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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 김영재 할머니의 바늘과 실로 이룬 60년

“젊은 날 14년간 발길 끊은 남편 기다리며 바느질”

글 | 한경심 자유기고가 사진 | 박해윤 기자

2012. 02. 15

‘조침문(弔針文)’을 지은 유씨(兪氏) 부인은 일찍이 남편을 잃고 슬하에 자식도 없어 바느질로 시름을 잊었노라고 했다. 침선장 김영재씨(75)는 잘생긴 남편에다 딸을 여섯이나 뒀다. 그러나 유씨 부인처럼 그도 오랜 세월 독수공방하며 바느질로 마음의 위로를 얻었고 생계도 해결했으며, 또한 ‘쟁이’로서 창작의 기쁨도 맛보며 살았다. 그러는 사이 그는 바느질 명장이 됐고, 인생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창작열을 불태웠다.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 김영재 할머니의 바늘과 실로 이룬 60년


그에게 ‘영재(永才)’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였다. 손녀가 부디 재주 있는 사람이 되라고 지은 이 이름은 그의 인생을 정확하게 예언한 셈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바느질과 염색, 옷 짓기를 좋아했고 뛰어난 눈썰미로 옷이라면 뭐든 한번 보기만 하면 그대로 만들어내는 솜씨를 타고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명딸인 그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버지는 그 타고난 재주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여자가 재주 많으면 박복하다고, 그 재주로 밥 빌어먹는다고… 제가 바느질하고 옷 만들기 좋아하는 걸 보고 아버지는 걱정을 참 많이 하셨지요. 지금도 힘들 때면 문득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할아버지의 예언이 정확했듯, 아버지의 염려 역시 그대로 맞아떨어져 그는 결혼하고 삯바느질로 혼자 아이들을 키워냈다. 그러나 그 ‘박복함’ 덕분에 그토록 좋아하는 바느질이 그의 평생 업이 됐고, 결국 명장에 올랐으니 세상에 행운과 불행이란 본래 둘이 아닌 모양이다.

양재학원 다닌다고 딸에게 재떨이 던진 아버지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 김영재 할머니의 바늘과 실로 이룬 60년


전남 광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딸을 밖으로 내보내기 싫어했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집 울타리 안, 어른들 아래에서 음전한 규수로 커온 그는 나중에 결혼해서도 가정을 등한히 하는 남편에게 따져 묻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도 단 한 번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있다. 열아홉 살 무렵, 광양 군수의 딸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문을 연 양재학원에 다닌 것이다.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어요. 학생이 예순 명쯤 됐는데 그때 처음으로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네요.”
하지만 그는 열다섯 살에 이미 검정콩을 삶아 자기가 입던 명주저고리를 염색하고 짧은 소매에 단을 이어 붙이고 풀까지 먹여 할머니의 칭찬을 들은 바 있고, 열여덟 무렵에는 그 어렵다는 호주머니도 단번에 만들었다.
“어머니가 재봉틀 돌리는 것을 많이 봐온 덕택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재봉틀이 귀해 동네 사람들이 옷감을 들고 부탁하러 많이 왔어요. 치마저고리도 많이 지었지만 남학생 교복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옷을 만들어주면 부탁한 사람은 우리 집에서 한나절 일을 해줬어요. 예전에는 그런 품바꿈(품앗이)이 많았지요.”
그 재미난 양재학원도 몇 달 못 돼 끝났다. 아버지가 다 큰 처자가 밖으로 나돌면 헛바람 든다며 극구 반대한 것이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는 당신 말을 듣지 않고 학원에 다니는 딸에게 화가 나 나무 재떨이를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왼쪽 어깻죽지에 맞았다.
“바느질하면 오른쪽 어깨와 팔이 아프지 왼쪽은 아플 일이 별로 없는데, 10년 전부터 왼쪽이 자꾸 아픈 거예요. 주사 맞고 물리치료를 해도 잘 낫지 않아서 가만 생각해봤더니 그때 아버님께 맞은 것이 떠오릅디다.”
그 당시는 까맣게 멍이 들었다가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아픔이 40년도 더 지나 되살아나다니 사람의 몸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어깨 통증은 그가 무리할 때면 어김없이 도져서 그에게 경고를 해준다. 그 옛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 김영재 할머니의 바늘과 실로 이룬 60년


