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작가의 아들인 초신성 멤버 박건일.
청소년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교실(1994~96)’, ‘스타트(1996~97)’, 어린이 드라마 ‘요정 컴미(2000)’ 등 그가 쓴 작품에선 인간미가 묻어난다. 이번 드라마 ‘루비 반지’는 그가 드라마 ‘순옥이(2006~2007)’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작품. 그간 어떻게 지냈는가 물으니 “강의하는 게 즐거워 꾸준히 수업하면서 작품을 준비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구상한 작품이에요. 극 중 자매 간의 ‘페이스 오프’가 나오는데 드라마로 풀었을 때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었죠. 실제로 일본에서 범죄자가 얼굴을 성형하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사고가 난 두 사람을 양쪽 부모가 못 알아봐서 장례까지 치른 사연이 방송된 적이 있거든요. ‘성형 왕국’ 이야기가 나오는 지금쯤이라면 이 설정이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싶었죠.”
인물에 공감하지 못하면 글 못 써
작품은 성격과 외모 등 모든 것이 다른 이란성 쌍둥이 정루비·루나 자매가 사고로 얼굴이 뒤바뀌며 전개되는 운명을 그린다. 이런 설정 때문에 루비 역인 이소연은 현재 (남들은 루비로 알고 있는) 루나를, 루나 역이던 임정은은 반대로 (루나의 얼굴을 한) 루비 역을 연기 중이다. 언니 루비(이소연)와 차를 타고 가던 루나(임정은)는 사고로 언니가 기억상실에 걸리자, 성형 수술을 통해 언니의 얼굴로 탈바꿈하고 언니 행세를 한다. 사랑받고 자라 선하고 밝은 언니 루비와 달리 동생 루나는 악행을 자행하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루비의 얼굴을 한 루나(이소연)는 루비를 좋아하던 배경민(김석훈)과 결혼까지 하지만, 최근 방송분에서는 경민이 루비(임정은)에게 끌리며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루비는 세상에 영원하고 열정적인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런 사랑을 추구하는 여자예요. 반면 루나는 이 세상에 사랑 따윈 없고, 모든 것은 비즈니스라고 믿는 여자죠. 어릴 때부터 받은 상처로 피해 의식도 있고, 열등감도 있어 잘난 언니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어해요. 주변 인물 개개인에게도 비밀이 있는데 그걸 하나씩 벗겨내는 과정에서 시청자가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남의 비밀 벗기는 것처럼 재밌는 게 어디 있겠어요?(웃음)”
그간 주인공이 일인이역을 하는 드라마는 많았지만 두 사람이 각각 두 역을 하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배우 간 연기 호흡은 물론이고 시청자를 납득시킬 연기력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처음엔 걱정했어요. 연기도 중요하지만 외모도 비슷하면 좋겠고, 키도 맞으면 좋겠고…. 그런데 모든 걸 충족하기는 어렵더라고요. 외모는 당연히 차이가 있지만 키도 차이가 커서 방영 초에는 ‘아무리 성형 기술이 좋아도 저 정도로 바뀌느냐’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예전에 살집이 있는 30대 후반 ~ 40대 초반 아주머니가 주인공인 단막극을 썼을 때는 그런 몸집의 배우를 찾다 찾다 감독이 ‘작가님이 직접 하셔야겠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죠. 결국 가수 방실이 씨가 그 역을 연기했어요. 이렇듯 모든 조건을 이상적으로 맞춰가며 캐스팅하는 건 쉽지 않아요.”
제목인 ‘루비 반지’는 교통사고 전 루비가 경민으로부터 받은 약혼 선물이기도 하다. 결혼 예물로 주로 쓰이는 다이아몬드 반지 대신 루비 반지를 고른 이유가 궁금했다.
“‘루비’는 붉은빛이 나는 보석으로 영원한 열정이라는 뜻을 가졌어요. 예전에는 결혼 예물로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루비 반지를 많이 선물했다고 해요. 두 사람의 사랑과 루비 반지에 얽힌 사연, 루비 반지 앞에서 한 맹세 등 여러 의미를 담아 지은 제목이죠.”
