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채워준 음식의 역사는 소소합니다. 하지만 그 속엔 내 영혼이 넘어지던 날, 그 넘어진 마음이 다시 일어나 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날, 내 마음이 자라던 날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그날들의 이야기입니다.”‘뜨거운 위로 한 그릇’ 서문 중에서
위서현(34) KBS 아나운서가 마음과 음식을 이어주는 ‘뜨거운 위로 한 그릇’(이봄)이란 책을 펴냈다. 음식 치유법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 책에 대해 위 아나운서는 “그간 마음에 대해 메모한 것들을 바탕으로 각각의 마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들을 연결했다”고 소개했다.
바람이 차갑고 낙엽들이 바람에 뒹구는,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뜨거운 위로 한 그릇’ 주문하고 싶은 초겨울 오후, 서울 서교동에 있는 한 북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KBS1 라디오 ‘책 읽는 밤’을 진행하고 있는 그는 공동 저서를 포함해 벌써 책을 3권이나 냈다. 직업이 아나운서임에도 내성적이어서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일할 때만 사람들 앞에 서요. 평소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보다 혼자 글 쓰는 것을 좋아하죠. 어떤 단어 혹은 어떤 정서가 떠올랐을 때 그것을 글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냥 두면 흘러갈 것들을 문장으로 완성해서 붙잡아두면 정말 기뻐요.”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는 것은 그의 습관이고 일상이라 했다. 그는 요즘 트위터 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글을 올리면 피드백이 바로바로 이어지는 것이, 혼자만의 글쓰기와는 또 다른 기쁨이자 행복이라고.
혹시 어릴 적 꿈이 작가가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고 덧붙였다. ‘엄친딸’이었을 것 같은(아니 엄친딸이 분명한) 그는 자신을 그냥 ‘착한 딸’이었다고 소개했다. 한 살 많은 언니는 서울대 법대를 거쳐 판사가 됐다. 언니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는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언니 전국 등수랑 제 반 등수가 똑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엄마는 저에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잘 자라서 편안하고 예쁘게 살기를 바라셨죠.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이 저변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냥 엄마의 말을 따르며 조용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엄친딸요? 그냥 착한 딸이었죠
그는 엄마가 정해준 대로 이화여대 사범대(역사교육 전공)를 갔고, 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4학년 때 모교인 숙명여고로 교생 실습을 갔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 대학을 6개월 더 다니면서 초등교육을 복수 전공했다. 결과는 같았다. 초등학교로 교생 실습을 갔는데 ‘이건 더 아니다 싶었다’는 것이다.
“평생을 교사로 살 자신도, 아이들 앞에 설 용기도 없었어요. 졸업을 앞두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뭐할까’를 고민했죠. 언니가 곁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이 꼭 있을 거’라며 격려해주곤 했어요. 언니는 제 인생의 멘토로 항상 따뜻한 힘이 돼주었죠.”
그러던 중 언니 친구가 “서현이는 아나운서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더란다. 아나운서란 네 글자가 그의 뇌리에 박히고 그날 밤 잠을 설쳤다. 꿈이 없던 그는 그렇게 스물네 살이 돼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단 열정을 갖게 됐다.
부모 몰래 KBS 사회교육원에 등록해 아나운서 준비를 했고, 춘천 MBC에 지원해 합격했다. 춘천 MBC에서 기자와 캐스터로 8개월간 근무한 뒤 사직서를 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KBS 아나운서 시험을 봤고, 한 번 만에 합격했다. “네가 무슨 아나운서냐”고 “바람이 들었다”며 반대하던 부모(그는 자신의 부모님은 자상하고 따뜻하지만 딸들에 대해 아주 객관적이라고 했다)도 막상 합격하자 기뻐하며 축하해줬다고.