아버지의 야단이 좀 수그러든 것은 동네 어른 환갑 잔치 때부터라고 한다. 열아홉 살이었던 그가 모시로 중의, 적삼에 두루마기까지 일습을 해 보내자 양복점을 하던 그 어른이 보고 감탄을 했다. “바느질 잘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다”고. 또 동네 친구 시집갈 때 녹의홍상 새색시 옷을 지어줘 크게 칭찬받았던 그는 스무 살, 자신이 혼례 치를 때엔 자기 옷은 물론이고 시부모 옷까지 죄다 직접 지어갔다. 남편은 그보다 네 살 많은 해군 장교였다.
“본래 해군이 멋진데, 이 사람은 멋쟁이 중에 멋쟁이였어요.”
멋쟁이 남편은 한량이었다. 남편 따라 경남 진해에서 신혼을 보냈는데 이미 남편을 둘러싸고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따질 줄 몰랐다. 진해에서 2, 3년 살다 남편은 제대하고 부산으로 와 해양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해군 경비선을 타고 나가면 보름씩 걸리곤 했어요. 그때 동네 할머니들이 옷 뜯어서 손질할 때 제가 꾸며드리곤 했지요. 그러면서 차차 바느질을 업으로 하게 된 겁니다.”

남편은 해양경찰도 그만두고 이번에는 외항선을 탔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올까 말까 했다. 그는 남편을 기다리며 바느질을 시작했고, 그사이 부산이 제2의 고향이 됐다. 본격적으로 바느질을 하게 된 것은 당장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남편은 월급을 가족에게 보내지 않고 혼자 다 썼다. 그러나 더 큰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항선을 그만둔 남편이 서울로 올라가버린 것이다. 막내가 겨우 세 살 때였다. 이후 14년간 남편은 발길을 끊었다.
“어떻게 견뎌냈느냐고요?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그런 건 묻지 않고 그저 바느질만 했습니다. 바느질이 수양이 되거든요. 작품을 만들어낼 때마다 기쁨이 있으니까 또 견딜 수 있었고요.”
친정아버지는 과부 아닌 과부가 된 딸을 위해 쌀과 보리, 깨 등 농사지은 것을 선주인 이모네 배에 바리바리 실어 부산 자갈치까지 보내줬다. 재주 많은 딸이 결국 그 재주로 벌어먹는 모습을 보게 된 아버지는 해 질 무렵이면 축담 섬돌에 앉아 곰방대를 하도 탁탁 쳐대 담뱃대 목이 휘어지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곰방대 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 영감이 또 딸 생각하나 보다”고 수군거렸다. 그가 가끔 친정에 가면 동네 사람들은 그를 붙잡고 ‘야야, 니 아버지 담뱃대 봤나?’ 하고 묻곤 했다.

“내 덕에 당신이 명장 됐다”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 김영재 할머니의 바늘과 실로 이룬 60년


