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하며 알게 된 사실 하나. 모든 일은 ‘기획’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마을의 작은 도로부터 편의점의 상품 정렬 순서, 신체의 일부가 된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그냥 알아서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혼신의 노력이 들어간 누군가의 기획이 없었으면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직장인들에겐 밥 먹듯 만들어야 하는 기획안이지만 막상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곳은 없다. 신입 사원들이 첫 좌절을 맛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 2013년 박신영 기획스쿨 이사가 출간한 책 ‘기획의 정석’은 이러한 수요를 적확하게 파고들었다. 결과는 ‘대박’. 이 책은 출간 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으면서 지금껏 2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박신영 이사는 대학생 시절 공모전을 휩쓸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대형 광고회사에 취직해 9개 팀을 옮겨 다니며 직장 생활을 했다. 그 경험을 녹여 쓴 책이 바로 ‘기획의 정석’이다. 지금은 광고회사를 퇴직한 후 기획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 유수의 기업에 출강하며 대면, 비대면 가리지 않고 기획안 작성으로 막막해하는 직장인들을 돕고 있다. 20만 부 판매 기념 재출간을 계기로 서울 양재동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한국에서 요즘 20만 부 팔리는 책이 흔치 않은데요. 20만 부 에디션판을 출간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 말고 무슨 얘길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저 스스로를 찾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정보를 담았어요. 기획안 작성을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는 않잖아요.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은 많은 학생분, 직장인분들이 찾아주신 것 같아요. 책이 많이 팔린 것은 독자분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사셨기 때문이더라고요. 상사가 후배에게, 교수님이 제자들에게 많이 선물하셨대요. 얼마 전 아버지가 직장인이 된 딸에게 선물했다는 소식을 듣고 특히 감동받았어요.
10년 가까이 독자들이 책을 찾은 이유가 뭐라 생각하세요.
강연을 하다 보니 매일 직장인분들을 만나잖아요.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 어느 날 뜬금없이 팀장님이 기획서를 써 오라고 지시해요. 직원은 당황하죠. 기획서 작성은 일상 업무와 다르잖아요. 달리기만 해온 사람이 축구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어려워해요. 제 수강생 중에는 40대 엔지니어가 많아요. 전문 지식은 있지만 타인에게 전달해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시더라고요. 기획안을 열심히 써서 제출했는데 상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작성자는 ‘왜 이것도 못 알아듣지?’ 싶은 거죠. 기획은 정답이 없는 영역인데 조금이나마 길잡이가 되다 보니 많이 찾으신 것 같아요.
이사님이 생각하는 기획이란 무엇인가요.
기획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증상을 해소하는 진통제 또는 빈틈을 채우는 비타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획안을 다 쓰면 진통제와 비타민의 기능을 충족하고 있는지 꼭 점검해야 해요.
박신영 이사는 다독가다. 그의 책 속에는 심리학부터 사회과학까지 폭넓고 다양한 내용이 인용돼 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동화책을 포함해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책이 자신을 키웠고, 대부분의 영감을 책에서 받았다고 할 정도. 그의 책에도 독서의 중요성이 여러 차례 강조돼 있다.
박신영 이사가 독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기획은 ‘왜(why)’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기획은 스스로 질문하며 얻은 답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박 이사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록하며 묻는 습관과 풍부한 지식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책은 세계적인 명사가 각 잡고 정리한 지식을 공간의 제약 없이 흡수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시대가 바뀌었어요. 그래서 조금 조심스러운데요. 제 얘길 하자면, 저는 모르는 게 생기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며 답을 찾았어요. 계속 책을 뒤졌는데도 답을 못 찾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죠. 요즘은 대부분 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죠. 기획을 사고, 정리, 전달의 과정으로 본다면 과거에 비해 사고의 과정은 확실히 짧아졌어요. 사고의 양 또한 줄어든 것 같아요. 반면 명확히 똑떨어지는 답을 원하는 성향은 짙어졌어요. 그래서 강의할 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 수강생들이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기획은 답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 강의 스타일을 많이 바꿨어요. 강의 내용을 딱 떨어지는 공식으로 만들었죠. “이게 답은 아니지만, 우선 이렇게 시작하고 익숙해지면 각자의 스타일을 살려보라”는 식으로 진행하죠.
