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을 갖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완벽하게 배역에 빠져드는 것은 물론, 대중의 공감을 사야만 오래도록 회자되는 작품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올릴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표작은 족쇄가 되기도 한다. 기존 캐릭터를 뛰어넘어야만 또다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일을 배우 김서형(48)은 거듭해내며 ‘역시 김서형’이란 찬사를 받고 있다.
그녀의 대표작을 거론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다. 2008년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이 바로 그것. 당시 김서형은 불륜녀 신애리 역을 맡아 전에 없던 악녀 캐릭터를 완성해 최고 시청률 40.6%라는 기록을 세우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신애리를 만나기 전까지 김서형은 1994년 KBS 16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 후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아내의 유혹’으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그녀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제대로 알렸고, 2009년 SBS 연기대상에서 여자 연기상까지 수상했다. 이는 그녀가 데뷔한 후 처음 받은 상이었다.
이후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 ‘기황후’ ‘굿와이프’, 영화 ‘베를린’ ‘악녀’ 등에 출연해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연기 내공을 쌓던 김서형은 2018년 또 하나의 인생작을 만났다. JTBC 드라마 ‘SKY 캐슬’에서 눈빛만으로도 학부모들을 쥐락펴락하는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 선생 역으로 매회 화제를 일으킨 것. 입시에 목맨 학생과 부모들을 이용하는 단순한 악역뿐 아니라 자식을 궁지로 내몬 아픔을 간직한 어머니로서의 면모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SKY 캐슬’ 종영 이후 그녀에게 “배우 김서형은 앞으로 ‘SKY 캐슬’의 김주영을 뛰어넘는 캐릭터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의 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세간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부쉈다. 6월 27일 종영한 tvN 드라마 ‘마인’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재벌가 맏며느리로 완벽하게 변신해 또 한 번 ‘인생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 같은 여성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기업 총수 자리를 실력으로 획득하며, 동성을 아프도록 사랑하는 전에 없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 시청자들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드라마 종영에 앞서 6월 17일 개봉한 영화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 모교’에서는 고교 시절 아픈 기억을 간직한 여고 교감 선생 은희로 출연해 아이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직접 나서서 과거를 단죄하는 등 미스터리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의 면모를 그려내기도 했다. 5월 말 드라마 ‘마인’ 촬영을 마무리한 김서형을 온라인 인터뷰를 통해 만났다. 주로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을 맡아온 터라 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앞섰다. 그러나 시종일관 여유로우면서도 밝게 미소 지으며 쏟아지는 질문에 성의껏 대답하는 그녀에게서 반전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 ‘마인’ 촬영을 끝낸 기분이 어떠신가요.
작품을 마치고 나면 헛헛함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번 작품은 시원해요. 무엇보다 늘 멜로를 찍고 싶었는데, 소소하긴 했지만 ‘마인’에 그런 요소가 들어 있어서 갈증도 해소되고 만족스러웠어요. 이번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에 ‘다음 작품으로 정통 멜로 장르가 들어올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마인’ 첫 방송 전 ‘SKY 캐슬’에서의 캐릭터와 겹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다른 느낌이라 시청자들이 더 놀라고 좋아한 것 같아요.
2년 전 ‘SKY 캐슬’이 끝나고 많은 분이 ‘김서형의 인생 캐릭터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죠. 사실 그런 작품은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요. 그런데 요즘 “김주영 선생을 뛰어넘었다”고도 말해주시니 너무 기분 좋아요. 사실 배우들은 안주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20년 넘게 연기를 해왔으니 저도 모르게 쌓인 버릇과 습관이 있을 거예요. 딕션과 웃음소리에도 버릇이 묻어나겠죠. 그러니 역할에 따라 변주를 해야 해요. 그러려면 더 연구하고 숙제해야 하고요. ‘SKY 캐슬’로 각인된 틀을 깨고 싶었고,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네요.
이보영 배우와 보여준 워맨스(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도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이보영 배우는 첫 만남부터 ‘형님’ ‘동서’라고 서로 부를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어요. 이 작품에서 여자끼리 호흡이 붙을 때마다 주변에서 다들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더라고요. 현장에서도 자주 눈을 마주치고 얘기를 나누면서 연기해나갔어요. 두 사람 모두 ‘이 작품이 잘되고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마음의 연대가 있었어요. 절실한 심정 같은 게 잘 표현된 듯싶어요.