남편의 긴 부재(不在)와 생계 문제, 그리고 마음의 고통. 남편이 월급을 꼬박꼬박 가져다준 가정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는 행복한 살림살이에 푹 빠져 바느질은 그저 취미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명장이 된 그를 보고 “내 덕에 당신이 명장 됐다”고 했다. 슬프지만 사실이었다. 그 긴 번민과 시름의 세월 속에서 그는 마음을 다잡으려 바느질을 했고, 당장 생계와 아이들 교육을 위해 바느질을 했다. 때마침 1970년대와 1980년대 경제력이 팽창하던 시기, 사람들은 고운 치마저고리나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차려입는 멋을 부리기 시작했고 명절이나 결혼식, 졸업식, 사은회 때면 우리 옷을 갖춰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꼼꼼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저절로 이름이 나 부산에서 옷 좀 입는다는 부인네는 모두 그의 가게를 찾았다.
어느 날 남편은 병들고 지친 몸으로 조강지처에게 돌아왔다. 그는 이번에도 남편의 건강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몸이 완전히 망가져 돌아왔죠. 그때 옷 한 벌 짓는 삯이 2천5백원이었는데, 한 해 약값으로 2백50만원이 들어갔어요. 좋다는 보약은 뭐든 다 썼습니다.”
그의 정성에 남편은 차츰 건강을 회복했고, 동무들과 등산을 다니며 즐겁고 편하게 그의 곁에서 지냈다. 여름이면 모시옷을 날아갈 듯 지어 입혀 왕년의 멋쟁이로서 위신도 세워줬다. 사람들은 “보살이 따로 없다”고 감탄하기도 했고 “이제는 당신이 남편을 내칠 차례”라고 충고하는가 하면 “뭐가 예뻐서 그렇게 좋은 옷을 해주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얌전한 그도 당차게 대꾸했다.
“내가 남편을 위해 사는데 왜 당신이 상관하느냐.”
그러면 대부분 아무 말도 못했다. 이처럼 남편을 원 없이 받들고 살았다. 젊은 날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아내 노릇을 남편의 마지막 15년 동안 이렇듯 곱고 진하게 해낸 것이다. 남편이 눈을 감자 비로소 참 많이 울었다.
“제 인생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겠지요. 제가 살아온 나날이 서러웠는지, 눈물이 참 많이 나오더군요.”
이 울음은 서러움 이상의 울음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 남편이 떠났기 때문에, 그리고 남편이 돌아왔기 때문에, 또 돌아온 남편을 신혼의 새색시처럼 극진히 봉양했기에 그는 비로소 울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식들은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걸 싫어한다”면서도 그는 자신의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내보인다. 여자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떳떳하고 아름다운 삶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남편의 부재는 그의 바느질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말마따나 평범한 남편과 함께였다면 과연 그의 바느질이 이렇게 무르익을 수 있었을까? 그가 바느질로 일가를 이룰 무렵 남편이 돌아온 것 역시 그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남편이 돌아온 뒤 그는 완성된 바느질 솜씨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한국의상협회 부산 지회장을 맡고, 우리 옷 공모전에서 금상, 한국전통의상 공모대제전에서 특별상을 받았으며, 한국의상협회 기술지도 이사 등을 거쳐 한국과 독일에서 한복 발표회를 갖는 등 활동 무대를 넓혀나갔다. 1997년에는 부산한복협회를 창립하고 드디어 섬유 분야 명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 김영재 할머니의 바늘과 실로 이룬 60년

2월6일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는 그가 60년간 만들어온 작품 3백여 점을 선보인다.



세월이 갈수록 활발한 활동 “할매, 파이팅!”
쉰 살 무렵부터 시작된 그의 활동은 세월이 갈수록 활발해졌다. 이미 바느질계에서 상도 받고 감투도 썼지만 예순 나이에 기능 경기 대회에 도전했다.
“기능 경기 대회에 나가려면 재단을 도식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름질하는 법은 제 머릿속에 다 들어 있지만 그것을 치수에 따라 도면으로 그려낼 줄은 몰랐지요.”
자정까지 손님 옷을 만들고 새벽 2시까지 책을 들고 씨름한 그는 기술고등학교나 대학 복식학과를 나온 손자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시험을 치렀다. 시험장 밖 복도를 지나던 고등학생들이 창 너머로 그를 보고 “할매,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이미 한국의상협회 기술지도 이사였던 그가 뒤늦게 기능 경기 대회에 나간 것은 명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회 실적이 있으면 명장 심사에서 우선 20점을 받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그해 명장이 됐다. 명장이 된 뒤에도 그의 학구열은 식지 않아 단국대 사회교육원에서 전통 복식 이론을 공부하고 출토 유물 재현 과정도 마쳤다. 손님 옷도 짓고 학교 과제나 출토 유물을 재현하노라면 밤을 꼴딱 새우기 일쑤고, 서울까지 오가는 생활이었지만 그는 힘든 줄 몰랐다.
“참 이상한 것이, 돈 때문에 옷 만들 때는 지겨울 때가 있어도 유물 복원이나 돈 안 나오는 작품 만들 때는 그렇게 재미나고 신날 수가 없어요.”
우리 옷에 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염색 공부에서도 알 수 있다. 한동안 무형문화재가 만든 1kg에 10만원씩 하는 염료를 사다 썼는데 양산 통도사 서운암의 스님에게 쪽 염색 강의를 들은 뒤 직접 염색을 하기 시작했다.
“첫해는 스님이 가르쳐줬지만 그 다음부터는 배우는 사람들끼리 한 달에 한 번 모여 염료를 채취하고 공부도 하면서 익혀나갔습니다. 그참에 우리나라 산야를 참 많이도 다녔네요.”
멋진 검정색을 내는 신나무 이파리를 따기 위해 초목이 가슴까지 올라오는 태백산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간 적도 있다. 그렇게 한 염색 공부가 10여 년. 그는 홍화씨로 물들인 여린 살굿빛부터 신나무의 검정빛까지 갖가지 색깔의 옷감을 펼쳐 보였다. 황기, 고추씨, 빛남, 쪽, 황토, 밤꽃, 송이, 오미자, 양파, 오배자, 곰피, 치자, 느릅나무, 꼭두서니, 소목, 참졸, 쑥, 소나무 껍질, 밤 껍질까지 갖가지 재료로 손수 물들인 옷감이다. 식물뿐 아니라 광물, 임균류까지 염색 재료로 써온 조상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옷감으로 그는 염색전을 열기도 했다.
또한 출토 유물을 재현하면서 이름 모를 옛 사람의 솜씨에 혼자 감탄하며 배우는 바가 많다고 한다. 고운 쑥색 당의(재현품)를 보여주며 그는 얇은 옷감으로 지었는데도 당의 끝자락이 말려 올라가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테두리를 네 번이나 감아 넣었더라고요. 이렇게 끝을 단단히 마무리 지어주니 하늘거리는 옷감인데도 말려 올라가지 않는 겁니다. 세 번만 접었어도 몇 번 빨면 아마 말려 올라갔을 거예요.”
이 당의를 비롯해 유물 9점을 재현할 때 그는 돈 대신 이 당의 옷감을 요구했다. 은은한 무늬가 들어간 이 옷감은 박물관에서 특별히 주문해 짠 귀한 옷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옷은 중국이나 일본 옷처럼 요란한 무늬를 쓰지 않아 화려하기보다 단아한 편인데, 바느질만큼은 세계 어느 옷보다 섬세하단다.
“서양 옷이나 일본 옷을 살펴보면 거의 홈질 하나로 만들었는데 우리 옷은 홈질 박음질에다 감치고 누비고 시치고 공그르기까지 바느질이 매우 다양해요. 그래서 보이는 디자인은 단순할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바느질만큼은 그렇게 세련되고 섬세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함과 섬세함이 어우러진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옷이라는 말이다.

