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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쓰고 노래하고 연기하다

‘상남자’ 김영호 감성 인터뷰

글·진혜린 | 사진·IMX 제공

2013. 12. 17

김영호는 배우 외의 직함이 여러 개다. 시인, 작가, 가수, 사진작가까지. 욕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좋은 게 많았다.

쓰고 노래하고 연기하다
김영호(47)의 노래 ‘그대를 보낸다’를 듣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칠 뻔했다. 올 3월 절친한 김태원(부활)이 만들고 그가 불러 미니 앨범까지 냈던 노래다. 봄에 나온 노래건만 가을의 깊이를 진하게 만들었다. 약속 시간 15분 전, 먼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전철역에서부터 단숨에 뛰어갔다. 숨도 돌리기 전에 그에게 이어폰을 건네주며 “노래가 너무 좋다”고 했더니 나지막이 자신의 노래 한 소절을 따라 부른다. 숨소리는 잦아들고, 도시의 소음은 사라진다. 카페에 그와 마주 앉은 그 시간, 감성에 감성을 더해 김영호에게 젖어들고 있었다.

# 감성 1 난 생각 없이 산다

김영호의 얼굴에는 수만 가지의 느낌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야비해질 수도, 가장 불쌍해질 수도 있는 사람. 배우 김영호가 지금껏 선사했던 반전이라는 선물이다. MBC 월화드라마 ‘기황후’에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지금까지 그가 사극에서 맡았던 역들이 쉽게 오버랩 됐다. 가깝게는 ‘인수대비’의 수양대군, 멀게는 ‘장길산’의 행수와 닮은 느낌. 그런데 보면 볼수록 또 다른 맛이 난다.

“처음에 작가님이 어려울 거래요. 당대 최고의 몽골 장군. 아주 멋진 장군인데, 약간 허당이라고(웃음). 그런데 대본을 받는 순간 너무 웃긴 거예요. 멋있게 칼을 휘두르며 멋진 대사를 하다가 비굴하게 ‘한 번만 살려주라’고 해야 하니까, 캐릭터 잡기가 쉽지는 않죠.”

김영호라서 가능한 배역. 코믹과 카리스마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물이 탄생하기까지 배우가 갖는 고민의 깊이도 다를 법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그런데 제가 생각이 없어요. 무엇을 하고 있든 지금 하는 거만 해결하면 그걸로 좋은 거예요. 그 다음 생각이 없어요. 지금도 인터뷰에만 집중하고 다른 생각이 없거든요.”

미리 앞서서 걱정하고 고민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걱정은 좀 있어요. 뮤지컬 ‘폭풍의 언덕’ 공연이 12월 13일부터 시작되는데, 일주일에 6일을 ‘기황후’ 촬영을 해야 해서 연습을 언제 하나 걱정이 되긴 해요(웃음). 세월이 지나면 다 되게 돼 있어요. 안 되면 욕먹어야죠, 뭐.”

아쉬움은 없을까? 없단다. 후회는 없을까? 없단다. 욕심도, 애달픈 것도, 간절히 원하는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집착도, 미련도, 미움도, 갈등도, 물어보는 것 마다 ‘없다’고만 했다. 이 남자 왜 이럴까.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연기 경력 17년차에 이르렀으면 인생도 연기도 내공이 켜켜이 쌓여 어른 행세를 해도 될 법한데, 도리어 ‘생각 없는 남자’를 자청하고 있으니 말이다.

# 감성 2 난 턱없이 긍정적이다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그의 ‘없음’이 채워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단히 비워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없어도 좋을 것은 비우고, 그 자리에 행복을 채워가는 것. 없는 게 많은 대신 이 남자는 좋은 게 많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지금’. 1초, 1초 흘러가는 바로 지금의 순간이 좋으니 그는 주어진 시간만큼 좋은 게 많은 사람이다.

“집에 있으면 집에 있는 시간이 좋고, 촬영장에 있으면 촬영장에 있는 시간이 좋아요. ‘기황후’ 촬영지가 경남 합천인데, 엄청 춥거든요. 또 추우면 추운 대로 좋아요. 어떤 상황이든 좋은 것을 찾아내는 거죠. 우울하면 ‘아, 우울해서 좋다’, 외로워도 ‘이 외로움이 좋다’ 그런 거예요. 슬픔도 슬픔 나름으로 좋은 거죠.”

