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청춘들이 모여 숨 쉬는 곳, 꿈을 가졌다면 누구나 열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곳, 여기가 바로 대학로다. 기자가 그 시끌벅적한 대학로의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장소는 동숭아트센터 뒤편의 연습실. 빠른 드럼 비트에 전자 기타 사운드, 괴성에 가까운 노래로 가득 찬 그곳에서 한 헤비메탈 밴드가 연습 중이었는데, 멤버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아저씨들이다. 친구 사이 같은데 뭐가 잘 맞지 않는지 언성을 높이면서 감정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 밴드의 이름은 ‘핵폭발’. 젊은 시절에 만나 세상과 맞짱을 떠보겠다는 과한 열망으로 음반을 발매했으나 판매 부적격 판정을 받고, 저항 음악으로 회자되며 해체됐던 그룹이다. 그 뒤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30년이 흐른 지금, 재결성하게 됐지만,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 제대로 된 연습은커녕 서로 싸우기 바쁘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가 갑자기 언제 그랬느냐는 듯 호탕하게 웃어대는 그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자세히 보니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목청을 높이던 보컬리스트는 바로 배우 손병호(52)였다. 연극 ‘내 심장의 전성기’ 연습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것.
늘 무대가 그리웠다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오는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로, 관객에게 ‘당신 심장이 뛰던 전성기는 언제였느냐’는 화두를 던지며 가족과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주인공은 모두 386세대로 현재 50대의 대한민국 가장들이다. 주인공 최광현 역의 손병호는 실제 386세대이자 두 딸의 아빠, 그리고 가장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최광현의 나이라서 50대 가장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운을 뗐다.
“사실 제 경우에는 결혼을 늦게 해 아직 딸들이 어려 여러 가지로 바빠요. 하지만 친구들은,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더 이상 아빠를 찾지 않죠. 집에 가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끼리 만나 술 한잔 기울일 때가 많은데, 덕분에 50대 가장들이 느끼는 공허함을 누구보다 잘 알죠.”
또한 그는 극 중 최광현처럼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젊은 날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든 그 시절 때문에 돌고 돌아 다시 연극 무대에 섰다는 것.
“극단에서 연극할 때가 심장이 가장 두근두근했던 전성기였죠. 밤새 술을 마시며 연기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거든요.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흥분되고, 배우로서 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때 제 가슴이 얼마나 쿵쾅쿵쾅 뛰었는지 몰라요.”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인 손병호는 대학로에서 두각을 드러낸 뒤 1999년 송일곤 감독의 영화 ‘소풍’을 통해 영화계에 정식 데뷔했다. 이후로는 영화 ‘파이란’ ‘야수’ ‘알포인트’, 드라마 ‘바람의 나라’ ‘불한당’ ‘하얀거탑’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럼에도 그는 1990년에 공연한 연극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이하 ‘심청이는…’)를 아직도 잊지 못할 작품으로 꼽는다. 그 작품으로 ‘손병호’라는 이름 석 자를 대학로에 알렸기 때문이다. 그는 연극 ‘심청이는…’에서 취객을 연기했는데, 어찌나 사실적으로 그렸는지 “진짜로 술 마시고 연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이런 소문을 들은 연극계 선후배들은 그의 연기를 보려고 극장을 찾기도 했다.
“정말 심장이 두근거렸죠. 배우로서 드디어 인정받는구나 싶었고, 생애 처음 신문에 인터뷰 기사도 실렸어요. 그 작품을 통해 주위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축하해주고, ‘잘한다’고 이야기까지 해줬어요. 배우로서 그 순간만큼 행복할 때가 또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늘 무대가 그리운가 봐요. 무대에 서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내가 배우라는 느낌, 이 무대는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무대가 끝난 뒤 들려오는 박수 소리…. 그걸 위해서 땀 흘리며 노력하고, 죽기 살기로 몸을 던질 수 있죠.”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결혼하고 두 딸이 생기면서 경제적인 이유로, 감정이 끌리는 작품보다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작품을 선택하는 횟수가 많아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그럴수록 ‘무대’에 대한 갈망은 커졌고, 그 갈망이 결국 그를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렇게 지난해 8월 따뜻한 가족애를 다뤄 호평받은 연극 ‘8월의 축제’로 8년 만에 무대에 선 후, 이번 작품에 연이어 출연했다.
“‘내 심장의 전성기’는 관객들이 얻어갈 수 있는 게 무척 많은 작품이에요. 저도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거든요. ‘나는 내 딸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을까’ 고민해보죠. 관객 역시 가족에게 ‘내가 잘 하고 있을까, 내 심장이 뛰는 전성기에 난 뭘 하고 있었을까’ 등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겁니다. 여기에 작품을 전체적으로 감싼 게 음악이에요. 음악이 주는 감동과 힘은 위대하죠.”