“사극에 나오는 옷이요? 저는 그런 옷 안 만들어요”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 김영재 할머니의 바늘과 실로 이룬 60년

김영재씨는 1997년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로 선정됐다.



요즘 사극을 보면 과거에 비해 의상이 매우 화려하고 다양하다. 시청자들은 볼거리가 많아 좋겠지만 전문가인 그의 시각은 다르다.
“복식 형태는 맞는데 만든 방식이 영 아니에요. 언젠가 인기 사극에 썼던 옷을 누군가 갖고 와서 봤는데 아이고, 그건 옷도 아니었어요. 보기만 곱지 안감도 안 쓰고 만들어낸 그냥 조각에 가까웠죠. 한번 촬영하면 그만인 옷이니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자기 손으로 만드는 옷 하나하나 모두 작품으로 여기는 그로서는 그런 소모용 옷을 도저히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명실공히 이 시대 첫손가락에 드는 바느질 솜씨지만, 명성과 상업적 잣대로 보면 그는 오히려 비주류에 가깝다. 2005년 APEC 정상 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정상의 두루마기를 바느질 장인들이 나눠서 지었을 때도 그 일을 총괄한 이는 이름난 한복 디자이너였지만 제일 중요한 노무현 대통령의 두루마기는 그가 맡았다. 사실 노 대통령과 그는 이전에도 인연이 좀 있었다.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노 대통령의 처제와 친구였던가 봐요. ‘네 형부가 대통령 되면 내가 빚을 내서라도 옷 한 벌 해준다’고 큰소리쳤다가 막상 대통령이 되자 제게 달려왔어요.”
그는 쪽물 들인 바지저고리와 홍화로 노랗게 물들인 마고자(홍화는 농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진다), 오디로 염색해 붉은 기운이 도는 은회색 두루마기를 선물했는데 두루마기를 본 노 대통령은 “딸 시집보낼 때 입으면 좋겠다!”고 감탄했단다. 그는 대통령 부인에게도 홍화로 붉게 물들인 두루마기를 선물했다.
부산에 정착해 줄곧 대신동에 자리 잡은 그의 가게는 지금 눈으로 보면 허름하기 짝이 없고, 전시해둔 옷 역시 요즘 유행하는 날아갈 듯 새뜻한 옷이 아니라 점잖고 단아할 뿐이다.
“연예인들이 입고 나오는 옷을 보다가 우리 집 옷을 보면 얼마나 후줄근하겠습니까? 쇼윈도 꾸미는 것이요? 왜 헛돈을 들입니까? 그런 데 돈 들이면 공임만 비싸지죠.”
안 그래도 간판에 적힌 ‘침선 명장’이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비싼 집인가 보다 하고 차마 들어오지 못하지만, 들어온다고 해도 요즘 유행하는 화려한 옷과 다른 그의 옷에 눈길을 주기는 힘들 거라고 했다. 마침 30년 단골이라는 허문엽씨가 혼인을 앞둔 아가씨와 그의 어머니를 이끌고 가게에 들어섰다. 허문엽씨는 ‘김 할머니’ 옷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다.
“할머니 옷은 싫증이 안 납니다. 요즘 옷은 당장은 예뻐도 조금만 지나면 유행에 뒤떨어져 못 입게 되는데, 이 집 옷은 두고두고 입을 수 있지요. 우리 자식과 며느리, 사위는 모두 이 집에서 옷을 했는데, 어떤 자리에 가도 빛이 납니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옷값은 거품이 없어서 좋다’고 덧붙였다. 천연 재료로 손수 정성 들여 염색한 옷감으로 그에게 옷 한 벌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의외로 싸서 모시 같은 특별한 천이 아니라면 1백만원 선이다. 도매시장도 바지저고리 한 벌 값이 2백50만원 선인데 서울 강남의 청담동에 들어선 화려한 가게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질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명장이 직접 지은 옷을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다. 요즘은 결혼을 앞둔 젊은이나 중년 부인들이 우리 옷을 잘 맞추지 않고 잠깐 빌려 입거나 결혼박람회에 나온 화려한 한복을 선호하는 풍토다.
“유행하는 옷은 당장 보기 좋아도 전시된 것처럼 입으려면 손질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고 몸에도 편치 않습니다. 결혼식 때 말고 다른 자리에 입고 나가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더욱 우리 옷을 입지 않게 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옷은 미래 디자인이다