“우울해서 좋다”는 그의 말은 문장 자체로도 시처럼 들렸다. 방점을 찍는 듯한 단호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갖는, 정말 우울함도 좋을 수 있겠다는 강한 설득력. 아무리 그래도 스트레스까지 없을까. “당연히 있죠” 하면서 이어간 이야기는 김영호만의 변주로 흐른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춥거나 더울 때, 살짝 고민하죠. 그래도 단순해서 민재(김영호의 매니저)한테 ‘귀마개 좀 사와’ 그러면 해결되잖아요(웃음). 또 이 친구도 단순해서 사오라는 것만 딱 사와요.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민재랑 보내는데 둘 다 단순해서 단순하게 사는 거예요. 기쁜 일을 찾아내고, 기쁜 일이 생기면 그걸 곱씹으면서 계속 기뻐해요. 다음에 기쁜 일이 생길 때까지.”

그가 곱씹는 ‘기쁜 일’이라는 게, 지난10월 시집 ‘그대, 살다, 잊다’(북노마드)를 내고 11월 26일에는 새로운 앨범 발매와 콘서트를 하고, ‘기황후’의 시청률이 올라가고, 최근 자신이 쓴 영화 시나리오에 관한 투자 약속을 받은 것 등 그럴싸한 일들은 아니었다. 매니저가 ‘기황후’를 재미있게 봤으면 기쁘고, 사극이라 한 번도 따라온 적 없던 스타일리스트가 촬영장에 놀러 와서 기쁜, 일상적이고 사소하다고 할 법한 자잘한 기쁨이 모여 그의 행복을 이룬다. 천성적으로 ‘긍정 마인드’를 타고 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다. 김영호는 언제부터 이토록 행복했을까?

“어릴 때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과 가난이 고통이었죠. 모든 것을 놓고 나니 이제는 (고통이) 별로 없어요. 우울할 게 없고, 결정도 빨라 고민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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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도 혼란과 방황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통기타 하나 둘러메고 공연하러 사방천지를 돌아다니던 20대 고독과 막막함도 진하게 경험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한 5천억원쯤 벌고 싶던 때”였다.

“너무 힘들고 어려웠어요. 그래서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고, 많은 것을 지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다 운명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저는 돈을 쫓아다니면 오히려 더 안 되더라고요.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없다는 걸 느꼈던 거죠. 어차피 안 되는 일인데, 그냥 인생 편하게 살자고 마음먹었어요.”

특별히 욕심 부린 배역도 없고, 놓쳐서 아쉬운 배역도 없다. 예전에 그에게 머물다간 인물이 마음 한쪽에 남아 있을 뿐.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그 순간에 자신이 맡은 역할로 작품에 녹아든다. 대본을 분석하고 캐릭터를 설정하는 게 아니라 그냥 ‘멍’하니 ‘그 사람’을 떠올리면 거짓말처럼 ‘그’가 된다.

“저는 사람보다는 자연에게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워요. 자연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솔직함을 배우는 거죠. 바람은 때로 무섭고, 때론 따뜻하고 때론 시원하게 불죠. 적어도 그 뒤에 생각을 숨기고 불지는 않아요. 그래서 바람을 닮고 싶고 계절을 닮고 싶어요. 사람도 참으면 참는 게 다였으면 좋겠고, 이해하면 이해하는 게 다였으면 좋겠고, 좋으면 좋은 게 다였으면 좋겠어요.”

# 감성 3 생각으로 살지 말고 마음으로 살다

자연을 통해 배운 삶의 진리를 ‘시’로 쓰고, ‘노래’로 말하며 ‘그림’과 ‘사진’으로 담는다. 많은 것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단 한 가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글을 쓰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부르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그 마음으로 연기를 하고 사진을 찍는 거죠.”

사실 그에게 시도, 노래도 연기보다 앞서 있다. 글 쓰고 노래하던 젊은이가 서른 살의 나이에 우연히 만난 게 연기였으니까.

“글은 아주 어릴 때부터 썼어요. 글 쓰는 것과 제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몰래 썼죠. 갈등하고 방황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힐링이 될 만한 글을 보여주곤 했는데, 책을 만드는 어떤 분이 제 글을 보고 책을 내자고 하더라고요. 주절주절 쓴 글도 책이 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여하간 그 분이 고집을 부려서 책을 냈죠.”

그래서 세상의 빛을 본 것이 작년 4월에 출간된 에세이집 ‘그대가 저 멀리 간 뒤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아트블루)다. 또다시 시집 ‘그대, 살다, 잊다’를 낸 것을 보니 자신감이 붙었나보다.

