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중순 열린 재즈콘서트 ‘윤희정·프렌즈’ 100회 무대에서 윤희정 외에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은 인물이 또 있다. 블랙 가스펠을 살사로 편곡해 열정적인 안무와 함께 폭발적인 가창력을 선보인 딸 김수연(31)이 그 주인공. 2003년 4인조 그룹 ‘버블시스터즈’로 데뷔한 그는 2005년 그룹에서 탈퇴한 이후 보컬트레이너로 활동하다 지난해 가스펠 그룹 ‘갓 솔저’를 결성해 팀의 리더이자 보컬로 활약 중이다. 이번 ‘윤희정·프렌즈’ 무대에서도 ‘갓 솔저’ 팀들과 함께 멋진 공연을 선보였다.
외모며 노래 부르는 모습까지 엄마 윤희정을 쏙 빼닮은 김수연은 자신의 롤 모델로 엄마를 꼽는다. 하지만 그에게 어머니는 뛰어넘기 힘든 큰 산과도 같았기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엄마와 나란히 노래 부른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노래 잘 부른다는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랐음에도 엄마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작아졌다. 10년 동안 엄마를 따라 ‘윤희정·프렌즈’ 무대에 서왔지만 보컬로 마이크를 잡은 지는 불과 몇 년이 안 된다. 그전까지는 조명도 들어오지 않는 무대 끝 편에서 코러스만 넣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솔로곡 하나 정도는 부르게 해줄 줄 알았는데, 아무리 딸이어도 예외가 없더라고요(웃음).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무대 뒤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았죠. 그러다 처음으로 노래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도 딱 한 곡만 허락해주셨어요. 객석에서 앙코르를 외쳐도 더는 기회를 주지 않으셨죠. 어쩌다 한번 앙코르에 응할 때는 1절만 불러야 했어요(웃음).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엄마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공연의 주인공은 엄마지 제가 아니잖아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어머니 덕분에 그는 뮤지션으로서의 겸손함부터 배웠다. 자신감이 충만하면 자칫 자만심에 빠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에서 오버해서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진정한 음악인이라면 대중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걸 엄마에게서 배웠다”고 말했다.
한 번 들으면 악보 없이 피아노로 연주
김수연은 갓난아기 때부터 재즈를 듣고 자랐다. 심지어 자장가나 동요도 엄마가 부르면 재즈가 됐다. 그는 “남들은 ‘잘 자라 우리 아가~’하고 평범하게 부르는 자장가를 엄마는 ‘좔~ 자라~아 우리~ 아가~’ 하고 부르셨다”며 웃었다. 어린 시절 집 안에는 언제나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고, 엄마가 집에 없을 때면 피아노를 치면서 오빠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지루함을 달랬다. 피아노 학원에는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익혔고, 한번 들은 멜로디는 그대로 연주하는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이상한 아이라고 놀리기도 했어요(웃음). 또 어떤 친구는 집에서 악보를 보고 연습해 와서는 처음 듣는 척한다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대학생 때까지도 악보를 볼 줄 몰랐어요. 피아노는 그냥 귀로 듣고 손으로 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엄마도 한번 들은 음악은 기타나 피아노로 바로 연주하셨기 때문에 어릴 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또 동요 부를 때 엄마처럼 텐션을 넣어서 그루브를 타고 부르는 게 편하더라고요(웃음).”
가수 윤복희는 어린 시절 김수연을 보고 “물건이 나왔다”며 반가워했다고 한다. 집으로 놀러 온 윤복희는 윤희정과 함께 재즈를 부르며 흥을 돋우곤 했는데, 그 옆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김수연은 두 사람의 창법을 흉내 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유난히 그를 예뻐했던 윤복희는 그가 ‘버블시스터즈’로 첫 무대에 서던 날 TV로 보고는 깜짝 놀라 윤희정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고, 결국 저놈이 가수가 됐구나” 하면서 반가워했다고 한다. 요즘도 윤복희는 미니 홈피 쪽지를 통해 “사랑하는 조카, 수연아~” 하고 그에게 종종 안부를 묻는다. 김수연은 “복희 이모와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연락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음악적 소질을 타고났음에도 김수연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쉽게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칭찬에 인색했던 윤희정은 요즘도 밖에서는 딸 자랑을 해도 집에서는 그의 실수를 냉철하게 집어내 질책할 때가 더 많다. 안양예고 재학 시절 같은 학교에 다니던 가수 진주가 윤희정에게 보컬 레슨을 받은 적이 있는데, 하루는 그 앞에서 “이 친구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너는 뭐냐”며 면박을 줘 상처를 받은 적도 있다고.
“제가 잘못하면 바로 야단을 치셨지만 교육적으로 속박하거나 강요하는 스타일은 아니셨어요. ‘뭐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주의여서 인문계가 아닌 예고 시험을 보겠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으셨죠. 보통 엄마들은 자식의 진로를 가장 걱정하고 어떻게든 길잡이가 돼주려 애쓰는데, 저희 엄마는 그런 법이 없었어요. 고3 때도 학원이며 과외는커녕 문제집 한 권도 안 사주셨어요(웃음). 대신 평생 음악 하면서 제가 쫓아갈 길을 몸소 보여주신 것 같아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법이잖아요.”
바쁘기만 한 엄마에 대한 불만 이제는 예술로 인정
김수연은 어린 시절 도시락도 제대로 싸주지 못하는 바쁜 엄마를 보며 서운함과 불만을 느낀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한 여자로서 그리고 음악가로서 엄마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고백한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면서 엄마를 향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나날이 커진다고 한다. 그는 “이제야 철이 드는지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고 진심으로 엄마를 응원한다”며 수줍게 웃었다. ‘엄마와 딸’에서 이제는 친구이자 동료 사이가 된 두 사람은 수시로 음악적 견해를 주고받는다.