대한민국 한복 명장 1호 김영재 할머니의 바늘과 실로 이룬 60년


2월6일 부산시민회관에서 그의 바느질 인생 60년을 정리한 전시회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 그는 속옷부터 배자(조끼) 수의까지, 삼베 무명부터 비단 양단까지, 서민의 잠방이부터 임금의 용포까지, 어린이 버선부터 부녀자의 아얌(장식 댕기가 달린 방한모자)까지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 3백여 점을 선보인다. 작품 욕심이 많은 그는 이번 전시회에 새로 선보일 철종 임금의 동다리옷(무관복)을 재현하느라 바쁘다. 이 추운 날씨에 제대로 된 빛깔을 얻기 위해 염색을 몇 차례 시도하는가 하면, 모자 장식에 들어가는 옥을 구입하느라 돈도 많이 들었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젊은이 못잖은 열정과 기력을 뽐내는 그의 건강 비결은 아침마다 목욕탕에 다녀오는 것이라고. 이제 눈이 침침해져서 손바느질 조각보를 만들기 힘든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만든 조각보의 땀은 얼마나 조밀한지 그저 감탄만 나온다. 우리 조각보는 그 독특한 색감과 섬세함으로 외국에서 인기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재봉틀로 후루룩 박은 것까지 가져다 파는 이도 생겼다고 한다.
“그래도 찾는 이가 많으니까 그리 하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정도를 벗어나면 결국 공멸하게 됩니다. 또 어떤 무형문화재는 털옷을 만들 때 털을 풀칠해 붙여야 할 것을 본드로 붙인다는 소문도 있어요. 젊은 후학들이 실망해 그만두는 것을 몇 번이나 봐왔습니다.”
우리 옷은 뜯었다 다시 붙일 수 있는, 언제나 재생 가능한 옷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런 ‘본드질’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우리 바느질의 미래를 낙관한다. 후학 가운데는 돈 잘 버는 사업가도 나오겠고, 말 잘하는 연구가도 나오겠지만, 자신과 같이 그저 일 잘하는 장인도 틀림없이 나올 테니까. 그런 후진을 위해 그는 자신의 전 작품을 대구섬유대학에 기증하기로 약조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단 한 가지 소망이라면 부산 지방문화재가 되는 일이다. 화려한 명성도 돈도 크게 안달 내지 않던 명장은 의외로 문화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기술에 목숨을 거는 장인은 역시 장인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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