‘SKY 캐슬’ ‘악녀’ ‘마인’ 등 최근작에서 주로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했어요. 이미지가 정형화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으셨나요.
연기를 좋아해서 20년 넘게 해온 면도 있지만,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연기를 멈출 수 없었어요. 정형화된 이미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고, ‘한계를 가진 배우’처럼 보일까 봐 힘들었던 적도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다양한 역할이 들어오겠지’라고 생각해도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죠. 예를 들어 ‘SKY 캐슬’ 종영 후 JTBC 예능 ‘아는 형님’에 나갔을 때 많은 분이 저의 망가지는 모습에 환호해주셨지만 막상 그런 가벼운 역할은 들어오지 않았어요. 제가 한계를 두는 게 아니라 캐스팅이 제한적이에요. 그런 점에서 저도 사람인지라 아쉬웠고, 스스로 고민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어요. 중심이 흔들릴 때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사람도, 어지러운 마음을 이겨내야 하는 사람도 결국 저더라고요. 하고 싶은 장르와 역할이 많지만, 스스로 해결점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2년 전 ‘아는 형님’ 출연 당시 많은 화제가 됐어요. 예능에 출연해 망가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신 듯해요.
전혀 거리낌이 없어요. 예능 출연을 기피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본업은 배우니까 망가져도 작품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죠. 로맨틱 코미디라든지, 공포물이라도 코미디 요소가 가미된 장르가 있잖아요. 그런 데서 친근한 이미지로 보이는 게 저의 바람이에요.
캐스팅이 제한적이라고 하셨는데, 쇼트커트 혹은 단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도 본인의 의지 아닌가요.
작품이 끝나면 어떤 역할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머리를 일부러 기르기도 해요. 그런데 결국 제작진이 원하는 건 긴 머리보다는 짧은 헤어스타일이더라고요. 특히 2017년 칸영화제에서 쇼트커트를 했을 때 반응이 괜찮아서인지 촬영 전 제작진과 미팅할 때면 그런 이미지 컷을 많이들 가져오세요. 또 긴 머리가 어울린다고 말해주시는 분이 드물기도 하고요. 물론 상대 여배우 머리가 길 때는 저까지 긴 헤어스타일로 등장하면 이미지가 겹치지 않을까 싶어 캐릭터의 차별성을 위해 일부러 머리를 짧게 자르기도 해요.
칸영화제 참석 당시 스타일뿐 아니라 몸매도 화제가 됐어요. 복근은 지금도 유지하시나요.
유지는 힘들어요. 칸에 갔을 때 스타일리스트와 의상 준비하면서 복근에 신경을 써보자 하고 만든 거예요. 평소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필라테스로 코어 힘을 꾸준히 기르는 편이에요. 요즘은 사전제작을 많이 하지만 아직도 현장은 힘들어요. 제가 잠이 많은데, 촬영이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니까 식사를 똑같이 해도 살이 빠지더라고요. 코어에 힘이 떨어지면 대사를 내뱉기가 어려워요. 대부분 힐을 신고 촬영하니 더욱 코어 힘이 필요하죠. 관리 차원에서 운동한다기보다 현장에서 잘 버티고 대사를 잘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커요.
앞서 다양한 장르나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특별히 원하는 캐릭터가 있나요.
멜로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드라마 ‘마인’에 성소수자 역할이었지만 어쨌든 멜로의 요소가 있어서 숨통이 트였어요. 동성의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애틋함을 잘 표현했다고 좋게 생각해주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어요. 이번 작품을 계기로 정통 멜로드라마나 영화 캐스팅이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영화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 모교’가 6월 말 개봉했는데, 어떤 이유로 이 작품을 고르셨는지 궁금해요.
‘SKY 캐슬’ 종영 후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과 답답함이 남아 있었어요. 김주영이라는 캐릭터가 내공이 상당했고, 충분히 감정을 다 쏟아냈는데도 그랬죠. 드라마는 끝났지만 저는 끝내지 못한 느낌이랄까.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남아 있는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 싶어 갈증이 심했는데, 그러던 차에 이 작품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 작품이라면 남은 에너지뿐 아니라 없던 에너지까지 다 끌어서 ‘탁’ 쏟아부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원하던 대로 남은 에너지를 쏟아부어 만족하셨나요.
