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을 때 돌아오겠다.”
영화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로 잘 알려진 이준익 감독. 2011년 2월 영화 ‘평양성’이 손익분기점(2백50만 명)을 넘기지 못하고 1백70만 명 동원에 그치자 상업영화 은퇴를 선언한 그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영화로 돌아왔다.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반세기를 산 어른이 ‘은퇴 번복’을 하게 했던 걸까. 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소원’은 설경구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흥행 스타’가 보이지 않는 작품이었다.
‘어느 비 오는 아침, 등교하던 소원이가 술 취한 아저씨에게 끌려가 믿을 수 없는 사고를 당한다. 이 일로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소원이네. 하지만 이들은 절망 끝에서 희망을 찾아 나선다….’ 진부한 스토리. 아동 성폭력이라는 소재 하나만큼은 분명히 자극적이었다. 2008년 경기도 안산에서 초등학생을 성폭행해 징역 12년형과 전자 발찌 7년형, 신상 공개 5년형을 받은 조두순 사건이 연상됐다. ‘왕의 남자’를 뽑아내던 이준익은 사라진 걸까.
여러 감독의 손을 거쳐 온 영화 ‘소원’
그와의 인터뷰는 영화 개봉 당일인 10월 2일 오후에 이뤄졌다. 인터뷰 장소 근처 서울 종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표를 끊었다. 고등학생 한 무리와 백발 성성한 노신사, 영화광 청년과 세 커플, 그리고 기자. 영화관은 썰렁했다. 시작도 전부터 지레 감독의 안위를 걱정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기자는 ‘생얼’ 상태로 인터뷰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에 아이라인이 다 번져 수습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 감독은 약속 시각보다 먼저 와 있었다. “방금 영화를 봤다”고 하자 그는 “울었어?”라고 되물었다.(이준익 감독의 감정과 톤을 전하고자 기자에게 오랜 친구처럼 격의 없이 말한 그의 말투 그대로 옮긴다.)
“편하게 울면 좋아. 그게 카타르시스니까. 카타르시스는 페이소스에서 나오거든. 소재가 가진 불편함, 거부감 때문에 애써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게 일반적인 관객의 마음일 거야. 만약 이전에 발생한 일을 소재로 영화를 찍는다 하면 복수나 범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 쪽으로 상상하겠지. 영화를 봐서 알겠지만 그 문제는 그 문제고. 이 작품은 피해자의 내일, 그 긴 터널을 빠져나가 얼마나 피해자가 간절하게 내일로 가는지를 따라가는 영화야. 그래서 선입견만 버리고 본다면 그들의 고통을 따라가다 나중에 자기 정화가 되지.”
상업영화 복귀작이면 분명 안전하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쉬운 길을 고르지 않았다. 영화 ‘소원’은 여러 감독의 손을 거쳐 그에게 왔다. 이 감독은 “‘평양성’까지는 제작부터 기획, 감독에 시나리오까지 과중한 짐을 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온전히 감독만 한 첫 작품”이라고 했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비유하자면 조그만 어항에 금붕어 한 마리 넣어놓고 이걸 서울에서 부산까지 배달해달라는 거였어. 이걸 가져가야 하는데 어항을 어디 박거나 깨면 물고기가 어떻게 되겠어. 깨질까 봐 조심조심해서 오늘(개봉일)까지 겨우겨우 온 거야. 정말 힘들었지.”
그는 “이런 소재에 대한 일반 관객의 거부감을 잘 안다”고 했다. “피해자를 두 번 죽이려 하느냐”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가 정말 올바를까. 예를 들어 이런 뉴스를 접하면 아이고 어른이고 사형시켜라, 능지처참해도 시원찮다고 반응하잖아. 그러면서 내심 자기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큰 착각에 빠진다고. 피해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에이, 관심 끄는 게 도와주는 거야’라고 하거든. 정말 그럴까? 피해자들은 그렇게 계속 소외되는 거야. 이런 사회적 외면이 과연 올바르냐는 거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것 자체가 불손해 보일까 봐 극도로 조심했다는 이 감독. 촬영 내내 전 배우와 스태프가 ‘최대한 공손하고 정중하게 찍을 것’을 가슴에 새기고 촬영에 임했다고 했다. 영화는 범행을 잔혹하게 묘사하거나 법을 대신해 단죄하는 피해자 같은 클리셰를 넣기보다 피해자가 재기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실제로 촬영하면서 그도 배우만큼이나 많이 울었다고.
1 상처 입은 딸에게 다가가고자 아버지(설경구)는 코코몽 인형을 매개체로 활용한다. 2 영화 ‘소원’의 주역 설경구, 엄지원, 이레.