“아니요. 자신감은 지금도 없어요. 제가 또 귀가 얇거든요. 보통 연예인이 책을 내면 하나의 이벤트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단발로 그치는 건 아쉽다며 또 책을 내자고 하더라고요. 써 놓은 것이 있으면 달라고 해서 올 초부터 7월까지 쓴 노트를 보여줬더니 책을 내고도 남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전에 쓴 건 하나도 안 들어갔어요. 시는 어제도 쓰고 오늘 아침에도 쓰고, 매일 그때의 느낌으로 쓰는 거예요.”

그의 시에는 가슴 저린 사랑에 아파하는 남자가 보인다. ‘그대를 다른 사람으로 지우지 않겠습니다’라며 ‘사랑이 깊어 한 곳에 머무는’ 멋진 남자. ‘사랑이 찾아오면 아프게 하자, 두려움 없이 하자, 아픔조차 사랑하자’고 말하는 우직한 남자다.

“제가 말하는 사랑은, 제가 보는 세상과 나의 이야기예요. 너는 곧 삶이죠. 내 안의 나를 보내고 지금의 나를 맞이하는 거예요. 집착하지 않으니까 매 순간 다른 내가 돼요. 계절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니까 그게 모티프가 되고, 풍경이 바뀌면 새로운 글이 되는 거예요.”

한 번 앉으면 하루 종일 엉덩이 떼지 않고 종이와 연필의 유희에 정신을 쏟을 수 있는 ‘창작 유전자’를 가졌고, 도시의 중심에서 헤드셋을 끼고 앉아 자연을 볼 수 있는 눈도 가졌다. ‘영혼을 조각내는 듯’ 글을 쓰는 열정도 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그 어떤 이상도 크게 품지 않는다. “아픔도, 기억도, 행복도, 내 곁에 머물다가 바람처럼 가버리는 것. 지금 아픈 게 영원히 아픈 게 아닌 것처럼 지금 행복도 영원히 행복한 게 아니니까” 그는 욕심도 없다.

# 감성 4 세상에 발 붙이게 하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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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감성으로 하늘을 부유하던 그의 말 중에 가장 현실적인 단어는 ‘가족’이었다. 시처럼 음악처럼 사는 그였지만, 그 모든 것의 우위에 놓인 것이 바로 가족. 하지만 그에게 가족이 현실이 되는 것은 사람을 향한 사랑의 근간이 마음일지라도 1년 3백65일, 마음만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필리핀으로 유학 보낸 두 딸과 아내. 촬영이 없을 땐 너무 자주 봐서 기러기 아빠도 아니란다.

“학교도 보내야 하고, 자전거도 사줘야 하고…. 갖고 싶어 하는 거 사주고, 그러면 그냥 기뻐요. 아이가 만날 물어보죠. 아빠는 왜 뭘 가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안 하냐고. 저도 어렸을 때는 가지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제는 별로 소용없더라고요. 진짜 내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아빠로서 아이에게 간섭하려 든 적이 없다고 했다. 얼마 전 MBC ‘위대한 탄생3’에 출연해 가수로서의 기량을 뽐낸 큰 딸 김별(18) 양의 현실과 미래에도 아빠가 참견할 자리는 없다.

“살다가 힘들 때 ‘아빠, 어떻게 해야 해?’ 하고 물어오면 ‘나 같으면 이렇게 하겠다’고 충실하게 대답해 주고 ‘그냥 알아서 해라’ 하는 거죠. 자기가 알아서 잘 살겠죠. 그냥 두고 멀리서 지켜보는 거예요.”

대신 그의 마음속에 가족과의 약속은 따로 자리 잡고 있다.

“저는 항상 웃어요. 기분이 나빠져도 웃고요. 함께 살겠다는 건 짜증내지 않고 평생 서로를 보며 웃겠다는 약속이잖아요. 나 힘들다고, 나 이해해 달라고만 하면 안 되죠. 오히려 상대방을 이해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계속 이해하는 거예요.”

짜증나도 웃는 남편이라니. “멋지다”고 했더니 “같이 살아보면 다르다”고 응수한다. 보통의 인터뷰처럼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는 묻지 않았다. 대답은 들어보나 마나 “없다”일 테니.

“그냥 지금이 가장 편하고 좋아요.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지 않고, 노력하는 걸 즐길 줄 알고, 흔들리거나 조급하지 않고, 외로워도 말고, 고독할 줄 아는, 그런 멋진 남자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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