이 작품은 MBC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출연진이 앉아 속마음을 말하는 일명 ‘검은 방’ 장면을 도입해 눈길을 끈다. 실제로 1화에서 루나(이소연)는 검은 방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연 루나가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드는 이 대목은 전산 PD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감독님이 루나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장면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시청자에게 인물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건 내레이션이나 자막이 있을 수 있겠지만, 너무 진부했죠. 전체적으로 봤을 때도 그런 장치가 어울리지 않았고요. 그러다 하나의 공간, 검은 방을 만들어 거기에서 루나의 이야기를 듣는 실체가 누군지 궁금하게 만들었어요. 교회 목사일 수도 있고, 정신과 의사나 교도소 간수 등 여러 갈래로 생각할 수 있겠죠. 아직 어떤 사람으로 할지는 미지수예요.”
80부작에서 95부작으로 늘어나면서 이야기에 변화는 없을까. “사실 연장될 줄 알았다”며 웃던 그는 “엔딩은 두세 가지로 잡아놨는데, 최종적으로 어떤 엔딩으로 갈지는 흐름을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만일 해피 엔딩으로 끝난대도 그간 루나가 저지른 악행을 보건대 최후의 순간 구원받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루나의 옛 애인 나인수(박광현)는 벌써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던가.
“물론 루나의 행동이 너무 지나친 감은 있지만, 내면의 욕구나 욕망을 충분히 이해해요. 착했던 루비가 가진 걸 빼앗긴 후에 변하는 것도 이해하고요. 작가가 대본을 완성할 때 작품 속 인물에 빠져서 그 캐릭터를 이해해야 쓰기가 편해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건 힘든 일이죠. 그래서 슬픈 장면을 쓸 땐 울상 짓고, 악쓰며 대립하는 장면을 쓸 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어요. 아이들은 제가 글 쓰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재밌대요(웃음). 그만큼 캐릭터에 빠져들기 전에는 쉽지 않은 작업이에요.”
글쓰기 가르쳐준 40년 전 김성수 선생님
“원래 글을 몰아 쓰는 편”이라는 황 작가는 “지금처럼 일일극을 쓸 때는 그럴 수 없으니 일정을 짜놓고 그대로 움직인다”고 했다. 그는 오전 9시 반쯤 집에서 나와 작업실로 출근해 본방송이 끝나는 오후 8시 반까지 꼼짝 않고 대본을 쓴다. 식사는 시키거나 해 먹지 않으면 근처 식당에서 해결한다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오후 9시가 된다. 댓글은 도움 되는 의견도 있지만 무작정 인신공격을 하거나 제작 환경을 모른 채 무조건 비난하는 내용이 많아 잘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마음이 여린 편이라 주변 이야기를 들으면 많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예전부터 글이 안 써지면 그날은 접는 날이었어요. 글이 안 써지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정말 안 써지면 다음 날 밤을 새울지언정 과감히 접어요. 안 써진다고 앉아 있기만 하면 글도 안 나오고 스트레스만 쌓이더라고요.”
과거로 돌아가도 ‘작가’를 택할 거라는 황 작가.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끈 건 초등학교 때 만난 선생님이었다. 강원도 영월 출신인 그는 사북읍의 고한초등학교로 전학 가 6학년 때 만난 선생님의 특별한 교육법 덕에 ‘글 쓰는 재미’를 깨쳤다.
“김성수 선생님. 벌써 40년이 더 됐지만 지금도 성함이 기억나요. 당시 우리 반 담임도 아니고 옆 반 선생님이었는데, 세 반 학생 중 몇몇을 뽑아다 방과 후 책 한 권씩 주면서 독후감을 쓰게 하셨어요. 시, 산문 쓰는 법도 가르쳐주셨고요. 그렇게 쓴 글을 모아서 6학년 때 문집도 내고, 다방에서 시화전도 열었어요. 주말이면 7~8명씩 데리고 돌아다니며 ‘안개를 보고 느낀 점을 써봐라’ 하시며 과제를 내줬는데 그 덕에 글 쓰고 책 읽는 재미를 알았죠.”
