 다양한 영역으로 쪼개길 권합니다. 관계, 일, 공부 등 분야를 나누고 각 영역을 통시적으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지속하면 삶이 달라지나요.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메시아적 시간’을 말했습니다. 신은 영겁의 시간을 보는 존재잖아요. 그럼 신은 그 시간을 응축해서 볼 겁니다. 벤야민은 인간도 신처럼 시간을 압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하루의 일을 기록으로 남겨뒀다고 해보죠. 그걸 돌이켜보면 시간이 응축돼서 몸에 달라붙는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메시아적 시간이 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지식이 축적돼 쌓이면 ‘양질전화(量質轉化·양의 증가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옴)’가 일어납니다. 컵에 물이 꽉 차서 넘치듯 그게 아이디어가 되고, 영감이 되는 거죠. 그래서 기록을 습관적으로 하는 분들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유를 드는데, 이 역시 기록을 통해 가능합니다.
자유요.
자유엔 2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대개 사회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것들이 우리 생각을 옭아매고 있거든요. 기록은 물처럼 흘러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붙잡아서 명시화하는 작업이에요. 그러니까 기록을 지속하면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물론 그걸 알았다고 해서 바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요. 이 역시 메모와 기록이 동반돼야 그 기술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하루 18시간씩 공부한 3개월
김 교수는 이러한 기록에 대한 철학을 엮어 ‘거인의 노트’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했다. 본인의 저서와 함께 권할 다른 책이 있냐고 묻자 그는 서재에서 세계적인 생산성 권위자인 티아고 포르테의 ‘세컨드 브레인’과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 앤절라 더크워스가 쓴 ‘그릿’을 꺼내 들었다.왜 두 책인가요.
‘세컨드 브레인’은 기록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정리해 모아두느냐에 대한 책입니다. 기록학으로 말하면 아카이브 능력이죠. 기록을 평소에 실천하면 그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이를 활용할 수 있는지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릿’은 기록과 함께 개인의 삶에서 자유를 얻는 데 도움을 줄 거예요. 그릿(grit)은 열정과 집념이 있는 끈기라는 뜻인데요. 쉽게 말하면 미친 듯이 지속하는 거죠. 저자가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기록을 좋아해서 기록학 연구를 시작했나요. 혹은 그 반대인가요.
대학교 3학년 때의 경험을 잊을 수 없습니다. 1979년 대학에 입학해서 2학년이 될 때까지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러다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하기 전 3개월의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대학 4년 동안 배울 공부를 한꺼번에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독서실을 끊어서 3개월 동안 하루 18시간씩 공부했습니다. 하루에 4시간 30분 동안 자고 1시간 30분 동안 세끼 밥을 먹고 나머지는 공부하는 거죠. 일주일이 지나니 논문 스무 편과 책 두 권을 읽었더라고요. 그런데 남는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후엔 공부한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야 내 걸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걸 3개월 동안 하면서 요령도 생겼고요. 대학원에서 기록학을 공부하며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 걸 그때 미리 경험한 거죠. 기록에 대한 저 나름대로 명확한 인식을 갖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이제는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25년간 국가나 조직 차원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데 소임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개개인이 무엇을 기록하고 이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반응이 좋은 걸 보면 그만큼 많은 분이 자기 삶을 기록으로 정리하는 데 갈증을 느껴왔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앞으로도 기록을 통해 많은 분이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김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강조했다.
“우선 문구점으로 달려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기장을 사세요. 그리고 3개월만 써보세요. 그다음부터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기록형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겁니다.”
#김익한 #김교수의세가지 #기록 #메모 #여성동아
사진 조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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