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처럼 스쳐갈 줄 알았던 유행이 클래식이 되기도 한다.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 앞 동네가 그렇다. 10년 전쯤 도시의 경박한 유행들이 몰려왔다가 사라진 뒤 원심분리기 바닥에 부엽토처럼 남은 진짜 공원. 패션 브랜드 ‘오브제’의 강진영, 윤한희 디자이너가 4년 전 문을 연 공원 앞 만물가게 ‘퀸마마마켓’도 바로 그 도산공원의 클래식 ‘무드’ 중 하나다.
‘오브제’는 1994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캐릭터 디자이너 브랜드로, 옷가게가 있던 가로수길을 한국 패션의 산소 탱크로 만들었다. ‘오브제’는 이전의 어떤 브랜드와도 달랐고, ‘캐릭터’라는 말 그대로 성깔 좀 있는 옷이었다. 반짝 유행이 아닐까 싶었는데, ‘오브제’는 미국과 중국에서도 잘 팔렸고 대기업에서도 욕심을 냈다. 우여곡절 끝에 SK네트웍스에 ‘오브제’를 매각한 강진영, 윤한희는 긴 여행 후 신사동으로 돌아와 ‘퀸마마마켓’을 열었다.
이제 ‘퀸마마마켓’은 유행을 만드는 핫 플레이스라기보다 특정한 삶의 태도를 지시하는 이름이 됐다. ‘퀸마마마켓’은 가봐야 할 곳으로 검색되지만, SNS라는 신흥 종교 신자들로 뜨거운 여느 ‘핫플’과는 전혀 다르다. 분명한 목적을 갖고 뭔가를 구하는 사람만이 일부러 찾아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소 부수만 찍어낸 책, 반려식물과 모종삽, 지구에 덜 해로운 비누, 그리고 공원 앞 막다른 길이 허락한 정지(Pause).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퀸마마마켓’에 도착한다. 또는 기자처럼 ‘퀸마마’ 윤한희와 남편 강진영을 만나기 위해서.
오랜만의 인터뷰다. 두 사람은 패션 브랜드 ‘오브제’로 한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패션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퀸마마마켓’에서 식물과 책을 판다. 이건 ‘안티 패션’ 아닌가.
“지금 우리가 파는 건 ‘어번’ ‘그린’ ‘라이프스타일’이다. 도시, 공원, 착한 가게가 콘셉트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도시에 살지만 도시인에게 자연이 주는 영감을 제공하고 싶다.”
땅값 비싼 신사동에서 ‘유기 식물’을 분양하고, LP를 팔고, 커피를 3천원에 팔아 얼마나 유지될까 싶었는데 벌써 3년이 넘었다.
“커피는 4천원이 됐지만 여전히 최저가 수준이다. 처음부터 이곳은 물건이 아니라 큰 창문으로 보이는 햇빛과 공원의 매일매일의 변화와 자연의 가치를 파는 곳으로 구상했다. 강남에선 안 될 거라고 했지만 자연의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 즉 우리 소비자가 점점 많아진다. 자신감을 얻어서 서울 강북에 두 개의 ‘퀸마마마켓’을 열 계획이다. ‘공원 프로젝트’라고 할까.”
‘퀸마마마켓’이 문을 열었을 때 패션계가 흥분했다. 패션피플 중 왕년에 강진영, 윤한희의 ‘오브제’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왜 옷을 하지 않나.
“오픈 때 강진영의 옷을 선보였다. 반응이 괜찮았다(사실 언론의 반응은 좋았다). 그런데 ‘괜찮은’ 옷을 하고 싶진 않았다. 꼭 필요한 옷이 나올 때까지 옷을 하지 말자고 했다.”
그동안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코넬대 박사과정에 들어갔다가 패션과 공부에서 탈출해 1년 가까이 여행을 했다. 윤한희는 여행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강진영)
“여행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살았다. 패션을 벗어나면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윤한희)
무엇이 있던가.
“삶이 있었다. 골목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린 대학에서 패션을 공부하지 않았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맞춰야 할 게 없었다. 우리 마음에 와닿는 것만 했다. 그게 사람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엘리트 모범생은, 예를 들면 서울대 나온 학자나 경영자는 인생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는 능하지만 완전히 뒤집진 못할 거다. 나 같은 사람은 직접 부딪쳐서 내가 경험한 것을 믿고 내 삶을 바꾼다.”
지난 인터뷰들을 보면 ‘우리는 386’ ‘아톰 세대’라고 말한다. 어떤 뜻인가.