그의 최근 작품들의 주제는 가족과 연관이 깊다. 3월 20일 개봉한 영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도 아버지 역을 맡아 가족애를 보여줬다. 작품마다 가족과 관련된 주제를 택하는 걸 보면 그의 가족 사랑이 남다른 걸까? 작품 선택의 기준이 혹시 ‘가족’이 아닐까?
“결국 저도 ‘아비’니까요. 하지만 작품 선택의 기준이 꼭 가족은 아니에요. 영화나 드라마, 연극 모두 가장 먼저 시나리오와 대본을 봐요. 이런 드라마틱한 연극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는데, 지난해 했던 연극 ‘8월의 축제’ 때부터 이번 작품까지 집필한 이시원 작가의 글에 마음 짠한 무언가가 있더라고요. 따뜻하기도 하고, 감춰진 감정들을 들춰내는 소중한 자극이 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그에게 두 딸 지오(12)와 지아(6)는 삶의 존재 이유다.
“첫째가 태어나니 일을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둘째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자식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제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몰라요. 자식들은 제가 주저하고 있을 때 저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죠. ‘일어나 아빠!’라고 하면서요.”
아내 최지연 씨 역시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손병호가 앞에서 끌면 아내는 뒤에서 밀어주고, 아이들은 이들 부부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전도유망한 무용수였던 최지연 씨는 가난했던 연극배우에게 시집와 경제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부는 1993년 최씨가 속한 창작무용회(창무회)와 손병호가 소속된 극단이 함께 공연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순조로운 출발은 아니었다. 모든 공연을 끝내고 가진 뒤풀이 장소에서 손병호가 술에 취해 1시간 동안 최씨에게 화를 낸 것. 아침에 술이 깬 뒤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 공연을 같이해보지 않겠느냐”는 것. 손병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렇게 서로를 알아간 둘은 연인이 됐다. 두 사람은 8년 동안 연애를 했지만 돈이 없던 손병호는 쉽게 결혼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 택한 게 동거. 2년의 동거 후 두 사람은 2001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뤘는데, 아이가 없으니 가족은 이루지 못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이를 가지려 온갖 노력을 했더니 우리 지오가 생겼죠.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 큰일을 겪으면서 형제가 있어야 위로가 되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둘째도 낳았고요. 원래 셋째까지 낳을 계획이었는데, 이제 아내도 나이가 있다 보니 더 이상은 무리가 아닐까 싶네요.”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뒤돌아보니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 손병호에게는 아이들과 아내가 잠들면 새벽 시간을 혼자 즐기는 습관이 생겼다.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이 때문에 매일 늦잠을 자서 아이들 얼굴 보는 시간이 줄었다. 그래서 자신을 “50점짜리 아빠”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말에 무조건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좋은 아빠다.
제2의 전성기는 지금부터
최근 그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은 북한산이 보이는 주택으로 이사한 것이다. 최근 방송에서 공개된 그의 평창동 주택은 넓은 거실과 높은 천장, 앤티크와 모던함이 조화를 이룬 실내 인테리어, 그리고 북한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까지 갖추고 있다. 그는 이 집을 사기까지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저는 평창동이 좋아요. 서울에 이렇게 자연이 가까이 있고, 가재가 살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 또 어디 있겠어요. 처음 지오를 낳자마자, 평창동에 살기 위해 집을 알아봤는데 10억원이 넘더라고요. 그때 제 손에 있는 건 1억~2억원이 전부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일단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빌라에서 살다가 10년 만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게 된 거예요. 역시 사람은 꿈을 꿔야 해요. 평창동 주택에서 사는 꿈을 꾸니, 결국 살고 있잖아요(웃음).”
그러나 큰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난 후, 크게 깨달은 점이 있다. 커다란 집에서 그가 머무는 공간은 늘 정해져 있기에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그곳을 채우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이제부터는 큰 집 구석구석을 빛나게 해줄 가족이나 친구 등 사람들이 와글거렸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아이도 많이 컸고, 아내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쉴 수 있는 좋은 집도 마련한 그는 이제부터 자신의 꿈을 위해 달리고 싶다고 했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기 싫은 역할도 해왔어요. ‘아비’라서 한 거죠. 하지만 그런 선택들이 배우 손병호를 황폐하게 만들어요. 저도 배우이기 때문에 아무 역할이나 하고 싶지 않고, 좋은 역할을 하고 싶거든요. 그런 마음 때문에 다시 연극도 하는 거죠.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으니까요.”
