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63빌딩 옆 오피스텔에서 ‘동이’ 이병훈 PD(66)를 만났다. 6년 전 그의 소속사 김종학프로덕션에서 내준 개인 작업실로, 이곳에서 그는 ‘서동요’ ‘이산’ ‘동이’를 만들었다. 한동안 ‘동이’ 촬영 때문에 바빠 오랜만에 사무실에 들렀다는 그는 “취향대로 골라 마시라”며 여러 종류의 차를 쌓아둔 선반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가 꺼내든 건 스틱형 믹스커피. 물을 붓기 전 양손에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부었다 덜었다 하는 모습이 무척 진지해 보였는데, 믹스에 섞여 있는 크림을 덜어내고, 커피 양도 반으로 줄이는 거라 했다. 촬영 때는 보통 하루에 스무 잔, 평소에는 열 잔 정도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한 번 마실 때 양이라도 줄이자는 생각으로 택한 방법이라고 한다.
“촬영 때는 카메라 팀에서 커피를 챙겨 주는데, 미안해서 내가 일주일에 만원씩 내요. 그랬더니 더 열심히 커피를 갖다 주는 거야. 하하. 그러니 난 또 돈을 안 낼 수 없지. 그러면서 계속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예요. 몸에 안 좋은 건 알지만 촬영 중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으려면 커피를 안 마실 수가 없어요.”
그는 지난 7개월간 ‘동이’를 찍으면서도 수천 잔의 커피를 마셔야 했다.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자는 육체적 고통, 창조적 작업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이번에는 스트레스 강도가 꽤나 심했다고 한다. “역사 왜곡이다. 과거 작품 짜깁기다” 등 네티즌의 질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넷상의 악의적인 글들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냉정한 비판은 참을 수 있는데, 악의적인 글들은 화가 나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MBC 최악의 드라마다’ ‘막장드라마의 표본이다’ ‘이병훈은 더 이상 연출을 하면 안 된다’등 잔인한 글들을 남기더군요. 물론 제가 만드는 작품이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최악’이니 ‘막장’이니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며칠 전 시사 프로그램에도 나왔지만 ‘얼굴 없는 살인자’ 악플러들의 행태가 너무 심각한 것 같아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무시할 수 없는 게 있더라고요.”
악플로 마음고생, 건강 허락한다면 한 작품 더 하고 싶어
‘동이’는 방송 내내 20~30%대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며 월화극 왕좌를 차지했지만 이병훈 PD의 히트작이었던 ‘대장금’ ‘허준’ 등에는 다소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그의 아내는 “‘동이’는 실패한 축에 속하는 작품이다. ‘다음번에는 진짜 실패할지도 모르니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아내의 말에 일정 부분 수긍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일을 놓을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밝혔다.
“아내는 늘 제 걱정이죠. 나이 생각 안 하고 몸을 혹사시킨다고요. ‘대장금’ 때는 팔이 부러졌고, ‘서동요’ 때는 바위에서 거꾸로 떨어져 머리를 18바늘 꿰맸어요. ‘이산’ 때는 크레인에 이마를 부딪쳐서 12바늘을 꿰맸고요. 보다 못한 아내는 ‘이산’ 끝나고 진지하게 ‘한 작품만 더 하고 그만두라’고 하더군요. 안 그러면 이러다 불구자 되겠다고요(웃음). ‘동이’ 시작할 때도 체력이 허락한다면 한 작품 더 하겠다고 아내한테 미리 말해두긴 했어요.”