“너무 자주 울어서(웃음). 법정 장면 찍을 때는 오열할 정도였고, 회복실 장면도 찍으면서 많이 울었어. 우리는 소원이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보잖아. 그런데 여자 시나리오 작가의 작품은 처음 만들어 봤거든. 아직 아이가 성에 대한 개념이 없을 나이니 그냥 굉장히 난폭한 ‘폭행’을 당했다고 인지할 거라는 거지. 보통 영화에서 ‘아빠, 나 치욕스럽고 죽을 것 같아’라고 대사 칠 법한 상황에서 소원이는 ‘아빠, 회사는…(어쩌고)?’이라고 한다고. 그러고는 ‘아빠가 바쁠까 봐 내가 112에 신고했어’라고 하지. 내가 이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인데 그 대사에서 울컥한 거야. 그런데 설경구가 마지막까지 눈물을 참아. 그거 알아? 너무 많이 울면 아파서 잘 못 일어나. 그 신의 몰입도가 엄청나서 감독으로서 악마적 쾌감도 있었고, 우느라 헤드폰 끼고 뒤에서 히히히히 그러니까 다들 ‘감독이 미쳤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우신 거예요, 웃은 거예요?’ 묻더라고.”
사건보다 사연에 집중하다
이 영화는 그래서 ‘스포일러’랄 게 딱히 없다. 소원이는 갑작스레 사고를 당하고, 부모는 가슴 아파하다가 종국에는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고, 선량한 이웃들은 합심해서 이들을 돕는다. 이 감독은 주변 인물 묘사에 대해 ‘판타지’라는 단어를 썼다.
“범인을 뺀 등장인물 모두가 거짓말처럼 착하잖아. 경찰에, 이웃에 심지어는 코코몽 인형을 빌려주는 업체 사람까지도 말도 안 되게 착해. 비현실적이지. 누구나 선한 마음이란 게 있는데, 거기 공감하고 동참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거든. 그래서 이 영화가 판타지인 거야.”
범인은 만취 상태의 심신 미약을 인정받아 모두의 예상보다 가벼운 형을 받는다. 법정에서 아버지 역의 설경구가 판결을 듣고 눈이 돌아가 검사 이름표로 가해자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장면에서는 그게 ‘돌이킬 수 없는 나쁜 일’임을 알면서도 숨죽여 응원하게 됐다. 그러나 놀랍게도 “집에 가자”며 아버지를 멈추는 건 다름 아닌 소원이다. 이 감독에게 “그 부분에서 솔직히 설경구가 범인을 내리치길 바랐다”고 하자 그는 “그렇게 만들었다면 아마 통쾌함은 있었을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그는 “상처 받은 사람이 가장 크게 웃는다고 하더라. 상처 받은 사람을 통해 그 역시도 구원받은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설경구는 올해 ‘타워’부터 ‘감시자들’ ‘스파이’까지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절제력을 보였다. 이미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걸 끄집어내는 그의 가능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나 돌아갈래~~”가 아닌 “나!”까지만 외치고도 감정을 전달하는 것 같달까. 이 영화에서 그의 전매특허인 폭주 기관차 같은 ‘폭발’ 연기는 딱 한 번 나온다. 이 감독은 “설경구는 연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영화에는 연기를 위한 연기가 없어. 주어진 상황이 현실로 크게 다가오면 거기 반응할 뿐이지. 영화니까 연기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해야지 계산할 필요가 없잖아. 아이가 병실에 만신창이로 누워 있는 와중에도 ‘아빠, 회사는…?’ 하면 바로 흑! 하고 복받치지. 엄지원은 ‘소원’이라는 열차를 타고 먼 길을 갔다 온 동지야. 배우로 안 보여. 나를 감독으로 보지도 않고 동네 옆집 아저씨처럼 본다니까(웃음).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데. 여배우들은 노 메이크업이라 해도 옅은 화장을 하잖아. 그런데 엄지원은 촬영 현장에 촬영용 꽃무늬 옷을 입고 와서 찍고 그대로 가. 밥 먹을 때도 사람들이 여배우인지 못 알아볼 정도야. 설경구도 엄지원도 소원이 부모 입장에 완전히 몰입했기에, 연기를 잘했다고 말하는 것조차 이상해.”
주연 배우만큼이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소원이 역의 이레 와 영석이 역의 김도엽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이 작품이 데뷔작인 이레는 ‘괴물 아역’으로 불린 김새론이나 갈소원 이상의 연기를 선보였다.
“이레는 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어. 오디션에서 떨어진 후보들 보다가 ‘얘’ 하고 찍었는데 그게 이레였지. 연기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오디션장에서 울고 웃고 할 거 다 하는데, 이레는 그저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긴 대사를 죽 하더라고. 깜짝 놀랐어. 도엽이는 목소리가 좋은 아이야. 글이나 말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지만 목소리는 꾸밀 수가 없어. 세포가 반응하는 거니까. 그래서 배우를 볼 때 목소리와 눈을 봐. 구김 없이 자란 아이들은 마음의 눈이 열려 있거든.”