두 달의 촬영 기간 동안 한 치의 아쉬움도 남지 않을 정도로 은희라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었어요. 영화를 보는데 ‘저 때 정말 힘들게 촬영했구나’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더라고요. 그때는 감독님과 모든 스태프가 심적으로 케어를 많이 해주셔서 열심히 촬영한 기억밖에 없는데 완성본을 보니 그제야 고생스러웠던 순간들이 떠올랐어요(웃음).
학생으로 출연한 김현수, 최리 등 젊은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다들 본인의 몫만큼 역할 준비를 철저히 해 와서 놀랐어요. 준비가 잘돼 있으니까 서로 합을 맞추기도 수월했고,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었어요.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서로 감정 연기가 잘되면 눈빛 교환만으로 짜릿함을 느끼거든요. (김)현수와도 그런 교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 김서형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학교로 가는 길에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하던 꿈 많은 학생이었어요. 그 꿈에 다가가기 위해 문학반, 기타반, 방송반 등 여러 활동을 했고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조용하게 학교를 다녔는데 소풍이나 학예회 때 장기 자랑을 하는 시간에는 시키지 않아도 손 들고 앞으로 뛰쳐나가는 학생이기도 했어요(웃음).
의외인데요. 지금은 철두철미하고 완벽주의 성향의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이미지가 강해요. 그 덕에 연기적으로도 정점에 오르신 것 같고요.
정점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물론 저도 연기를 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죠. 특히 이번 드라마와 영화에서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는 캐릭터를 연기했기에 그럴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정점에 올랐다고 말하기엔 이른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제가 해보지 않은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또다시 같은 질문을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이것만은 놓치지 않고 가져가고 싶다’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현장에선 스태프가 첫 시청자예요. 그분들은 배우의 연기를 가장 먼저 평가하는 동시에 ‘배우가 제 역할을 잘해줬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요. 전 항상 그 기대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요. 물론 책임감을 가진다고 완벽할 순 없겠지만, ‘성실히 노력하는 배우’라는 평에 있어서는 떳떳해요. 궁극적으로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배우라야만 계속해서 길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더욱 캐릭터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하고, 그 숙제를 잘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대본에 적힌 한 줄짜리 사소한 서사라도 진정성 있게 그려내는 능력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진제공 KTH 키이스트
그녀의 대표작을 거론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다. 2008년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이 바로 그것. 당시 김서형은 불륜녀 신애리 역을 맡아 전에 없던 악녀 캐릭터를 완성해 최고 시청률 40.6%라는 기록을 세우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신애리를 만나기 전까지 김서형은 1994년 KBS 16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 후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아내의 유혹’으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그녀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제대로 알렸고, 2009년 SBS 연기대상에서 여자 연기상까지 수상했다. 이는 그녀가 데뷔한 후 처음 받은 상이었다.
이후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 ‘기황후’ ‘굿와이프’, 영화 ‘베를린’ ‘악녀’ 등에 출연해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연기 내공을 쌓던 김서형은 2018년 또 하나의 인생작을 만났다. JTBC 드라마 ‘SKY 캐슬’에서 눈빛만으로도 학부모들을 쥐락펴락하는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 선생 역으로 매회 화제를 일으킨 것. 입시에 목맨 학생과 부모들을 이용하는 단순한 악역뿐 아니라 자식을 궁지로 내몬 아픔을 간직한 어머니로서의 면모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SKY 캐슬’ 종영 이후 그녀에게 “배우 김서형은 앞으로 ‘SKY 캐슬’의 김주영을 뛰어넘는 캐릭터를 만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의 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세간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부쉈다. 6월 27일 종영한 tvN 드라마 ‘마인’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재벌가 맏며느리로 완벽하게 변신해 또 한 번 ‘인생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 같은 여성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기업 총수 자리를 실력으로 획득하며, 동성을 아프도록 사랑하는 전에 없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 시청자들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드라마 종영에 앞서 6월 17일 개봉한 영화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 모교’에서는 고교 시절 아픈 기억을 간직한 여고 교감 선생 은희로 출연해 아이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직접 나서서 과거를 단죄하는 등 미스터리하면서도 강인한 여성의 면모를 그려내기도 했다. 5월 말 드라마 ‘마인’ 촬영을 마무리한 김서형을 온라인 인터뷰를 통해 만났다. 주로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을 맡아온 터라 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앞섰다. 그러나 시종일관 여유로우면서도 밝게 미소 지으며 쏟아지는 질문에 성의껏 대답하는 그녀에게서 반전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 ‘마인’ 촬영을 끝낸 기분이 어떠신가요.
