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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가슴 찡한 부정

‘낙타’ 펴낸 작가 정도상 자살로 생 마감한 아들과의 약속 지키다

“영원히 열여섯 살로 남아 있을 아들 향한 그리움, 세상 부모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글 오진영 사진 조영철 기자

2010. 04. 16

작가 정도상씨가 세상을 등진 큰아들의 영혼과 함께 고비 사막으로 떠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 '낙타'를 발표했다. 소설 속 내용 그대로 5년 전 아들을 먼저 보낸 작가를 만나 다시 못 볼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내 자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들었다.

175cm 키에 65kg, 지상에서 15년 6개월을 살았던 아들을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나보낸 지 3년. 아비는 아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비 사막이 있는 몽골로 떠난다. 인간의 존재를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막막하고 망망한 초원 한복판에서 아비와 아들은 꿈인듯 다시 만난다. 아들의 얼음처럼 찬 손을 잡고 두 사람은 3천년 전 흉노족 화가가 바위에 그린 그림을 보러 함께 길을 떠난다.
작가 정도상(50)은 그의 신작 장편소설 ‘낙타’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처럼 5년 전 11월, 큰아들을 떠나 보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아들은 학교를 마치고 미술학원으로 가던 중 달리는 지하철에 몸을 던졌다. ‘단테의 ‘신곡’을 따라 여행하고 싶다. 다만 13곡 겨울나무 숲은 피하고 싶다. 생을 리셋하련다’라는 짧은 유서를 휴대전화 문자로 남기고서였다.

문자로 유서 남기고 지하철에 몸 던진 아들

‘낙타’ 펴낸 작가 정도상 자살로 생 마감한 아들과의 약속 지키다


봄이 오는 길목인 3월에 쏟아진 폭설로 세상이 다시 한겨울로 돌아가버린 것 같았던 날, 서울 종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정씨는 “그날 이후 고통스러워서 지하철을 잘 못 탄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야 할 때 요즘 설치된 안전문을 보면 너무 화가 납니다. 왜 진작 저걸 안 만들었을까 원망스러워요. 지하철 아닌 다른 어디서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원망의 마음이 앞서네요.”
어느 행사에 참석해 있던 중 소식을 듣고 황망히 달려간 아버지에게 시체안치실 직원은 피범벅이 된 교복부터 보여줬다. 그저 한바탕 꿈이었으면 싶었다. 유리 조각처럼 부서진 몸을 차마 아이 엄마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떨어져나간 몸을 붙이고 최대한 생시처럼 보이도록 얼굴에 화장을 해준다고 했다. 얼굴만 하면 1백만원이고 몸 전체를 하면 3백만원이라고 해서 몸 전체를 해달라고 했다. 화장장에서 가루가 된 아들을 태어나서 자란 집과 뛰놀던 골목길, 다니던 초등학교·중학교가 모두 보이는 산등성이 나무 밑에 묻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 지금도 술 취하면 집에 가다 말고 나무 아래 찾아가 웁니다. 사람들하고 만나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얘기하고 술 마시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나도 모르게 거길 가고 있어요. 안 그러려고 하는데 자꾸 그렇게 됩니다.”
아들이 떠난 후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왜? 내가 뭘 잘못했기에?’라는 질문이 가시처럼 돋아 피 흘리게 했다.
“나는 아이와 대화가 부족한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아이가 학교 숙제로 쓴 글을 보면 ‘우리 아버지는 나와 친구처럼 대화하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아이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말이 잘 통하는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어느 지점에선가 본질적인 것을 놓쳤던 것 같습니다.”
정씨는 아들과 함께 떠났던 국토횡단기행을 떠올렸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학원에 간다고 나가서 PC방에서 게임하고 온 것이 들통났다. 벌로 강원도 고성에서 인천 강화까지 560km를 15박16일 동안 걸어가는 국토기행단에 두 사람이 함께 참가했다.
“완주하면 상으로 용돈 5천원과 PC방에서 하루 동안 마음대로 놀 수 있게 해준다고 했더니 그 상을 받겠다고 끝까지 걸어가더라고요. 6학년 때는 아이 스스로 다시 해보고 싶다고 해서 한 번 더 같이 다녀왔어요.”
같이 야구장에 가서 좋아하는 팀을 목이 쉬도록 응원하고 박물관·미술관·극장을 함께 돌아다니며 시시콜콜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부자지간이었다.