책에서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데요.
책을 읽는다는 게 수치로 환산되지 않다 보니 가시적인 성취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중요성이 덜 부각되는 면이 있어요. 저는 대학 시절 책만 보려고 휴학하기도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마음 한편에는 불안감이 있었죠.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의 차이는 독서량에 따른 내공에서 오는 것 같아요. 책을 보는 건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과 같죠.
“창의적인 기획은 엉뚱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창의성은 굉장히 포괄적인 주제인데, 제 생각에 핵심은 디테일이에요. 아까 말했던 진통제 기능을 하는 기획안을 예로 들자면, 창의성은 고통 유발 요소를 누가 얼마나 세세하게 쪼개 설명해내는지에 따라 갈리는 거죠.
창의성의 핵심이 디테일이라니 좀 색다른 관점이네요.
만약 직장 상사가 “기획안 잘 쓰는 방법을 창의적으로 생각해봐”라고 하면 얼마나 뜬금없겠어요. 이럴 때 기획서를 세세하게 분해해보는 거죠. 시간의 축으로, 공간의 축으로, 결과물의 축으로요. 시간의 축으로 쪼갠다면 기획서를 쓰기 전, 중, 후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 어디인지 찾아내고 솔루션을 제시하면 기획이 날카로워지죠. 기획안을 작성할 때 여러 축으로 쪼개는 연습을 하는 걸 추천해요.
기획안을 작성할 때 일반인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면요.
읽는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춰야 해요. 자기중심적으로 기획안을 쓴다거나 장황하게 설명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럴 때 상사는 “됐고,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라고 묻죠. 기획안은 개인 소장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읽으라고 쓰는 거잖아요. 상대의 그릇에 내 생각을 알맞게 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상대방의 관점에 맞추는 연습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기획안이 거절당했을 때 섣불리 ‘아 짜증 나. 나랑 이 사람 참 안 맞네’라고 생각하기보단 ‘결론부터 말하길 바라는 스타일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바로 안 맞는다고 단정 지으면 마음을 닫게 되고 그 사람과 소통이 어려워져요. 쉽지 않지만 가치 판단을 하기보단 피드백을 수용하고 내 결과물에 반영하려고 노력하길 권해요.
박신영 이사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의 저서들이 놓인 책꽂이와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장난감이 눈에 들어왔다. 강사와 엄마라는 그의 정체성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박 이사는 기획에 관한 인터뷰를 하면서 아이와 남편의 이야기를 사례로 자주 언급했다. 일과 가정이 균형 잡힌, 이른바 MZ세대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각광받는 프리랜서의 삶은 어떤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정기적 수입원이 없다는 것이 불안하지는 않은지 궁금해졌다.
요즘 젊은 세대가 동경하는 성공한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굉장히 만족해요.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죠. 일의 양을 제가 조절할 수 있는 점도 좋고요. 물론 아예 일이 없어질 위험부담도 있지만(웃음).
두려움이나 불안이 많은 것 같지는 않네요.
성격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강연을 하다 보면 갑자기 취소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요즘은 확진자가 나온다거나 하는 경우죠. 그러면 “아싸” 하면서 휴가 계획을 짜는 사람이 있고, “어떡하지” 하면서 걱정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전 약간 배짱이 있는 편이에요. ‘어떻게든 되겠지’란 마인드죠. 안정감을 중시하는 분들은 프리랜서로 자리 잡고도 다시 회사로 돌아가시더라고요.
집안일할 때도 기획을 잘하시나요.
저는 타고나길 정리를 잘 못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정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죠. 밖으로 보이는 제 자아는 ‘훈련된 자아’이고, 집에선 남편이 절 ‘멍신영’이라고 불러요. 일할 때 긴장을 많이 해서 일상에서는 대체로 멍한 상태로 지내요. 또 감성적이어서 아침에 노래 한번 잘못 들으면 하루를 망치기도 하고 그랬죠(웃음). 남편이 슬픔을 증폭시키는 취미가 있다고 말할 정도예요. 결혼과 육아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죠.