“우리 세대는 운동권이든 아니든 항상 사회를 생각하도록 키워졌다. 우리는 혜택도 많이 받았다. 그러니 어떻게 기여해야 할지 고민한다. 더구나 우린 아이가 없어서 뭔가 물려줄 것도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바꿀지 생각한다. 지금 삶에 관련된 것들을 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990년대에 한국에서 ‘오브제’가 성공한 건 참 신기하다. 어떤 신호를 받았나.
“옷을 내놓자마자 외제차를 탄 오렌지족들이 수표 뭉치를 들고 왔다. 그리고 패션 기자가 찾아와 옷을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서 백화점 바이어가 입점을 제안했다. ‘오브제’를 넣기 위해 새로운 존(zone)을 만들고 ‘강진영’이라는 디자이너의 캐릭터가 있는 옷이라고 하니 ‘캐릭터 디자이너 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때 뭔가가 달라진 걸 알았다.”
‘오브제’는 화려한 패턴, 리본, 버슬 등 장식이 많아서 ‘공주옷’ ‘무대복’이란 별명도 붙었다.
“어렸을 때 내 짝이 아역 탤런트였다. 얼마나 예뻤겠나. 어느 날 학교에 오신 엄마가 나와 짝의 얼굴을 보더니 다음 날 머리에 큰 리본을 묶어주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선생님이 나 귀엽대’ 하니 다음 날은 두 개를 묶어주셨다. 머리, 옷, 가방으로 리본이 자꾸 늘어났다. 그래서 디자이너가 된 뒤에도 리본은 뭔가 부족하고 불만스런 것을 해결하는 요소가 됐다. 리본은 내게 ‘엄마’이기도 하다.”(윤한희)
“윤은 대학 때 리본이 없으면 학교에 오지 않을 정도로 리본 애호가였다. 정말 그게 예뻐 보였다. ‘나는 얼굴 대신 리본의 큐트함으로 갈 거야’라는 말도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3년 동안 짝사랑했다. 디자이너가 된 강진영은 리본을 크게,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어느 날 TV에서 김희선을 본 순간, ‘김희선을 위해 이 큰 리본을 만들었구나’라는 걸 깨닫고 옷을 보냈다. 그녀가 얼굴보다 큰 리본이 달린 우리 옷을 입고 가요 순위 프로 MC로 나왔다. 김희선이 ‘오브제’의 뮤즈였다.”(강진영)
지금은 여성성의 극대화라고 부를 패션이다.
“지금 ‘퀸마마마켓’ 엠블럼에도 여왕의 왕관이 있다. 나는 귀여운 리본이 아니라 리본의 여성성을 ‘이게 나’라고 알아줄 때까지 밀어붙인다.”(윤한희)
이 모든 영감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나.
“샌프란시스코다. 결혼식을 올리고 24살에서 28살까지 살았다. 그 나이에 경험한 그 도시의 모든 것, 자연, 꽃, 강렬한 색, 히피들의 감각과 철학이 ‘오브제’부터 ‘공원 프로젝트’까지 우리 삶을 관통한다.”
‘오브제’의 성공, 뉴욕에서 ‘하니와이’가 받은 호평, 미국패션그룹협회 신인상 수상, 대기업과의 합병과 결별 등 디자이너로서 창작과 비즈니스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경험한 것 같다. 아쉬운 게 있다면?
“‘하니와이’가 국내에 알려진 것보다 더 뉴욕에서 성공적이었는데, 한국의 비즈니스였던 ‘오브제’ 때문에 더 집중할 수 없었던 것, 그래서 세계의 중심에 아주 가깝게 갔다가 돌아온 것.”
지금 한국 패션에 무엇이 필요할까.
“지금 사람들은 패션이 아니라 컬처를 입는다. 패션에 지불하는 돈이란 특정한 문화에 들어가기 위해 내는 돈이다. 스케이트보드, 힙합, 환경 혹은 공유 같은 문화. 후배들이 남들이 안 하는 걸 극단으로 밀고 갔으면 좋겠다. 패션이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할 때 사회주의의 미덕을 옷으로 보여주든지, 남들이 미니멀할 때 복잡의 극단을 보여주든지. 단, 완전히 자신의 문화여야 한다.”(윤한희)
“지금 대한민국에는 잘하는 패션 디자이너 20명이 아니라 아주 다른 디자이너 2명이 나와줘야 한다.”(강진영)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졌다.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가 된 두 사람의 조언을 듣고 싶다.
“크리에이터로서 우리의 삶을 요약하면 ‘꿈과 도전’이다. 기성세대의 조언, 관습, 예상과 싸워야 한다. 우리도 여전히 ‘이건 안 팔린다’ ‘카페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전문가들과 싸운다. 요즘 젊은이들은 전문가들보다 똑똑하다. 그래서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 점이 아쉽다. 친구들, 우리는 숫자가 아니라 꿈을 봐야 한다고!”