“처음으로 부모님 뜻이 아니라 제 뜻대로 결정하고 행동한 거예요. 꿈도 없이 그저 부모님이 정해준 삶을 살아가던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생겼고, 그 열정이 저를 이 길로 이끌었던 것 같아요.”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겁도 많아요”
엄마표 미역국, 아빠표 감자전, 오래된 맛집의 칼국수, 5백원짜리 컵떡볶이, 오래된 골목길 오래된 식당의 김치찌개, 단팥죽, 팥빙수 등 책 속에서 그가 소개한 음식들은 소박하다. 그는 새로 문을 연 레스토랑에서 섬세하게 준비된 정찬을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도 양푼 냄비에 라면을 끓여 밀폐 용기에 담긴 김치와 함께 먹는 것을 더 즐긴다고 했다. 운동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5백원짜리 컵떡볶이를 사들고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 동네 한량처럼 느리게 걸으며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찍어 먹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편이라 처음 본 사람들은 A형이냐고 물어요. 제가 O형이라 그러면 신기해들 하죠. 하지만 친해지고 나면 털털하고 아줌마 같다고 해요. O형 맞다고요(웃음).”
레스토랑의 정찬과 양푼 냄비의 라면, A형 같은 내성적인 면과 O형의 털털함. 양면성을 지닌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런 것 같다”면서 한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많은데, 반면 겁도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는 대학 다닐 때 MT를 한 번도 안 갔다. 여대이다 보니 남학생들과 연합 MT를 가는데, 겁이 많은 그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계에 대해선 바닥까지 충분히 맛보려고 한다. 겁이 나면 겁이 나는 대로 말이다. “한번 방어벽이 깨지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고, 묘한 용기가 생겼다”고 그가 말했다.
그는 2009년 연세대 대학원에 들어가 심리상담학을 전공하고 지난해 초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자신이 너무 힘들어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선택한 공부였다. 그런데 돌이켜봤을 때 그 3년이란 시간은 “지독한 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방송 생활과 주간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프로그램을 했어요. 아침 7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났죠. 그게 끝나면 대학원으로 달려가 수업을 듣고 다시 방송국으로 가 저녁 7시 뉴스를 진행했어요. 집에 돌아가면 과제를 하다 지쳐 쓰러져 잠들곤 했죠.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길에 차를 세워둔 채 쪽잠을 자면서 버티기도 했어요. ‘도대체 난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죠.”
답은 명확했다. 그는 “상담사가 되려면 자기 분석이 먼저여야 한다”며 “공부하면서 제 마음을 바닥까지 보게 됐다”고 했다. 마음의 바닥을 보게 되니 다시 일어설 용기가 생기더란다. 또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멋진 일인지를 깨닫게 됐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조명을 받고 살았다면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조명해주면서 살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아파본 적 없는 마음은 아픔을 이해할 수도, 나눌 수도 없다. 인간은 자신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타인의 아픔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20대보다 지금이 더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져
그는 모든 인연과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모든 인연과 만남이 저한테는 선물이에요. 설사 그것이 상처와 씻지 못할 좌절을 주더라도 그 만남은 고마운 거예요. 그게 아니었으면 몰랐을 세상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감정을 모른 채로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경험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픈 시절이 있었기에 더 클 수 있었죠. 제 세상이 깨지고 많이 힘들수록 마음이 커지는 것 같아요. 행복하고 아늑한 것만 알고 있던 20대보다 지금이 더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져요.”
힘들었던 20대를 뒤로하고 그는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지난 3월 다섯 살 연상의 피부과 전문의와 결혼해 한창 신혼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 남편은 그의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석사 과정을 진행하던 중에 소개를 받았는데, 그땐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어 만남을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밥 한번 먹자는 연락이 오고 또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고, 그렇게 일 년이 넘게 인연의 고리가 지속됐다. 인연이 아니라면 벌써 끝났을 텐데, 연락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고 그가 말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어느 날 또 연락이 왔을 때, 그럼 밥이나 먹자고 했어요. 오랜만에 다시 만난 남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죠. 경쾌하고 환하고 즐거운 사람인 거예요. 삶이 팍팍하던 저에게 따뜻하고 유쾌한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그날 집에 돌아가서도 남편이 한 농담들이 생각나 혼자 웃었어요.”