모든 것이 정리된 삶을 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연애할 때부터 너무 힘든 날에는 전화기를 꺼두고 기절하곤 했어요. 좀 무계획적이기도 하고요. 일이 없는 날에는 새벽까지 시리즈물을 몰아서 보는 스타일(웃음).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달라졌어요. 제가 무슨 일을 하건 아이는 무조건 오후 4시에 집에 와요. 지쳐 있을 새가 없죠. 일할 때보다 더 높은 텐션으로 아이를 맞이해야 하고, 아이에 맞춰 계획을 세워야만 해요. 육아를 위해 체력 향상 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어요. 좋게 말하면 아이가 생기면서 부지런하고 건강해졌어요.
그렇군요. 육아도 기획하듯 계획적으로 착착 준비하시나요.
강연장에서 보면 회사에서 강제로 보낸 분들도 있고, 본인이 선택해서 참석하신 분들도 있어요. 강제로 온 사람은 워크숍 내내 ‘내가 왜 이것을 해낼 수 없는지’에 몰두해요. 자발적으로 온 사람은 ‘어떻게 결과물을 만들까’에 집중해요. 자의냐 타의냐에 따라 효율 차가 크죠. 저는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집중하는 힘을 키우는 사람이 되길 바라요. 그런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
책에서 보면 무대공포증이 있는 것 같던데요. 무대에 서는 걸 반복하면 잘하게 되나요.
저는 여전히 무대 위에 설 때면 떨려요. 지겨울 정도로 발표를 많이 했는데도 긴장해요.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반복해서 잘한다는 건 변수를 많이 수집한다는 뜻인 것 같아요. 처음 의외의 상황과 마주치면 당황해서 얼어붙기 마련이죠. 여러 번 반복하면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만한 데이터가 쌓이는 거예요. 경험의 양이 축적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능숙하게 넘어가거나 수습할 여유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대목은 “정말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이라도 처음엔 그냥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에요.
#기획의정석 #박신영 #직장인라이프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직장인들에겐 밥 먹듯 만들어야 하는 기획안이지만 막상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곳은 없다. 신입 사원들이 첫 좌절을 맛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 2013년 박신영 기획스쿨 이사가 출간한 책 ‘기획의 정석’은 이러한 수요를 적확하게 파고들었다. 결과는 ‘대박’. 이 책은 출간 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으면서 지금껏 2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박신영 이사는 대학생 시절 공모전을 휩쓸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대형 광고회사에 취직해 9개 팀을 옮겨 다니며 직장 생활을 했다. 그 경험을 녹여 쓴 책이 바로 ‘기획의 정석’이다. 지금은 광고회사를 퇴직한 후 기획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 유수의 기업에 출강하며 대면, 비대면 가리지 않고 기획안 작성으로 막막해하는 직장인들을 돕고 있다. 20만 부 판매 기념 재출간을 계기로 서울 양재동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기획은 진통제 또는 비타민이 되어야
박신영 기획스쿨 이사가 대중 앞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
감사하다는 말 말고 무슨 얘길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저 스스로를 찾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정보를 담았어요. 기획안 작성을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는 않잖아요.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은 많은 학생분, 직장인분들이 찾아주신 것 같아요. 책이 많이 팔린 것은 독자분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사셨기 때문이더라고요. 상사가 후배에게, 교수님이 제자들에게 많이 선물하셨대요. 얼마 전 아버지가 직장인이 된 딸에게 선물했다는 소식을 듣고 특히 감동받았어요.
10년 가까이 독자들이 책을 찾은 이유가 뭐라 생각하세요.