영화 출연만 하는 다른 동료들을 보며 왜 자신은 TV에 나와서 예능인처럼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우 송강호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손병호 역시 가슴속 깊은 곳에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배우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배우로서의 손병호를 보여드릴 겁니다. 제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전성기 그때처럼, 배우로서 인정받고 스스로를 우뚝 내세우면서 정상에 한번 서보고 싶어요. 손병호 제2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이 밴드의 이름은 ‘핵폭발’. 젊은 시절에 만나 세상과 맞짱을 떠보겠다는 과한 열망으로 음반을 발매했으나 판매 부적격 판정을 받고, 저항 음악으로 회자되며 해체됐던 그룹이다. 그 뒤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다가 30년이 흐른 지금, 재결성하게 됐지만,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아 제대로 된 연습은커녕 서로 싸우기 바쁘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가 갑자기 언제 그랬느냐는 듯 호탕하게 웃어대는 그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던 것도 잠시! 자세히 보니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목청을 높이던 보컬리스트는 바로 배우 손병호(52)였다. 연극 ‘내 심장의 전성기’ 연습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것.
늘 무대가 그리웠다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오는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로, 관객에게 ‘당신 심장이 뛰던 전성기는 언제였느냐’는 화두를 던지며 가족과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주인공은 모두 386세대로 현재 50대의 대한민국 가장들이다. 주인공 최광현 역의 손병호는 실제 386세대이자 두 딸의 아빠, 그리고 가장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최광현의 나이라서 50대 가장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운을 뗐다.
“사실 제 경우에는 결혼을 늦게 해 아직 딸들이 어려 여러 가지로 바빠요. 하지만 친구들은,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더 이상 아빠를 찾지 않죠. 집에 가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끼리 만나 술 한잔 기울일 때가 많은데, 덕분에 50대 가장들이 느끼는 공허함을 누구보다 잘 알죠.”
손병호가 연기하는 최광현은 386세대로 현 50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극단에서 연극할 때가 심장이 가장 두근두근했던 전성기였죠. 밤새 술을 마시며 연기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던 그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거든요.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흥분되고, 배우로서 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때 제 가슴이 얼마나 쿵쾅쿵쾅 뛰었는지 몰라요.”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인 손병호는 대학로에서 두각을 드러낸 뒤 1999년 송일곤 감독의 영화 ‘소풍’을 통해 영화계에 정식 데뷔했다. 이후로는 영화 ‘파이란’ ‘야수’ ‘알포인트’, 드라마 ‘바람의 나라’ ‘불한당’ ‘하얀거탑’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럼에도 그는 1990년에 공연한 연극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이하 ‘심청이는…’)를 아직도 잊지 못할 작품으로 꼽는다. 그 작품으로 ‘손병호’라는 이름 석 자를 대학로에 알렸기 때문이다. 그는 연극 ‘심청이는…’에서 취객을 연기했는데, 어찌나 사실적으로 그렸는지 “진짜로 술 마시고 연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았다. 이런 소문을 들은 연극계 선후배들은 그의 연기를 보려고 극장을 찾기도 했다.
“정말 심장이 두근거렸죠. 배우로서 드디어 인정받는구나 싶었고, 생애 처음 신문에 인터뷰 기사도 실렸어요. 그 작품을 통해 주위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축하해주고, ‘잘한다’고 이야기까지 해줬어요. 배우로서 그 순간만큼 행복할 때가 또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늘 무대가 그리운가 봐요. 무대에 서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내가 배우라는 느낌, 이 무대는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무대가 끝난 뒤 들려오는 박수 소리…. 그걸 위해서 땀 흘리며 노력하고, 죽기 살기로 몸을 던질 수 있죠.”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결혼하고 두 딸이 생기면서 경제적인 이유로, 감정이 끌리는 작품보다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작품을 선택하는 횟수가 많아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그럴수록 ‘무대’에 대한 갈망은 커졌고, 그 갈망이 결국 그를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렇게 지난해 8월 따뜻한 가족애를 다뤄 호평받은 연극 ‘8월의 축제’로 8년 만에 무대에 선 후, 이번 작품에 연이어 출연했다.
“‘내 심장의 전성기’는 관객들이 얻어갈 수 있는 게 무척 많은 작품이에요. 저도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거든요. ‘나는 내 딸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을까’ 고민해보죠. 관객 역시 가족에게 ‘내가 잘 하고 있을까, 내 심장이 뛰는 전성기에 난 뭘 하고 있었을까’ 등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겁니다. 여기에 작품을 전체적으로 감싼 게 음악이에요. 음악이 주는 감동과 힘은 위대하죠.”
그의 최근 작품들의 주제는 가족과 연관이 깊다. 3월 20일 개봉한 영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도 아버지 역을 맡아 가족애를 보여줬다. 작품마다 가족과 관련된 주제를 택하는 걸 보면 그의 가족 사랑이 남다른 걸까? 작품 선택의 기준이 혹시 ‘가족’이 아닐까?