작품을 마치고 나면 헛헛함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번 작품은 시원해요. 무엇보다 늘 멜로를 찍고 싶었는데, 소소하긴 했지만 ‘마인’에 그런 요소가 들어 있어서 갈증도 해소되고 만족스러웠어요. 이번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에 ‘다음 작품으로 정통 멜로 장르가 들어올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마인’ 첫 방송 전 ‘SKY 캐슬’에서의 캐릭터와 겹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다른 느낌이라 시청자들이 더 놀라고 좋아한 것 같아요.
2년 전 ‘SKY 캐슬’이 끝나고 많은 분이 ‘김서형의 인생 캐릭터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죠. 사실 그런 작품은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요. 그런데 요즘 “김주영 선생을 뛰어넘었다”고도 말해주시니 너무 기분 좋아요. 사실 배우들은 안주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20년 넘게 연기를 해왔으니 저도 모르게 쌓인 버릇과 습관이 있을 거예요. 딕션과 웃음소리에도 버릇이 묻어나겠죠. 그러니 역할에 따라 변주를 해야 해요. 그러려면 더 연구하고 숙제해야 하고요. ‘SKY 캐슬’로 각인된 틀을 깨고 싶었고,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네요.
이보영 배우와 보여준 워맨스(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도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이보영 배우는 첫 만남부터 ‘형님’ ‘동서’라고 서로 부를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어요. 이 작품에서 여자끼리 호흡이 붙을 때마다 주변에서 다들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더라고요. 현장에서도 자주 눈을 마주치고 얘기를 나누면서 연기해나갔어요. 두 사람 모두 ‘이 작품이 잘되고 좋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마음의 연대가 있었어요. 절실한 심정 같은 게 잘 표현된 듯싶어요.
‘SKY 캐슬’ ‘악녀’ ‘마인’ 등 최근작에서 주로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했어요. 이미지가 정형화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으셨나요.
연기를 좋아해서 20년 넘게 해온 면도 있지만,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연기를 멈출 수 없었어요. 정형화된 이미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고, ‘한계를 가진 배우’처럼 보일까 봐 힘들었던 적도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다양한 역할이 들어오겠지’라고 생각해도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죠. 예를 들어 ‘SKY 캐슬’ 종영 후 JTBC 예능 ‘아는 형님’에 나갔을 때 많은 분이 저의 망가지는 모습에 환호해주셨지만 막상 그런 가벼운 역할은 들어오지 않았어요. 제가 한계를 두는 게 아니라 캐스팅이 제한적이에요. 그런 점에서 저도 사람인지라 아쉬웠고, 스스로 고민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어요. 중심이 흔들릴 때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사람도, 어지러운 마음을 이겨내야 하는 사람도 결국 저더라고요. 하고 싶은 장르와 역할이 많지만, 스스로 해결점을 찾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2년 전 ‘아는 형님’ 출연 당시 많은 화제가 됐어요. 예능에 출연해 망가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신 듯해요.
전혀 거리낌이 없어요. 예능 출연을 기피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본업은 배우니까 망가져도 작품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죠. 로맨틱 코미디라든지, 공포물이라도 코미디 요소가 가미된 장르가 있잖아요. 그런 데서 친근한 이미지로 보이는 게 저의 바람이에요.
캐스팅이 제한적이라고 하셨는데, 쇼트커트 혹은 단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도 본인의 의지 아닌가요.
작품이 끝나면 어떤 역할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머리를 일부러 기르기도 해요. 그런데 결국 제작진이 원하는 건 긴 머리보다는 짧은 헤어스타일이더라고요. 특히 2017년 칸영화제에서 쇼트커트를 했을 때 반응이 괜찮아서인지 촬영 전 제작진과 미팅할 때면 그런 이미지 컷을 많이들 가져오세요. 또 긴 머리가 어울린다고 말해주시는 분이 드물기도 하고요. 물론 상대 여배우 머리가 길 때는 저까지 긴 헤어스타일로 등장하면 이미지가 겹치지 않을까 싶어 캐릭터의 차별성을 위해 일부러 머리를 짧게 자르기도 해요.