강연을 하다 보니 매일 직장인분들을 만나잖아요.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 어느 날 뜬금없이 팀장님이 기획서를 써 오라고 지시해요. 직원은 당황하죠. 기획서 작성은 일상 업무와 다르잖아요. 달리기만 해온 사람이 축구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어려워해요. 제 수강생 중에는 40대 엔지니어가 많아요. 전문 지식은 있지만 타인에게 전달해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시더라고요. 기획안을 열심히 써서 제출했는데 상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작성자는 ‘왜 이것도 못 알아듣지?’ 싶은 거죠. 기획은 정답이 없는 영역인데 조금이나마 길잡이가 되다 보니 많이 찾으신 것 같아요.
이사님이 생각하는 기획이란 무엇인가요.
기획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증상을 해소하는 진통제 또는 빈틈을 채우는 비타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획안을 다 쓰면 진통제와 비타민의 기능을 충족하고 있는지 꼭 점검해야 해요.
박신영 이사는 다독가다. 그의 책 속에는 심리학부터 사회과학까지 폭넓고 다양한 내용이 인용돼 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동화책을 포함해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책이 자신을 키웠고, 대부분의 영감을 책에서 받았다고 할 정도. 그의 책에도 독서의 중요성이 여러 차례 강조돼 있다.
박신영 이사가 독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기획은 ‘왜(why)’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기획은 스스로 질문하며 얻은 답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박 이사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록하며 묻는 습관과 풍부한 지식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책은 세계적인 명사가 각 잡고 정리한 지식을 공간의 제약 없이 흡수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결정적 순간의 차이는 독서량에서 갈린다
책 읽는 젊은 세대가 줄었다고 합니다. 기획 능력에도 변화가 감지되나요.시대가 바뀌었어요. 그래서 조금 조심스러운데요. 제 얘길 하자면, 저는 모르는 게 생기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며 답을 찾았어요. 계속 책을 뒤졌는데도 답을 못 찾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죠. 요즘은 대부분 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죠. 기획을 사고, 정리, 전달의 과정으로 본다면 과거에 비해 사고의 과정은 확실히 짧아졌어요. 사고의 양 또한 줄어든 것 같아요. 반면 명확히 똑떨어지는 답을 원하는 성향은 짙어졌어요. 그래서 강의할 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 수강생들이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기획은 답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 강의 스타일을 많이 바꿨어요. 강의 내용을 딱 떨어지는 공식으로 만들었죠. “이게 답은 아니지만, 우선 이렇게 시작하고 익숙해지면 각자의 스타일을 살려보라”는 식으로 진행하죠.
책에서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데요.
책을 읽는다는 게 수치로 환산되지 않다 보니 가시적인 성취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중요성이 덜 부각되는 면이 있어요. 저는 대학 시절 책만 보려고 휴학하기도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마음 한편에는 불안감이 있었죠.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의 차이는 독서량에 따른 내공에서 오는 것 같아요. 책을 보는 건 기초체력을 키우는 것과 같죠.
“창의적인 기획은 엉뚱한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창의성은 굉장히 포괄적인 주제인데, 제 생각에 핵심은 디테일이에요. 아까 말했던 진통제 기능을 하는 기획안을 예로 들자면, 창의성은 고통 유발 요소를 누가 얼마나 세세하게 쪼개 설명해내는지에 따라 갈리는 거죠.
창의성의 핵심이 디테일이라니 좀 색다른 관점이네요.
만약 직장 상사가 “기획안 잘 쓰는 방법을 창의적으로 생각해봐”라고 하면 얼마나 뜬금없겠어요. 이럴 때 기획서를 세세하게 분해해보는 거죠. 시간의 축으로, 공간의 축으로, 결과물의 축으로요. 시간의 축으로 쪼갠다면 기획서를 쓰기 전, 중, 후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 어디인지 찾아내고 솔루션을 제시하면 기획이 날카로워지죠. 기획안을 작성할 때 여러 축으로 쪼개는 연습을 하는 걸 추천해요.
기획안을 작성할 때 일반인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다면요.