“결국 저도 ‘아비’니까요. 하지만 작품 선택의 기준이 꼭 가족은 아니에요. 영화나 드라마, 연극 모두 가장 먼저 시나리오와 대본을 봐요. 이런 드라마틱한 연극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는데, 지난해 했던 연극 ‘8월의 축제’ 때부터 이번 작품까지 집필한 이시원 작가의 글에 마음 짠한 무언가가 있더라고요. 따뜻하기도 하고, 감춰진 감정들을 들춰내는 소중한 자극이 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그에게 두 딸 지오(12)와 지아(6)는 삶의 존재 이유다.
“첫째가 태어나니 일을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둘째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자식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제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몰라요. 자식들은 제가 주저하고 있을 때 저를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죠. ‘일어나 아빠!’라고 하면서요.”
아내 최지연 씨 역시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손병호가 앞에서 끌면 아내는 뒤에서 밀어주고, 아이들은 이들 부부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전도유망한 무용수였던 최지연 씨는 가난했던 연극배우에게 시집와 경제적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부는 1993년 최씨가 속한 창작무용회(창무회)와 손병호가 소속된 극단이 함께 공연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순조로운 출발은 아니었다. 모든 공연을 끝내고 가진 뒤풀이 장소에서 손병호가 술에 취해 1시간 동안 최씨에게 화를 낸 것. 아침에 술이 깬 뒤 엄청난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 공연을 같이해보지 않겠느냐”는 것. 손병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렇게 서로를 알아간 둘은 연인이 됐다. 두 사람은 8년 동안 연애를 했지만 돈이 없던 손병호는 쉽게 결혼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 택한 게 동거. 2년의 동거 후 두 사람은 2001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뤘는데, 아이가 없으니 가족은 이루지 못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이를 가지려 온갖 노력을 했더니 우리 지오가 생겼죠.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 큰일을 겪으면서 형제가 있어야 위로가 되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둘째도 낳았고요. 원래 셋째까지 낳을 계획이었는데, 이제 아내도 나이가 있다 보니 더 이상은 무리가 아닐까 싶네요.”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뒤돌아보니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 손병호에게는 아이들과 아내가 잠들면 새벽 시간을 혼자 즐기는 습관이 생겼다.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이 때문에 매일 늦잠을 자서 아이들 얼굴 보는 시간이 줄었다. 그래서 자신을 “50점짜리 아빠”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말에 무조건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좋은 아빠다.
제2의 전성기는 지금부터
최근 그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은 북한산이 보이는 주택으로 이사한 것이다. 최근 방송에서 공개된 그의 평창동 주택은 넓은 거실과 높은 천장, 앤티크와 모던함이 조화를 이룬 실내 인테리어, 그리고 북한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까지 갖추고 있다. 그는 이 집을 사기까지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저는 평창동이 좋아요. 서울에 이렇게 자연이 가까이 있고, 가재가 살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 또 어디 있겠어요. 처음 지오를 낳자마자, 평창동에 살기 위해 집을 알아봤는데 10억원이 넘더라고요. 그때 제 손에 있는 건 1억~2억원이 전부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일단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빌라에서 살다가 10년 만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게 된 거예요. 역시 사람은 꿈을 꿔야 해요. 평창동 주택에서 사는 꿈을 꾸니, 결국 살고 있잖아요(웃음).”
그러나 큰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난 후, 크게 깨달은 점이 있다. 커다란 집에서 그가 머무는 공간은 늘 정해져 있기에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그곳을 채우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이제부터는 큰 집 구석구석을 빛나게 해줄 가족이나 친구 등 사람들이 와글거렸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아이도 많이 컸고, 아내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쉴 수 있는 좋은 집도 마련한 그는 이제부터 자신의 꿈을 위해 달리고 싶다고 했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기 싫은 역할도 해왔어요. ‘아비’라서 한 거죠. 하지만 그런 선택들이 배우 손병호를 황폐하게 만들어요. 저도 배우이기 때문에 아무 역할이나 하고 싶지 않고, 좋은 역할을 하고 싶거든요. 그런 마음 때문에 다시 연극도 하는 거죠.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으니까요.”
영화 출연만 하는 다른 동료들을 보며 왜 자신은 TV에 나와서 예능인처럼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우 송강호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손병호 역시 가슴속 깊은 곳에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배우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는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배우로서의 손병호를 보여드릴 겁니다. 제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전성기 그때처럼, 배우로서 인정받고 스스로를 우뚝 내세우면서 정상에 한번 서보고 싶어요. 손병호 제2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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