‘동이’는 숙종과 동이의 ‘영원한 사랑’으로 묘사되며 훈훈하게 마무리됐다. 동이 묘 근처에서 송충이를 잡고 있던 한 소녀가 왕이나 왕비처럼 귀한 사람이 되는 꿈을 꾸며 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떠난 뒤 누군가 동이를 부르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숙종과 동이가 재회한 것.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포옹한 뒤 어딘가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모습으로 끝이 났는데, 이를 본 시청자들은 “두 사람이 천국에서 사랑을 이뤘다. 감동적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제가 생각한 엔딩은 동이가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을 숙종과 함께 되돌아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시청자들이 해석을 더 잘해주셨어요. 처음에는 그 장면을 동이 아버지가 떨어져 죽은 벼랑바위에서 다시 찍으려고 했는데 그날 기상상태가 안 좋아서 경주 시내에 있는 반월성에서 촬영을 마쳤어요. 벼랑바위는 그 전에도 3번이나 갔다가 도로 내려온 곳이에요. 경주 오봉산에 있는데 버스가 정상까지 못 올라가 작은 봉고차로 연기자가 분산해서 20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곳인데, 갈 때마다 안개가 껴서 결국 사흘 만에 촬영을 마친 적이 있죠.”
드라마 어디에나 ‘옥의 티’는 있는 법. ‘동이’ 역시 드라마 초반에 궁중악기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가야금을 전부 거꾸로 놓고 촬영했다가 국악 전문가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 뒤로 촬영 때마다 국악 전문 교수가 와서 악기 배열이며 순서 등을 점검해줬다고. 또 마지막 회에서는 낮에 촬영을 시작한 장면이 저녁까지 늘어지는 바람에 CG작업으로 낮처럼 보이게 바꿨다고 한다. 이병훈 PD는 “드라마 찍으면서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끝도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이란 인물은 당초 장희빈에서 시작됐다. 새 작품을 구상하던 그에게 누군가 장희빈 얘기를 다시 해보자는 의견을 냈는데, 드라마로 벌써 7번이나 나와 식상하다며 거절했다가 장희빈이 아닌 장희빈 시대 등장하는 조연을 찾아보자고 해서 탄생한 게 숙빈 최씨, 동이다. 당시 천인은 이름이 없었기에 동이라는 이름은 작가가 직접 지은 거라고 한다.
“동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모두가 찬성했어요. 순수하면서 동적인 이름이면 좋겠다 싶었는데, 딱 맞아떨어진 거죠. 사극은 시청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게 목표인데, 주인공이 축 처져 있으면 의미가 없어요.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회를 거침없이 헤쳐나가는 인물로 그려져야죠. 가정에서도 밝고 쾌활한 성격의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 분위기가 확 살잖아요.”
동이 한효주에게 “장금이 이영애 반만 닮아 달라” 부탁
이병훈 PD는 생동감 넘치는 동이 캐릭터를 위해, 또 촬영장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촬영에 들어가기 전 주인공 한효주에게 특별 부탁을 했다고 한다. “이영애처럼, 아니 이영애의 반만이라도 해달라”는 거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아프지 말아야 하고, 촬영장에 일찍 나와 다른 연기자와 스태프에게 모범이 돼야 하고, 항상 밝고 예의 바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동이를 따로 불러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너 스스로 훌륭한 연기자로 발전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을 수 있는데 한번 해볼래? 하고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철석같이 대답하더라고요. 그러고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어요. 한 번도 아프지 않았고, 설령 아팠더라도 티 내지 않았을 거예요. 한 번도 지각한 적 없고, 언제나 방실방실 웃고 다녔어요. 역시나 촬영장 분위기는 최고였죠. 물론 나이가 어리다 보니 이영애씨처럼 세심한 부분까지 다 챙기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되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나중에 이영애씨를 만나면 당신과 비슷한 후배가 있다고 얘기해주려고요(웃음).”
그는 장희빈으로 나왔던 이소연에 대한 애정도 감추지 않았다.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이소연과 주고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여준 그는 “드라마가 다 끝났을 때 다른 건 몰라도 ‘동이’를 만난 2010년은 행복했다는 소리는 꼭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촬영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어가는 데는 이병훈 PD 자신의 노력이 가장 크다. 실제로 그는 연기자들 사이에서 인자하기로 정평 나 있다. 물론 촬영 중 연기자나 스태프에게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지만 그러고 난 뒤에는 반드시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 때문이다.
