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까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르네상스형 인간, 마키아벨리’ 전시가 열렸다. 이 행사의 총괄 큐레이터는 세르지오 메르쿠리 대사의 부인인 파디가 메르쿠리 여사. 두 사람이 마우로 신부의 ‘세계전도’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16세기에 제작된 이 지도는 조선이 서양 세계지도에 처음 등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마키아벨리 전시회 기획한 파디가 메르쿠리 대사부인
두 사람을 처음 만난 곳은 ‘르네상스형 인간, 마키아벨리’ 전시가 열리는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이었다. 훈민정음으로 벽면이 장식된 디지털 도서관의 문을 열자 그 안에 작은 이탈리아가 펼쳐졌다. 그리고 각각 짙은 브라운 컬러 양복과 오렌지색 재킷을 입은 대사 부부가 환한 웃음을 머금고 맞아주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이는 다름 아닌 파디가 메르쿠리 대사부인이다. 볼로냐대에서 고전문헌학을 전공하고, 로마 국립도서관과 바티칸 도서관 등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그에게 르네상스 문화란 공기와 같은 것. 그가 국립중앙도서관을 기획전 장소로 선택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태동하던 시기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시기와 맞물린다. 지구 반대편에서 정확히 같은 시기에 비슷한 흐름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과 이탈리아는 모두 엄청난 문화적 잠재력을 지닌 국가입니다. 전시회 테마로 마키아벨리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한국에는 독재를 옹호한 냉혹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개인의 삶을 (신이 아닌) 개인이 결정한다는 사고를 탄생시킨,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죠.”(메르쿠리 대사)
중세 사람들은 이탈리아를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을 만큼 번성했던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등에 업고, 르네상스라는 문예 부흥 운동을 통해 인간적인 가치를 복원하고, 근대의 여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빼고는 이탈리아를 얘기할 수 없어요. 르네상스를 통해 인간보다 완벽한 존재는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으니까요. 지금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죠.”(파디가 메르쿠리 대사부인)
전시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마키아벨리의 개인적인 면모와 함께 삶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들이 소개됐다. ‘군주론’의 필사본, 그가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로 삼았던 체사레 보르자의 초상, 직접 작곡한 악보, 아들 귀도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다. 여기서 그는 아들에게 ‘공부는 좋은 것이니 많이 배우거라.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려면 음악과 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적었다. 교육열은 시대나 나라를 초월해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숙제인가보다.
“그럼요. 이탈리아 부모들도 한국 부모들처럼 교육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아이를 면밀히 관찰해서 재능이 발현될 수 있도록 돕는 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죠. 그것이 아이를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파디가 메르쿠리 대사부인)
1 한남동 유엔빌리지 꼭대기에 위치한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저. 2 손님을 치르는 대사관저의 거실. 왼쪽 벽에 있는 그림은 ‘9월’ 혹은 ‘가족의 휴일’이라는 제목의 작품. 3 파디가 메르쿠리 여사가 27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산 뒤주. 부부와 함께 세계 여러 곳을 다니다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왔다.
함께 전시장을 둘러본 메르쿠리 대사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외교 관계가 정리된 팸플릿을 펼쳐서는 손으로 짚어가며 양국의 인연을 꼼꼼하게 설명해주었다. 1987년 외교관으로서 처음 발을 디딘 해외 부임지가 한국인 만큼, 애정이 각별한 듯 보였다. 이후 벨기에, 영국, 미국 등을 거쳐 다시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고 한다. 외교관이 한 나라에 두 번 파견되는 것이 흔한 일이냐고 묻자, 파디가 메르쿠리 대사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a piece of luck”이라고 답했다. 27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이들 부부가 처음 서울에 발을 디뎠을 때 이탤리언 레스토랑은 남산에 있는 힐튼호텔 한 군데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서울에만 수백 개의 식당이 성업 중이다. 또한 그 시간에는 오롯이 한 세대가 담긴다. 20대였던 대사 부부는 50대로 접어들었고, 갓난아기였던 아들은 어느덧 성인이 됐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아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낯선 환경에서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됐는데, 한국 분들이 아이를 굉장히 예뻐해주셔서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파디가 메르쿠리 대사부인)
“처음 한국에 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한 세대가 바뀌었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한국은 외형적으로는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열정이나 발전에 대한 의지는 변함없는 것 같습니다. 부지런한 것도 그렇고요.”(메르쿠리 대사)