사진 홍태식 디자인 최정미
‘오브제’는 1994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캐릭터 디자이너 브랜드로, 옷가게가 있던 가로수길을 한국 패션의 산소 탱크로 만들었다. ‘오브제’는 이전의 어떤 브랜드와도 달랐고, ‘캐릭터’라는 말 그대로 성깔 좀 있는 옷이었다. 반짝 유행이 아닐까 싶었는데, ‘오브제’는 미국과 중국에서도 잘 팔렸고 대기업에서도 욕심을 냈다. 우여곡절 끝에 SK네트웍스에 ‘오브제’를 매각한 강진영, 윤한희는 긴 여행 후 신사동으로 돌아와 ‘퀸마마마켓’을 열었다.
이제 ‘퀸마마마켓’은 유행을 만드는 핫 플레이스라기보다 특정한 삶의 태도를 지시하는 이름이 됐다. ‘퀸마마마켓’은 가봐야 할 곳으로 검색되지만, SNS라는 신흥 종교 신자들로 뜨거운 여느 ‘핫플’과는 전혀 다르다. 분명한 목적을 갖고 뭔가를 구하는 사람만이 일부러 찾아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소 부수만 찍어낸 책, 반려식물과 모종삽, 지구에 덜 해로운 비누, 그리고 공원 앞 막다른 길이 허락한 정지(Pause).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퀸마마마켓’에 도착한다. 또는 기자처럼 ‘퀸마마’ 윤한희와 남편 강진영을 만나기 위해서.
도시, 공원, 착한 가게를 콘셉트로 한 ‘퀸마마마켓’의 강진영과 윤한희 대표.
“지금 우리가 파는 건 ‘어번’ ‘그린’ ‘라이프스타일’이다. 도시, 공원, 착한 가게가 콘셉트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도시에 살지만 도시인에게 자연이 주는 영감을 제공하고 싶다.”
땅값 비싼 신사동에서 ‘유기 식물’을 분양하고, LP를 팔고, 커피를 3천원에 팔아 얼마나 유지될까 싶었는데 벌써 3년이 넘었다.
“커피는 4천원이 됐지만 여전히 최저가 수준이다. 처음부터 이곳은 물건이 아니라 큰 창문으로 보이는 햇빛과 공원의 매일매일의 변화와 자연의 가치를 파는 곳으로 구상했다. 강남에선 안 될 거라고 했지만 자연의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 즉 우리 소비자가 점점 많아진다. 자신감을 얻어서 서울 강북에 두 개의 ‘퀸마마마켓’을 열 계획이다. ‘공원 프로젝트’라고 할까.”
‘퀸마마마켓’이 문을 열었을 때 패션계가 흥분했다. 패션피플 중 왕년에 강진영, 윤한희의 ‘오브제’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왜 옷을 하지 않나.
“오픈 때 강진영의 옷을 선보였다. 반응이 괜찮았다(사실 언론의 반응은 좋았다). 그런데 ‘괜찮은’ 옷을 하고 싶진 않았다. 꼭 필요한 옷이 나올 때까지 옷을 하지 말자고 했다.”
그동안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코넬대 박사과정에 들어갔다가 패션과 공부에서 탈출해 1년 가까이 여행을 했다. 윤한희는 여행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강진영)
“여행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살았다. 패션을 벗어나면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윤한희)
LP, 예술서적,친환경물품과 커피를 파는 ‘퀸마마마켓’. 일자로 길게 놓인 카페 테이블 앞에선 낮선 이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있고, 친구와 아무 말 없이 앉아있어도 좋다.
“삶이 있었다. 골목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린 대학에서 패션을 공부하지 않았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맞춰야 할 게 없었다. 우리 마음에 와닿는 것만 했다. 그게 사람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엘리트 모범생은, 예를 들면 서울대 나온 학자나 경영자는 인생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는 능하지만 완전히 뒤집진 못할 거다. 나 같은 사람은 직접 부딪쳐서 내가 경험한 것을 믿고 내 삶을 바꾼다.”
지난 인터뷰들을 보면 ‘우리는 386’ ‘아톰 세대’라고 말한다. 어떤 뜻인가.
“우리 세대는 운동권이든 아니든 항상 사회를 생각하도록 키워졌다. 우리는 혜택도 많이 받았다. 그러니 어떻게 기여해야 할지 고민한다. 더구나 우린 아이가 없어서 뭔가 물려줄 것도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바꿀지 생각한다. 지금 삶에 관련된 것들을 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990년대에 한국에서 ‘오브제’가 성공한 건 참 신기하다. 어떤 신호를 받았나.