읽는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춰야 해요. 자기중심적으로 기획안을 쓴다거나 장황하게 설명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럴 때 상사는 “됐고,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라고 묻죠. 기획안은 개인 소장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읽으라고 쓰는 거잖아요. 상대의 그릇에 내 생각을 알맞게 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상대방의 관점에 맞추는 연습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기획안이 거절당했을 때 섣불리 ‘아 짜증 나. 나랑 이 사람 참 안 맞네’라고 생각하기보단 ‘결론부터 말하길 바라는 스타일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바로 안 맞는다고 단정 지으면 마음을 닫게 되고 그 사람과 소통이 어려워져요. 쉽지 않지만 가치 판단을 하기보단 피드백을 수용하고 내 결과물에 반영하려고 노력하길 권해요.
난 배짱 있는 스타일, 프리랜서가 잘 맞는다
사무실 한편에 놓인 장난감들로 박신영 기획스쿨 이사도 엄마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세대가 동경하는 성공한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굉장히 만족해요.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죠. 일의 양을 제가 조절할 수 있는 점도 좋고요. 물론 아예 일이 없어질 위험부담도 있지만(웃음).
두려움이나 불안이 많은 것 같지는 않네요.
성격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강연을 하다 보면 갑자기 취소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요즘은 확진자가 나온다거나 하는 경우죠. 그러면 “아싸” 하면서 휴가 계획을 짜는 사람이 있고, “어떡하지” 하면서 걱정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전 약간 배짱이 있는 편이에요. ‘어떻게든 되겠지’란 마인드죠. 안정감을 중시하는 분들은 프리랜서로 자리 잡고도 다시 회사로 돌아가시더라고요.
집안일할 때도 기획을 잘하시나요.
저는 타고나길 정리를 잘 못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정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죠. 밖으로 보이는 제 자아는 ‘훈련된 자아’이고, 집에선 남편이 절 ‘멍신영’이라고 불러요. 일할 때 긴장을 많이 해서 일상에서는 대체로 멍한 상태로 지내요. 또 감성적이어서 아침에 노래 한번 잘못 들으면 하루를 망치기도 하고 그랬죠(웃음). 남편이 슬픔을 증폭시키는 취미가 있다고 말할 정도예요. 결혼과 육아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죠.
모든 것이 정리된 삶을 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연애할 때부터 너무 힘든 날에는 전화기를 꺼두고 기절하곤 했어요. 좀 무계획적이기도 하고요. 일이 없는 날에는 새벽까지 시리즈물을 몰아서 보는 스타일(웃음).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달라졌어요. 제가 무슨 일을 하건 아이는 무조건 오후 4시에 집에 와요. 지쳐 있을 새가 없죠. 일할 때보다 더 높은 텐션으로 아이를 맞이해야 하고, 아이에 맞춰 계획을 세워야만 해요. 육아를 위해 체력 향상 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어요. 좋게 말하면 아이가 생기면서 부지런하고 건강해졌어요.
그렇군요. 육아도 기획하듯 계획적으로 착착 준비하시나요.
강연장에서 보면 회사에서 강제로 보낸 분들도 있고, 본인이 선택해서 참석하신 분들도 있어요. 강제로 온 사람은 워크숍 내내 ‘내가 왜 이것을 해낼 수 없는지’에 몰두해요. 자발적으로 온 사람은 ‘어떻게 결과물을 만들까’에 집중해요. 자의냐 타의냐에 따라 효율 차가 크죠. 저는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집중하는 힘을 키우는 사람이 되길 바라요. 그런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
책에서 보면 무대공포증이 있는 것 같던데요. 무대에 서는 걸 반복하면 잘하게 되나요.
저는 여전히 무대 위에 설 때면 떨려요. 지겨울 정도로 발표를 많이 했는데도 긴장해요.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반복해서 잘한다는 건 변수를 많이 수집한다는 뜻인 것 같아요. 처음 의외의 상황과 마주치면 당황해서 얼어붙기 마련이죠. 여러 번 반복하면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만한 데이터가 쌓이는 거예요. 경험의 양이 축적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능숙하게 넘어가거나 수습할 여유가 생기는 거죠. 그래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대목은 “정말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이라도 처음엔 그냥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에요.
#기획의정석 #박신영 #직장인라이프 #여성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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