칸영화제 참석 당시 스타일뿐 아니라 몸매도 화제가 됐어요. 복근은 지금도 유지하시나요.
유지는 힘들어요. 칸에 갔을 때 스타일리스트와 의상 준비하면서 복근에 신경을 써보자 하고 만든 거예요. 평소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필라테스로 코어 힘을 꾸준히 기르는 편이에요. 요즘은 사전제작을 많이 하지만 아직도 현장은 힘들어요. 제가 잠이 많은데, 촬영이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니까 식사를 똑같이 해도 살이 빠지더라고요. 코어에 힘이 떨어지면 대사를 내뱉기가 어려워요. 대부분 힐을 신고 촬영하니 더욱 코어 힘이 필요하죠. 관리 차원에서 운동한다기보다 현장에서 잘 버티고 대사를 잘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커요.
앞서 다양한 장르나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특별히 원하는 캐릭터가 있나요.
멜로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드라마 ‘마인’에 성소수자 역할이었지만 어쨌든 멜로의 요소가 있어서 숨통이 트였어요. 동성의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애틋함을 잘 표현했다고 좋게 생각해주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어요. 이번 작품을 계기로 정통 멜로드라마나 영화 캐스팅이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영화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 모교’가 6월 말 개봉했는데, 어떤 이유로 이 작품을 고르셨는지 궁금해요.
‘SKY 캐슬’ 종영 후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과 답답함이 남아 있었어요. 김주영이라는 캐릭터가 내공이 상당했고, 충분히 감정을 다 쏟아냈는데도 그랬죠. 드라마는 끝났지만 저는 끝내지 못한 느낌이랄까.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남아 있는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 싶어 갈증이 심했는데, 그러던 차에 이 작품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 작품이라면 남은 에너지뿐 아니라 없던 에너지까지 다 끌어서 ‘탁’ 쏟아부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원하던 대로 남은 에너지를 쏟아부어 만족하셨나요.
두 달의 촬영 기간 동안 한 치의 아쉬움도 남지 않을 정도로 은희라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었어요. 영화를 보는데 ‘저 때 정말 힘들게 촬영했구나’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더라고요. 그때는 감독님과 모든 스태프가 심적으로 케어를 많이 해주셔서 열심히 촬영한 기억밖에 없는데 완성본을 보니 그제야 고생스러웠던 순간들이 떠올랐어요(웃음).
학생으로 출연한 김현수, 최리 등 젊은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다들 본인의 몫만큼 역할 준비를 철저히 해 와서 놀랐어요. 준비가 잘돼 있으니까 서로 합을 맞추기도 수월했고,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었어요.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서로 감정 연기가 잘되면 눈빛 교환만으로 짜릿함을 느끼거든요. (김)현수와도 그런 교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 김서형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학교로 가는 길에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하던 꿈 많은 학생이었어요. 그 꿈에 다가가기 위해 문학반, 기타반, 방송반 등 여러 활동을 했고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조용하게 학교를 다녔는데 소풍이나 학예회 때 장기 자랑을 하는 시간에는 시키지 않아도 손 들고 앞으로 뛰쳐나가는 학생이기도 했어요(웃음).
의외인데요. 지금은 철두철미하고 완벽주의 성향의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이미지가 강해요. 그 덕에 연기적으로도 정점에 오르신 것 같고요.
정점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물론 저도 연기를 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죠. 특히 이번 드라마와 영화에서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는 캐릭터를 연기했기에 그럴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정점에 올랐다고 말하기엔 이른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제가 해보지 않은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또다시 같은 질문을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이것만은 놓치지 않고 가져가고 싶다’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현장에선 스태프가 첫 시청자예요. 그분들은 배우의 연기를 가장 먼저 평가하는 동시에 ‘배우가 제 역할을 잘해줬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요. 전 항상 그 기대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요. 물론 책임감을 가진다고 완벽할 순 없겠지만, ‘성실히 노력하는 배우’라는 평에 있어서는 떳떳해요. 궁극적으로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배우라야만 계속해서 길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더욱 캐릭터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하고, 그 숙제를 잘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대본에 적힌 한 줄짜리 사소한 서사라도 진정성 있게 그려내는 능력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진제공 KTH 키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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