인터뷰 며칠 후, 이탈리아 대사관저에 다시 초대를 받았다. 메르쿠리 대사는 해외 출장 중이었고, 대사부인이 혼자 맞아주었다.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대사관저는 낮은 2층 양옥 스타일이었다. 한강을 포근하게 품고 있는 마당에선 동백이 붉은 꽃잎을 한껏 틔우고 있었다. 대사부인은 5월이 되면 봄꽃이 만발해 더 아름다울 텐데,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한국의 꽃과 나무, 산을 사랑하는 대사 부부는 틈만 나면 여행을 즐긴다. 먼 거리는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하지만 가끔은 파디가 메르쿠리 대사부인이 소형차 피아트 500(친퀘첸토)을 직접 운전해서 길을 나서기도 한다.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히는 나폴리가 고향인 세르지오 대사는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을 좋아하고, 대사부인은 강원도 산 트레킹에 특히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한 나라를 제대로 보려면 수도뿐 아니라 여러 곳을 다녀봐야 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교통이 불편해 지방 도시들을 다니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3시간이면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어요. 또 직접 운전해서 다니는 것도 좋아하는데, 서울 시내는 주차가 좀 어렵더군요. 친퀘첸토는 어디든 뱀처럼 쏙 들어갈 수 있어서 도심해서 유용하죠.”(파디가 메르쿠리 대사부인)
대사관저는 현관을 중심으로 왼쪽은 연회 등이 열리는 공식적인 공간으로, 이곳의 미술품과 가구들은 거의 대부분 이탈리아 정부 소유다. 반면 사적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살림들은 주로 대사 부부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들로, 외교관으로서의 여정이 엿보였다. 이 가운데 파디가 메르쿠리 여사는 특히 테이블 겸 장식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뒤주를 아낀다고 했다. 27년 전 한국에 왔을 때 샀던 것인데, 부부의 부임지마다 함께하다가 마침내 고향인 한국에 다시 오게 됐다는 것이다. 그 외에 메르쿠리 대사부인이 벨기에와 영국 등에서 사 모은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이탈리아 전통 가구들, 그리고 한국의 고가구들은 마치 한 장인의 손을 거친 작품들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다. 안주인의 안목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한국의 고가구와 클래식한 이탈리아 수납장, 주로 배에서 쓰였던 영국의 책상(왼쪽부터) 등이 한 브랜드의 제품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이탈리아적이라는 것은 오래 지속되는 가치를 존중하는 것
세르지오 대사와 스물세 살에 웨딩마치를 울린 메르쿠리 여사는 결혼 후 인생의 반은 학자로, 반은 외교관의 아내로 살았다. 상황에 따라 한쪽의 비중이 커지거나 작아지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든 즐겁고 보람된 일이다. 남자들이 결혼했다고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여성도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이들에게는 노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결혼해서 살다 보면 육아 문제 등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수 있지만 가족 구성원의 협력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어요.”
요즘 한국에서는 이탈리아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백화점에 이탈리아 토털 라이프스타일을 표방한 편집 매장이 생기고, 브랜드명을 앞세우던 명품들도 이름 앞에 ‘이탤리언 프리미엄’이라는 수식어를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렌치 시크’나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이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이탈리아 스타일은 브랜드 각각의 개성이 더 부각됐던 것이 사실. 이탈리아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탈리아 하면 패션과 명품을 많이 떠올리는 것 같아요. 패션의 어원은 이탈리아어로 ‘지금, 현재’, 영어로는 ‘마법’이에요. 그러니까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의미죠. 이탈리아적이라는 것은 그 패션을 뛰어넘는 클래식한 스타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금방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의 가치를 찾는 것이죠. 이탈리아는 그 비밀을 아는데, 다른 나라는 모르는 것 같더군요(웃음).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들이 사랑받는 것도, 이런 개념에 충실하기 때문이죠.”
고문헌 속 단어를 단서로 텍스트를 재구성해내는 학자답게,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은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빚어낸 것처럼 깊이가 느껴졌다. 명품의 나라에서 온 그도 한국 여성들의 감각에는 감탄해 마지 않는다. 한글을 패션에 접목시킨 이상봉이나 앤디앤뎁의 재기발랄한 디자인도 좋아한다.
“한국 여성들은 패션의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고, 어떤 의상도 잘 소화해내는 것 같아요. 또 최근에는 과감한 컬러나 디자인에 도전하는 여성들도 많아졌고요. 외적인 바탕이 잘 갖춰진 데다, 패션에 대한 관심이 많은 덕분인 것 같아요.”
이처럼 외모나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점에서 한국과 이탈리아인은 닮은 면이 많다고 한다.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대화할 때 손을 많이 쓰는 것도 마찬가지. 이 모든 점 때문에 그는 때때로 한국이 고향처럼 편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이탈리아 여행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대사관저의 문을 나서는 길, 가까이 지내며 더 알고 싶고 파고들수록 매력적인 친구 같은 이탈리아가 마음속으로 훅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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