선생님은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하루는 수업 중에 ‘순영아, 잠깐 복도로 나와봐’ 하더니 가족계획협회에서 주관한 ‘아이 덜 낳기 운동’ 관련 산문을 쓰라고 하시더라고요. 한 시간 동안 썼는데, 아직도 첫 문장을 기억해요. ‘우리 옆집은 매일 밤 호떡집에 불난 듯이 싸운다.’ 식구가 많으면 좋지 않다는 내용이었죠. 그 글이 최고상을 받았어요. 그때 선생님이 ‘내가 보기엔 넌 소설을 써야 한다’고 말해주셨어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 와서는 영화가 너무 좋아 평론가가 되겠다며 학교 땡땡이치고 영화 보러 돌아다녔어요. 그때 영화를 본 날짜, 주연 배우, 감독, 줄거리, 감상까지 짤막하게 메모한 노트가 한가득이었어요. 지금도 가지고 있다면 정말 좋은 자료가 될 텐데…. 학창 시절에는 말 그대로 ‘불량소녀’였지만, 인생에서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자양분을 비율로 꼽자면 그때의 경험이 50%는 될 것 같아요. 선생님은 자극을 주셨고, 많은 영화와 공연은 드라마적인 시나리오에 눈을 돌리게 해줬으니까요.”
아이돌 아들과 방목형 엄마
‘루비 반지’에 출연 중인 김석훈과 이소연, 임정은과 박광현.
“건일이는 어릴 때부터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많이 들었어요. 아빠가 총각 때 잘생겼었거든요. 인물 하나에 반해서 결혼했는데…(웃음). 어린이 드라마 ‘요정 컴미’를 쓸 때 장근석 씨가 출연해거든요. 당시 건일이의 방학 숙제가 ‘앞으로 촉망받는 직업 조사하기’였는데, 탤런트가 촉망받는 직업 같았는지 또래인 장근석 씨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해서 전화를 걸었죠. 당시 근석 씨가 SBS에서 시트콤을 찍을 때라 둘이 방송국에서 만나게 해주었는데, 저녁에 아들이 집에 와서는 ‘어떤 사람이 연예인을 해보라며 명함을 줬다’는 거예요. ‘어떻게 할래’ 물으니 해보고 싶다고 해서 ‘그래, 그럼 해봐. 대신 엄마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죠. 도와줄 생각도 없었고요. 아들은 간간이 잡지 모델, 영화·CF 단역을 하다 음반 기획사 김광수 사장으로부터 아이돌로 데뷔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당시 아이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했다고. 그는 “김광수 사장이 ‘좋은 재목이니 책임지고 잘 키워보겠다’며 숙소에서 영어부터 중국어까지 다 가르쳐준다기에 아들더러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초신성은 지금 코어콘텐츠에서 마루기획으로 이적한 상태다. 그는 “계약이 내년까지인데, 아들이 가수 활동을 이어갈지 원래 꿈이던 연기자의 길을 걸을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제가 건일이 엄마인 것을 다들 몰랐어요. 아들더러 어디 가서 오해 살 수 있으니 누가 물으면 ‘엄마는 주부, 아빠는 회사원’이라고 말하라고 했죠. 우리 가족 스타일은 ‘따로 또 같이’예요. 살아보니 그게 맞더라고요. 아이들도 독립적으로 키우고 방목하는 스타일이었죠. 간섭하지 않되 믿어주는 것. 교회 가서도 아이들한테 딱 잘라서 ‘너 자신을 위해 기도해라. 네가 잘돼서 행복하면 엄마는 저절로 행복해진다’고 말해주죠.”
황 작가는 “인생에 정답은 없다”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고 조언했다.
“아이나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도 있고 저 같은 사람도 있지만,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의 순위나 뭔가를 하고 얻는 보람의 정도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잖아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만 아니라면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 좋겠어요.”
아직 ‘루비 반지’를 통해 보여줄 이야기가 많다는 황 작가. 그는 내년 1월 장기 레이스를 마치고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뭔지 묻자 “작품 쓰는 동안 미국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가보질 못했다. 끝나면 묘소부터 찾아뵐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 이런저런 계획이 있지만 끝나봐야 알 것 같다”며 웃었다.
■ 장소협찬·카페노베(031-901-0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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