그는 자신은 자신대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남편은 남편대로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나왔기 때문에 다시 만났을 때 좋은 감정이 생긴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좋은 감정이 생긴 이후로는 결혼까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시부모님이 ‘너희 둘은 늦게 만났으니 그만큼 더 아끼고 사랑하며 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저보다는 남편이 더 잘 실천하고 있죠. 부모님께도 사랑을 참 많이 받았는데, 남편한테도 넘치게 사랑을 받고 있어요. 제가 세상을 살면서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다 받는 거 같아요. 남편은 ‘너는 그냥 예쁘고 그냥 사랑스럽다’는 닭살 돋는 말도 참 잘해요(웃음).”
남편의 넘치는 사랑으로 그는 세상에 나갈 자신감과 힘이 생겼다고 했다. 그렇게 큰 것을 준 남편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딱’ 두 가지란다. 그가 지치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길 바라고, 자신에게 진심 어린 사랑과 관심을 지속적으로 주길 바란다고. 그는 “남편이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데, 관심을 달라고 할 땐 아이 같다”며 웃었다.
남편의 바람대로 지치지 않고 평생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찾았다고 답했다. 글쓰기란다.
“글쓰기는 제 마음 생김새랑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요. 평생 글 쓰는 사람으로 사는 게 바람이죠. 아직은 작가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언젠가는 작가로서의 능력이 더 갖춰지고 작가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날이 오겠죠?(웃음) 사실 지금 이만큼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요. 비워진 혹은 부족한 삶이야말로 완전한 게 아닐까요? 완벽을 갈망하는 만큼 행복은 유예되니까요.”
마지막으로 오늘 만남을 음식에 비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언젠가 강원도 강릉의 한 포장마차에서 먹었다는 칼국수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먹게 된, 해물이 잔뜩 들어간 칼국수는 편안하고 깊은 맛이 났다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이해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와의 만남은 그처럼 편안하고 깊은 시간이었다.
위서현(34) KBS 아나운서가 마음과 음식을 이어주는 ‘뜨거운 위로 한 그릇’(이봄)이란 책을 펴냈다. 음식 치유법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 책에 대해 위 아나운서는 “그간 마음에 대해 메모한 것들을 바탕으로 각각의 마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들을 연결했다”고 소개했다.
바람이 차갑고 낙엽들이 바람에 뒹구는,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뜨거운 위로 한 그릇’ 주문하고 싶은 초겨울 오후, 서울 서교동에 있는 한 북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KBS1 라디오 ‘책 읽는 밤’을 진행하고 있는 그는 공동 저서를 포함해 벌써 책을 3권이나 냈다. 직업이 아나운서임에도 내성적이어서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일할 때만 사람들 앞에 서요. 평소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보다 혼자 글 쓰는 것을 좋아하죠. 어떤 단어 혹은 어떤 정서가 떠올랐을 때 그것을 글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냥 두면 흘러갈 것들을 문장으로 완성해서 붙잡아두면 정말 기뻐요.”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는 것은 그의 습관이고 일상이라 했다. 그는 요즘 트위터 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글을 올리면 피드백이 바로바로 이어지는 것이, 혼자만의 글쓰기와는 또 다른 기쁨이자 행복이라고.