“영화를 보고 영석이에게 꽂혔다”고 하자 그는 “영석이가 매력 있게 느껴진 건 사나이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짚어줬다.
“수호천사처럼 소원이를 뒤따라가던 영석이가 소시지 얘기를 하면서 점점 가까워지다가 ‘아프지 마라, 내가 속 좁게 굴어가 잘못했다. 계속 친구 하는 거지’라고 하잖아. 영석이는 진짜 사나이야. 자신을 반성하고 잘못을 고백할 줄 아는 사나이. 나이를 떠나 멋진 사나이다움을 보여준 최고의 장면이지.”
그는 “아역 배우들을 보며 인간이 날 때부터 천재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아이들이 김해숙, 설경구 같은 연기 9단과 투 샷을 찍어도 하나도 밀리지 않잖아. 어마어마하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천재인 거야. 학교에 가거나 사회에 나갈 때 교육으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과정을 겪지만, 잃는 것도 있는 것 같아. 내 기준으로는 40대까지는 철이 드는 과정이고, 이후부터는 철을 빼야 해. 그래야 꼴통 안 되고 꼰대 소리 안 들어. 세상의 모든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옛말의 위대함을 나이 50이 넘어서야 알았어.”
그도 숨어 있던 ‘내 안의 천재성’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그는 “올봄에 교보빌딩 앞을 지나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갔을까/아직 내 속에 있을까/아니면 사라졌을까’라는 글귀를 보고 ‘어디 갔지?’ 막 찾았는데 왼쪽 두 번째 갈빗대 사이에 딱 있더라”며 “철로 덮여 있어서 걷어내는 중”이라고 했다. “철은 어떤 식으로 빼느냐”고 물었다.
“오토바이 타고, 낄낄대고 ‘개그콘서트’ 보고. TV를 몇 년째 안 보거든. 이 나이 먹도록 세상에서 너무 많은 걸 봐서 새로운 걸 더 안 봐도 되는데 ‘개그콘서트’는 꼭 봐. 일요일 밤에 그걸 보면 정말 행복하지. 거기 나오는 개그맨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시청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걸 보면 정말 최고의 프로그램 같아. 몇 년째 마니아야. 오, 막시무스! 멋져.”
그의 영화가 따뜻한 이유
자극적 소재로도 속 쓰림 없이 든든한 한 끼를 만들어내는 그에게는 따뜻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는 ‘이준익은 따뜻한 감독이다’란 명제에 동의할까. 그는 “그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든 영화는 감독의 고백일 수밖에 없어.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려도 자기 심리 상태가 표현되는 걸. 감독은 자기에게 없는 건 만들 수가 없어. ‘황산벌’이나 ‘라디오 스타’나 베낀 게 없어. 아마 이 영화도 그럴 거야. 따뜻하다, 따뜻하지 않다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걸 만들어야지 없는 걸 어떻게 만들겠어(웃음).”
흥행에 대해 묻자 “감독이니 내용만 책임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명절 전문 감독인데, 관객이 많이 드나 적게 드나 어차피 TV에서 보게 돼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영화 시사를 하고 나면 내 작품을 보지 않는다”는 그는 “자기 감정을 솔직히 드러낸 작품을 보는 건 마치 사랑 고백을 녹음해서 들려주는 느낌이라 부끄럽고 식은땀이 나는 일”이라고 했다.
“한번은 명절에 TV를 틀었는데 ‘왕의 남자’가 나오기에 채널을 휙 돌렸더니 ‘라디오 스타’가 방송되고, 그래서 케이블로 돌렸더니 ‘황산벌’이 나오더라고(웃음). 내 영화 안 보려고 ‘개그콘서트’나 보자 했더니 ‘감수성’이라고 내 영화를 패러디했더라고. 하하하. 피할 수가 없어.”
한 기자는 영화 리뷰 말미에 ‘앞으로는 상업영화를 은퇴하겠다는 등의 경솔한 소리는 절대로 하지 마시라’며 끝맺었다. 이 문장을 읽어줬더니 그는 “구박 받아도 싸다”며 껄껄 웃었다. 그는 “애정 어린 충고다. 용서해주는 것 아니냐. 은퇴가 아니라 제대할 뻔했는데 다행히 안 해도 될 것 같다”며 웃었다. 다음 작품을 물었더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는 “수년 전부터 계획대로 해서는 되는 게 없어서 ‘Life is Sudden’ ‘No Plan’ 주의로 살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날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그는 영화를 봤다는 기자에게 “오늘 몇 명이나 들었느냐”고 물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솔직히 많이 차지는 않았지만 학생들도 보러 왔더라”고 했다. 그는 “첫날이라 그렇지”라며 학생들이란 말에 눈을 빛냈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2주가 지났다. 영화 ‘소원’은 개봉 첫 주 주말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더니 기어이 2백만 관객을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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