“더는 주눅 들지 않고 엄마와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다는 게 가장 행복해요(웃음). 제가 만든 노래를 엄마한테도 자주 들려드리는데, 휴대전화를 스피커폰으로 켜놓고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면 엄마는 이상한 부분을 족집게처럼 잡아내세요. 엄마와 함께 음악을 공유하고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요즘 들어 부쩍 깨닫고 있어요. 시집갈 나이가 돼서 그런가 봐요(웃음).”
엄마와 딸이 닮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윤희정과 김수연은 유난히 공통분모가 많다. 먼저 음악적으로 ‘가스펠’을 들 수 있다. 윤희정은 1971년 KBS 전국노래 대항전 연말결산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가수로 데뷔했는데, 재즈 가수가 되기 전까지 가스펠 가수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김수연 역시 가스펠 그룹 ‘갓 솔저’를 이끌고 있으니 음악인으로서의 두 사람의 시작점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스펠을 의도하고 시작한 건 아니다. 20대 중반 무렵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 종교에 의지했고 보컬트레이닝을 하면서 만난 제자 중 종교적으로 뜻이 맡는 사람들과 팀을 결성하게 됐다.
“우리나라에 노래로 찬양하는 팀은 많아도 저희처럼 그룹 개념으로 완벽하게 팀을 이룬 경우는 흔치 않아요. 저는 비록 연극영화과를 졸업했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어서 실력 면에서도 최고라고 자부해요. 6월 중순 첫 콘서트를 했는데, 객석 5백 석이 꽉 찼고 관객 분들이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셔서 몸둘 바를 몰랐어요. 사실 콘서트를 준비하느라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힘들었는데, 첫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깨달았어요. 15년 넘게 혼자 공연을 기획해오고 계신데, 한번 무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무리한 나머지 링거 주사까지 맞았거든요(웃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덕분에 ‘갓 솔저’는 조만간 콘서트 수익금으로 첫 앨범을 발매한다. 이 일로 김수연은 더 바빠졌다. 이번 앨범에서 그는 작사·작곡·프로듀싱을 맡았다. 작곡과 작사도 따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가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한다. 그는 ‘버블시스터즈’ 1집 앨범에서도 인트로와 아우트로를 작사 작곡 했고, 드라마 ‘도쿄여우비’ OST인 ‘절연’의 가사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그 밖에 앨범 보컬디렉팅 및 레슨도 여러 차례 했는데 특히 ‘브라운 아이드 걸스’ 앨범에 수록된 대부분의 노래를 디렉팅했다. 연기자 보컬트레이너로도 유명해서 탤런트 한예슬, 한지혜, 배두나, 김사랑 등이 그에게 노래를 배웠다.
노래 실력에 손재주까지 쏙 닮은 붕어빵 모녀
어린시절 엄마를 넘기 힘든 큰 산이라 생각했다는 김수연은 이제는 엄마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음악적 견해도 주고받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김수연은 엄마의 손재주도 쏙 빼닮았다. 어려서부터 인형 옷을 만들어 입히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은 빅 사이즈 옷을 전문으로 하는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직접 옷을 디자인하고, 헤어핀 등 소품도 직접 만든다. 윤희정 또한 젊은 시절 10년 넘게 옷가게를 한 적이 있다.
“어릴 때 엄마가 하는 옷가게로 탤런트 이모들이 많이 놀러왔던 게 기억나요. 사미자, 김미숙, 김일란 선생님 등이 자주 오셨는데 제가 있으면 ‘노래 한번 해봐라’ 하고 손에 용돈을 쥐여주곤 하셨어요. 그러면 저는 김완선 노래를 춤까지 추면서 열심히 불렀죠. 엄마는 요즘도 모자며 액세서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시고 무대의상도 직접 리폼하세요. 솜씨가 좋으니까 요리도 얼마나 잘하시는지 몰라요. 물론 시간이 없어 안 하실 뿐이지, 한번 했다 하면 식당 음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맛나게 잘하세요. 엄마는 정말 ‘센스녀’예요(웃음).”
올가을 김수연은 다시금 대중가수로 돌아간다.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을 맺고 솔로 앨범을 준비 중이다. 현재 곡 작업이 한창인데, 타이틀곡은 대중성을 고려해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가 다시 대중가요를 부르기로 한 이유가 궁금했다.
“엄마는 인기나 유명세에 연연하지 말고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라고 말씀해주시는데, 솔직히 저는 더 늦기 전에 뭔가를 이루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게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인 것 같아서요. 지금 하고 있는 음악도 물론 좋지만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또 많은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감명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가수로서 엄마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윤희정이 평생 재즈를 부른 것과 달리 R·B 솔, 재즈, 살사, 펑키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전히 섭렵함과 동시에 대중성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며 머쓱한 듯 웃었다.
“엄마처럼만 하면 될 것 같아요(웃음). 엄마가 노래를 부른 지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하신 적이 없어요. 공연을 앞두고는 더욱 심한데, 공연 하루 전까지도 새벽에 노랫말이 빼곡히 적혀 있는 노트를 펼쳐놓고 동그라미를 쳐가며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암기하세요. 대단한 열정이라고 생각해요. 엄마의 내공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연습하고 노력하는 모습만큼은 하루 빨리 뛰어넘어야 할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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