혹시 어릴 적 꿈이 작가가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저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고 덧붙였다. ‘엄친딸’이었을 것 같은(아니 엄친딸이 분명한) 그는 자신을 그냥 ‘착한 딸’이었다고 소개했다. 한 살 많은 언니는 서울대 법대를 거쳐 판사가 됐다. 언니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는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언니 전국 등수랑 제 반 등수가 똑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엄마는 저에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잘 자라서 편안하고 예쁘게 살기를 바라셨죠.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이 저변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냥 엄마의 말을 따르며 조용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엄친딸요? 그냥 착한 딸이었죠
그는 엄마가 정해준 대로 이화여대 사범대(역사교육 전공)를 갔고, 선생님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4학년 때 모교인 숙명여고로 교생 실습을 갔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 대학을 6개월 더 다니면서 초등교육을 복수 전공했다. 결과는 같았다. 초등학교로 교생 실습을 갔는데 ‘이건 더 아니다 싶었다’는 것이다.
“평생을 교사로 살 자신도, 아이들 앞에 설 용기도 없었어요. 졸업을 앞두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뭐할까’를 고민했죠. 언니가 곁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이 꼭 있을 거’라며 격려해주곤 했어요. 언니는 제 인생의 멘토로 항상 따뜻한 힘이 돼주었죠.”
그러던 중 언니 친구가 “서현이는 아나운서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더란다. 아나운서란 네 글자가 그의 뇌리에 박히고 그날 밤 잠을 설쳤다. 꿈이 없던 그는 그렇게 스물네 살이 돼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단 열정을 갖게 됐다.
부모 몰래 KBS 사회교육원에 등록해 아나운서 준비를 했고, 춘천 MBC에 지원해 합격했다. 춘천 MBC에서 기자와 캐스터로 8개월간 근무한 뒤 사직서를 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KBS 아나운서 시험을 봤고, 한 번 만에 합격했다. “네가 무슨 아나운서냐”고 “바람이 들었다”며 반대하던 부모(그는 자신의 부모님은 자상하고 따뜻하지만 딸들에 대해 아주 객관적이라고 했다)도 막상 합격하자 기뻐하며 축하해줬다고.
“처음으로 부모님 뜻이 아니라 제 뜻대로 결정하고 행동한 거예요. 꿈도 없이 그저 부모님이 정해준 삶을 살아가던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생겼고, 그 열정이 저를 이 길로 이끌었던 것 같아요.”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겁도 많아요”
엄마표 미역국, 아빠표 감자전, 오래된 맛집의 칼국수, 5백원짜리 컵떡볶이, 오래된 골목길 오래된 식당의 김치찌개, 단팥죽, 팥빙수 등 책 속에서 그가 소개한 음식들은 소박하다. 그는 새로 문을 연 레스토랑에서 섬세하게 준비된 정찬을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도 양푼 냄비에 라면을 끓여 밀폐 용기에 담긴 김치와 함께 먹는 것을 더 즐긴다고 했다. 운동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5백원짜리 컵떡볶이를 사들고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 동네 한량처럼 느리게 걸으며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찍어 먹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편이라 처음 본 사람들은 A형이냐고 물어요. 제가 O형이라 그러면 신기해들 하죠. 하지만 친해지고 나면 털털하고 아줌마 같다고 해요. O형 맞다고요(웃음).”
레스토랑의 정찬과 양푼 냄비의 라면, A형 같은 내성적인 면과 O형의 털털함. 양면성을 지닌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런 것 같다”면서 한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많은데, 반면 겁도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는 대학 다닐 때 MT를 한 번도 안 갔다. 여대이다 보니 남학생들과 연합 MT를 가는데, 겁이 많은 그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계에 대해선 바닥까지 충분히 맛보려고 한다. 겁이 나면 겁이 나는 대로 말이다. “한번 방어벽이 깨지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지고, 묘한 용기가 생겼다”고 그가 말했다.
그는 2009년 연세대 대학원에 들어가 심리상담학을 전공하고 지난해 초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자신이 너무 힘들어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서 선택한 공부였다. 그런데 돌이켜봤을 때 그 3년이란 시간은 “지독한 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방송 생활과 주간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프로그램을 했어요. 아침 7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났죠. 그게 끝나면 대학원으로 달려가 수업을 듣고 다시 방송국으로 가 저녁 7시 뉴스를 진행했어요. 집에 돌아가면 과제를 하다 지쳐 쓰러져 잠들곤 했죠.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길에 차를 세워둔 채 쪽잠을 자면서 버티기도 했어요. ‘도대체 난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죠.”
