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둣가에서의 여유로운 하루. 자전거 천국 덴마크에서.
홀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떠나는 사람도, 소망하는 사람도 많아지니 나 홀로 여행족들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커진다. 이들은 나 홀로 여행의 이유에 대해 ‘자유로움’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원하는 때, 원하는 곳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성취감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 것 같다고 답한다. 혼자라는 위험마저 감수하고 훌쩍 떠날 수 있을 만큼 삶을 대하는 데 용기가 생기기에 그렇다고. 여행 작가 김윤정(26) 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국내 배낭여행부터 일본, 중국, 유럽까지 홀로 여행을 한 뒤‘두 바퀴로 일본을 달리다’, ‘발칙한 유럽여행’을 쓴 작가가 됐다.
인터뷰를 약속한 주말 오전, 전날까지 세찬 비가 쏟아진 뒤라 세상 모든 먼지가 씻겨나간 듯 한껏 맑은 하늘을 자랑했다. 김씨는 자신의 몸만큼 큰 자전거에 라이더 복장까지 완벽히 갖추고 나타나 “안녕하세요”라며 경쾌하게 인사를 건넨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비온 다음 날 풀 냄새 같은 알싸한 향이 묻어나왔다.
2 3 자전거인의 축제 유로바이크. 자전거 관련 용품이 망라돼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4 김윤정 작가의 자전거와 여행 짐. 텐트와 매트리스까지 메고 다닌다.
자전거를 좋아하던 아이, 유럽을 달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여행한 경험도 별로 없고, 대학 입학 전까지 자신이 여행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는 그는, 우연한 계기로 여행의 맛을 알았다. 대학 입학하던 해 겨울, 경상도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문득 일을 마치고 그냥 서울로 돌아오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가 제일 먼저 떠올라 무작정 경남 합천으로 갔다. 그날따라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길이 빙판이 되자 버스기사는 해인사에서 20~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승객을 내려주고 그냥 가버렸다. 이미 날은 어둑해졌고 관광지가 아니어서 숙박시설도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근처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려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용기가, 아니 뻔뻔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도 모르겠단다. 집주인의 배려로 따뜻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무사히 해인사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인심이 사나워졌다고들 하지만 분명 좋은 사람들도 있으니 이런 식의 여행도 괜찮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대학 초년생 시절, 대학생들 사이에서 국토대장정이 유행했다. 그중 박카스에서 주관하는 국토대장정이 유명해 2006년 신청서를 냈지만 떨어졌다. 오기가 생겼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쏘다녔던 그인지라 발로 걷는 대신 자전거로 우리 땅을 밟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혼자 하라는 계시라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김씨는 세 살 때부터 발이 닿지도 않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중학교 때 성적을 올려 산 접이식 자전거로 서울의 동북부 일대를 돌아다녔다. 대학에 입학하며 산 빨간 자전거. 당시 여행은 이 친구와 함께했다. 그는 2006년 가장 무더운 여름날 서울을 출발해 자전거를 타고 전남 해남까지, 해남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넘어가 한 바퀴를 돌았다. 제주도에서는 부산까지 배로, 부산에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동해까지 달렸다.
5 노르웨이에서 만난 토미 아저씨 가족과의 식사. 함께 음식을 나누며 문화도 나눌 수 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개강 첫 주를 여행지에서 보냈죠. 아차 싶어 동해에서 서울까지 자전거 대신에 기차로 왔어요(웃음).”
21일간의 첫 자전거 여행 거리는 총 1250km. 자신감과 함께 여행의 참맛도 알았다고 고백했다. 2007년 9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홀로 41일간 2300km를 달리고 ‘두 바퀴로 일본을 달리다’를 출간했다. 그 후 여행 공백기를 보낸 뒤 2009년 9월 영국 런던으로 떠났다. 어학연수가 목적이었지만 그보다 유럽을 경험해보겠다는 의욕이 더 컸다. 런던에 갈 때부터 “연수를 마치면 자전거로 유럽 땅을 달려보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유럽 13개국 나 홀로 자전거 여행은 2010년 9월 시작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제일 좋아하는 아일랜드 맥주 기네스를 직접 잔에 따라보기도 했고, 길을 잃고 헤매다 자전거가 다닐 수 없는 고속도로에 진입해 경찰에게 혼나기도 했다. 세계 최장 터널이라는 노르웨이 래르달 터널에 들어가서 24.5km의 어둠 속을 지나는 동안 자신의 선택이 후회스러워 펑펑 울었고, 그런 일도 잠시 난생처음 보는 유럽의 자연 풍경과 사랑에 빠져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세계 최대 자전거박람회인 유로바이크를 보겠다며 악착같이 먼 길을 돌아 독일의 소도시 프리트리스하픈까지 달린 것도 잊지 못할 체험이었다.