“옷을 내놓자마자 외제차를 탄 오렌지족들이 수표 뭉치를 들고 왔다. 그리고 패션 기자가 찾아와 옷을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서 백화점 바이어가 입점을 제안했다. ‘오브제’를 넣기 위해 새로운 존(zone)을 만들고 ‘강진영’이라는 디자이너의 캐릭터가 있는 옷이라고 하니 ‘캐릭터 디자이너 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때 뭔가가 달라진 걸 알았다.”
‘오브제’는 화려한 패턴, 리본, 버슬 등 장식이 많아서 ‘공주옷’ ‘무대복’이란 별명도 붙었다.
“어렸을 때 내 짝이 아역 탤런트였다. 얼마나 예뻤겠나. 어느 날 학교에 오신 엄마가 나와 짝의 얼굴을 보더니 다음 날 머리에 큰 리본을 묶어주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선생님이 나 귀엽대’ 하니 다음 날은 두 개를 묶어주셨다. 머리, 옷, 가방으로 리본이 자꾸 늘어났다. 그래서 디자이너가 된 뒤에도 리본은 뭔가 부족하고 불만스런 것을 해결하는 요소가 됐다. 리본은 내게 ‘엄마’이기도 하다.”(윤한희)
“윤은 대학 때 리본이 없으면 학교에 오지 않을 정도로 리본 애호가였다. 정말 그게 예뻐 보였다. ‘나는 얼굴 대신 리본의 큐트함으로 갈 거야’라는 말도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3년 동안 짝사랑했다. 디자이너가 된 강진영은 리본을 크게, 점점 더 크게 만들었다. 어느 날 TV에서 김희선을 본 순간, ‘김희선을 위해 이 큰 리본을 만들었구나’라는 걸 깨닫고 옷을 보냈다. 그녀가 얼굴보다 큰 리본이 달린 우리 옷을 입고 가요 순위 프로 MC로 나왔다. 김희선이 ‘오브제’의 뮤즈였다.”(강진영)
‘오브제’로 한국 패션계의 스타였던 두 사람은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로 세상에 없던 일들을 하는 중이다.
“지금 ‘퀸마마마켓’ 엠블럼에도 여왕의 왕관이 있다. 나는 귀여운 리본이 아니라 리본의 여성성을 ‘이게 나’라고 알아줄 때까지 밀어붙인다.”(윤한희)
이 모든 영감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나.
“샌프란시스코다. 결혼식을 올리고 24살에서 28살까지 살았다. 그 나이에 경험한 그 도시의 모든 것, 자연, 꽃, 강렬한 색, 히피들의 감각과 철학이 ‘오브제’부터 ‘공원 프로젝트’까지 우리 삶을 관통한다.”
‘오브제’의 성공, 뉴욕에서 ‘하니와이’가 받은 호평, 미국패션그룹협회 신인상 수상, 대기업과의 합병과 결별 등 디자이너로서 창작과 비즈니스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경험한 것 같다. 아쉬운 게 있다면?
“‘하니와이’가 국내에 알려진 것보다 더 뉴욕에서 성공적이었는데, 한국의 비즈니스였던 ‘오브제’ 때문에 더 집중할 수 없었던 것, 그래서 세계의 중심에 아주 가깝게 갔다가 돌아온 것.”
지금 한국 패션에 무엇이 필요할까.
“지금 사람들은 패션이 아니라 컬처를 입는다. 패션에 지불하는 돈이란 특정한 문화에 들어가기 위해 내는 돈이다. 스케이트보드, 힙합, 환경 혹은 공유 같은 문화. 후배들이 남들이 안 하는 걸 극단으로 밀고 갔으면 좋겠다. 패션이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할 때 사회주의의 미덕을 옷으로 보여주든지, 남들이 미니멀할 때 복잡의 극단을 보여주든지. 단, 완전히 자신의 문화여야 한다.”(윤한희)
“지금 대한민국에는 잘하는 패션 디자이너 20명이 아니라 아주 다른 디자이너 2명이 나와줘야 한다.”(강진영)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졌다.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터가 된 두 사람의 조언을 듣고 싶다.
“크리에이터로서 우리의 삶을 요약하면 ‘꿈과 도전’이다. 기성세대의 조언, 관습, 예상과 싸워야 한다. 우리도 여전히 ‘이건 안 팔린다’ ‘카페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전문가들과 싸운다. 요즘 젊은이들은 전문가들보다 똑똑하다. 그래서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 점이 아쉽다. 친구들, 우리는 숫자가 아니라 꿈을 봐야 한다고!”
사진 홍태식 디자인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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