답은 명확했다. 그는 “상담사가 되려면 자기 분석이 먼저여야 한다”며 “공부하면서 제 마음을 바닥까지 보게 됐다”고 했다. 마음의 바닥을 보게 되니 다시 일어설 용기가 생기더란다. 또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멋진 일인지를 깨닫게 됐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조명을 받고 살았다면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조명해주면서 살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아파본 적 없는 마음은 아픔을 이해할 수도, 나눌 수도 없다. 인간은 자신을 통해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타인의 아픔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20대보다 지금이 더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져
그는 모든 인연과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모든 인연과 만남이 저한테는 선물이에요. 설사 그것이 상처와 씻지 못할 좌절을 주더라도 그 만남은 고마운 거예요. 그게 아니었으면 몰랐을 세상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감정을 모른 채로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경험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픈 시절이 있었기에 더 클 수 있었죠. 제 세상이 깨지고 많이 힘들수록 마음이 커지는 것 같아요. 행복하고 아늑한 것만 알고 있던 20대보다 지금이 더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져요.”
힘들었던 20대를 뒤로하고 그는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지난 3월 다섯 살 연상의 피부과 전문의와 결혼해 한창 신혼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 남편은 그의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석사 과정을 진행하던 중에 소개를 받았는데, 그땐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어 만남을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밥 한번 먹자는 연락이 오고 또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고, 그렇게 일 년이 넘게 인연의 고리가 지속됐다. 인연이 아니라면 벌써 끝났을 텐데, 연락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고 그가 말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어느 날 또 연락이 왔을 때, 그럼 밥이나 먹자고 했어요. 오랜만에 다시 만난 남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죠. 경쾌하고 환하고 즐거운 사람인 거예요. 삶이 팍팍하던 저에게 따뜻하고 유쾌한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그날 집에 돌아가서도 남편이 한 농담들이 생각나 혼자 웃었어요.”
그는 자신은 자신대로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남편은 남편대로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나왔기 때문에 다시 만났을 때 좋은 감정이 생긴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좋은 감정이 생긴 이후로는 결혼까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시부모님이 ‘너희 둘은 늦게 만났으니 그만큼 더 아끼고 사랑하며 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저보다는 남편이 더 잘 실천하고 있죠. 부모님께도 사랑을 참 많이 받았는데, 남편한테도 넘치게 사랑을 받고 있어요. 제가 세상을 살면서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다 받는 거 같아요. 남편은 ‘너는 그냥 예쁘고 그냥 사랑스럽다’는 닭살 돋는 말도 참 잘해요(웃음).”
마음을 담은 음식, 음식으로 이어진 인연이야말로 우리 삶을 따뜻하게 데우는 에너지가 아닐까.
남편의 바람대로 지치지 않고 평생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찾았다고 답했다. 글쓰기란다.
“글쓰기는 제 마음 생김새랑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요. 평생 글 쓰는 사람으로 사는 게 바람이죠. 아직은 작가라는 말이 어색하지만, 언젠가는 작가로서의 능력이 더 갖춰지고 작가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날이 오겠죠?(웃음) 사실 지금 이만큼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요. 비워진 혹은 부족한 삶이야말로 완전한 게 아닐까요? 완벽을 갈망하는 만큼 행복은 유예되니까요.”
마지막으로 오늘 만남을 음식에 비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언젠가 강원도 강릉의 한 포장마차에서 먹었다는 칼국수 이야기를 했다. 우연히 먹게 된, 해물이 잔뜩 들어간 칼국수는 편안하고 깊은 맛이 났다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이해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와의 만남은 그처럼 편안하고 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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