“저도 초년 때는 여유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어요.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은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걸 깨우쳤죠. 제가 화를 한번 내면 갑자기 촬영장 분위기가 아주 나빠져요. 그런 분위기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없죠. 결과물도 분명 좋지 않을 거고요. 제 성격이 이렇다 보니 연기자나 스태프도 신경질적인 사람은 절대 캐스팅 안 해요. 지나치게 후배 닦달하는 연기자, 툭하면 짜증내는 연기자, 폭력 휘두르는 연기자 등은 절대 제 드라마에 나올 수 없어요. 이쪽 일 40년 하다 보면 누가 어떤지 거의 다 알아요. 스태프도 마찬가지예요. 연기자한테 함부로 대하거나 이유 없이 화내면 바로 그 자리에서 아웃이에요.”
작품 마치면 책·드라마 몰아 보느라 한동안 ‘시체’처럼 지내
슬하에 1남1녀를 둔 이병훈 PD는 연출하는 데 있어 가족의 도움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전직 교사인 아내는 평론가 수준이고,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아들은 작가적 견해가 뛰어나고, 결혼한 딸은 냉정한 시청자라고 한다. 그는 “아들이 재미있다고 하면 솔직히 믿음이 안 가는데, 딸이 재미있다고 하면 바로 ‘다음 날 시청률이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한평생 ‘큐 사인’을 보내며 바쁘게 살아온 그는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라고 한다. 다행인 것은 그의 열렬한 팬인 아내가 늘 그의 일을 이해해주고, 그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이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그의 아내는 TBC 방송국 성우로 활동하면서 그를 만났는데 결혼 후 교사로 전업, 재작년에 교단에서 물러났다.
“아내는 제가 부장되고, 국장된 거 별로 안 좋아했어요. 하루는 친한 선배가 저 부장 달아준 거 생색내려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내가 대뜸 ‘저는 부장보다 연출자가 더 좋아요’라고 했대요. ‘대한민국에 부장은 많지만 ‘제3교실(당시 그가 연출하던 드라마)’ 연출자는 한명 밖에 없잖아요’ 하고요(웃음). 요즘도 제가 드라마를 하면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모니터링해요. 젊은 시절 제가 집에 거의 못 들어가도 제가 만든 드라마 보면서 견딘 사람이에요(웃음).”
97년 부국장을 끝으로 MBC를 떠난 그는 55세 늦은 나이에 다시금 연출에 뛰어들었다. 그때 만난 작품 ‘허준’으로 그는 PD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당시 사극에서는 처음으로 현대식 대사를 도입했고, 음악도 젊은이들 감각에 맞는 뉴에이지를 삽입했다. 무채색 일색이던 한복에도 알록달록한 색을 입혔다. 기존과 달리 새로운 장르의 사극이 등장하자 시청자들의 반응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이병훈 PD는 “당시 민속촌에서 촬영을 했는데,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이 예진 아씨(황수정)를 쫓아 개찰구 밖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겠다고 해 경비 아저씨한테 혼나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웃었다.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끝내고 약 10년 동안 현장을 떠나 데스크로 있었어요. 정년을 4년 남겨둔 시점에서 제가 관리하는 작품들이 모두 침체 일로를 걷기 시작하면서 회사에서 쫓겨났죠(웃음). 회사에 면목도 없고, 또 마음 한구석에서 ‘내가 직접 연출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피어올라 회사를 나왔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전화위복’이라 할 수 있어요. 그때 프로그램들이 잘돼서 제가 더 높은 자리까지 갔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집에서 놀고 있을 거예요. 실제로 제 동기 중에 전무, 사장까지 한 친구들이 있는데 3년 전부터 집에 있어요(웃음).”
젊은 감각,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닌 이 PD는 독서와 드라마·영화·다큐멘터리 감상 등으로 날마다 새로운 에너지를 채운다. 독서광인 그는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그해 문학상 받은 책을 모조리 모아 읽고, 드라마나 영화도 2~3주에 몰아 시즌별로 다 챙겨 본다고 한다. 그러느라 한동안은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날이 많아 아내의 잔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 그에게도 후회나 미련이 있을까. 그의 대답은 역시나 ‘워커홀릭’다웠다.
“영화 ‘아바타’를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 감독이 부럽고, 질투 나기까지 했죠. 아~ 3D 영상 한번 찍어보지 못하고 연출 인생을 마감할 것 같아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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