길 위에서 많은 것을 보았지만 그가 여행 중 가장 큰 매력을 느낀 것은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 여행하면 있는 그대로 그 나라를 바라볼 수 있을 뿐더러 현지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훨씬 더 많다”면서 “그 덕분에 사람을 얻은 것이 가장 큰 수확이고, 맹자의 성선설을 믿게 됐다”며 말을 이었다.
“길가나 마을 어귀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모르는 우리나라와 제가 모르는 그들의 이야기를 나눴어요. 런던에서 1년 가까이 지냈을 때도 알지 못했던 유럽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볼 기회가 생긴 셈이죠.”
지구는 둥글고, 세상에는 모난 사람 없다
자전거로 온 세상을 돌고 싶다는 꿈을 지닌 김윤정 씨. 항상 웃는 그의 얼굴에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스레 무장 해제되고 만다.
여자가 홀로 텐트와 침낭을 메고 자전거로 여행하다 보면 위험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여행 운이 좋은가봐요”라며 씩 웃는다. 북서유럽 13개국, 5200km를 1백3일에 걸쳐 달리는 동안 무탈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쌀밥. 밀가루 음식만 먹다 보니 따뜻한 밥 생각이 간절했다. 비가 오는 날 텐트 속에서 자다 추위에 떨기도 했고, 여행하던 중 환전한 돈이 똑 떨어져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가 그를 도와주고 응원해줘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다.
“특히 숙식을 제공해준 분들이 기억에 남죠(웃음). 제가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나 삶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어 도움이 많이 돼요. 혼자 하는 여행에 용기 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네가 여행하는 모습이 정말 좋다’라고 하거나, 여행의 계기를 듣고 공감해주는 분을 만나면 더욱 기운이 나죠.”
영국의 도시 아이언브리지에 있는 한 펍의 주인아주머니는 하룻밤 잠자리와 아침식사를 제공해줬을 뿐 아니라 스페인에 있는 자기 엄마의 집까지 소개해줬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오스트리드 아줌마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실을 사용하게 해주고 괜찮다면 이틀 더 묵어도 좋다는 쪽지를 남겼다. 스웨덴에서 만난 이녹 할아버지, 울레 할아버지와는 놀이동산을 함께 방문해 하루를 즐겼다. 영국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친구 요스트와 에릭은 네덜란드의 한 도시 홀라에서 다시 만나 각자의 여행 추억을 나누기도 했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여행을 도와주고, 응원해주며, 믿음을 선물해줬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니까 제 행색을 보면 알잖아요. 자전거를 탄 동양인 여자가 꾀죄죄한 몰골로 노숙까지 하니까 오히려 그런 모습 때문에 신뢰가 쌓인 것 같아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게 남의 일 같지 않거든요.”
김씨는 자전거 여행을 하기에 인프라가 잘 갖춰진 덴마크를 최고로 꼽았다. 또 맛있는 맥주와 EU본부가 있는 아기자기한 도시 벨기에 브뤼셀도 잊을 수 없다. 결국 김씨는 인터뷰 직후 다시 유럽으로 떠나 현재 영국에 머물고 있다. 취업준비생인 그는 “6개월 전 갈 생각이었으나 대학 졸업 준비 때문에 늦어졌다”며 “취업하면 한동안 이렇게 긴 여행을 하기 어려울 테니 유럽 친구들을 다시 한번 만나야 한다”라며 웃었다. 연말쯤 한국에 돌아올 계획으로 그때까지 아직 못 가본 곳들을 다 둘러볼 생각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란 노래 가사처럼 그의 최종 목표는 자전거로 세계를 달리며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는 것이다. 캐나다, 미국, 남미, 호주, 아프리카까지. 사바나에서 달리는 얼룩말 옆에서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고 싶다는 그의 꿈이 꼭 이뤄지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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