‘낙타’ 펴낸 작가 정도상 자살로 생 마감한 아들과의 약속 지키다

아들과 함께 가서 보기로 약속했던 고비 사막 암각화 사진. 2년 전 혼자 그곳에 다녀온 정도상은 아들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사진을 펴 본다.





아버지가 보기에 아들은 반에서 3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도 잘했고 학교 신문 편집부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장차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그림이 잘 안된다고 고민하는 말을 하기는 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 나이 때 으레 하는 방황 정도라고 생각하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때 마음껏 그림을 그리던 상상력이 제도화된 미술교육의 틀 안에서 자꾸 위축된다면서 우울해했어요. 고비 사막 넘어 테베시 산이라는 곳에 가면 3천년 전에 그린 암각화가 있다고, 함께 보러 가자고 약속했지요.”
긴 세월을 견뎌낸 그림을 보면 아들이 ‘잠시 한때’의 불안함을 이기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했던 그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한 지 1주일 만에 아들은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몰랐던 아득한 심연이 아들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을 잃은 고통을 두고 소설가 아버지는 복효근 시인의 시구를 빌려 “생의 파도가 내 옆구리에 까마득히 높은 절벽 하나를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정씨와 그의 아내, 두 살 터울 둘째 아들, 세 식구는 절벽 같은 슬픔을 하나씩 짊어지고 흐르는 시간을 견뎌냈다.
“우리 식구들은 집에 있을 때면 최대한 밝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TV도 슬프거나 어두운 프로그램은 절대 안 봐요. 제일 좋은 게 ‘개그콘서트’와 ‘1박2일’입니다.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한없이 적막과 슬픔 속으로 가라앉고 말 테니까요.”
아들이 떠나고 3년이 지난 후 정씨는 몽골로 떠났다.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들을 소설 속에서나마 살려내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 혼자 떠난 여행인데도 마치 아이가 옆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잠들면 꼭 꿈에 아이가 나타났고 꿈에서 깨면 아들을 만진 질감이 피부에 남아 있곤 했어요. 아들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 때문에 무척 행복했던 여행이었습니다.”

고아원과 친척집에 버려졌던 불행한 유년시절

‘낙타’ 펴낸 작가 정도상 자살로 생 마감한 아들과의 약속 지키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아들과 함께 사막을 건너며 ‘무엇이 그렇게 너를 힘들게 했냐’고 물어보는 일은, 자연스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큰 부담으로 짓눌러오던 숙제를 마친 것처럼 편안해졌고 이전에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이번 소설을 통해 풀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 세 번이나 버려졌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4학년 때 어머니한테 애인이 생겨서 외고모 할머니 댁에 보내졌지요.”
먼 친척 집에 얹혀사는 외톨이 소년은 아침에 눈뜨자마자 꼴을 베어와 돼지우리에 넣고 마당을 쓸어야만 마음 편하게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1년 후에 어머니가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렸다. 용산역에서 만난 어머니 등 뒤에는 애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업혀 있었다. 서울로 와 맞은 첫 번째 봄에 어머니는 그를 고아원에 보냈다. 사흘 뒤 어머니가 와서 미안하다고 하염없이 울며 다시 데려가기는 했지만 이미 그 사흘은 너무나 길고 아픈 시간이 되어 어린 마음을 깊숙이 할퀴고 말았다.
“그다음에는 어느 먼 친척 교장 선생님이 저를 양자로 들이겠다고 해서 보내졌어요. 우리 어머니도 참 이상하신 게 그때도 1주일 만에 저를 도로 데려갔지요. 그렇게 세 번이나 버려졌던 기억이 내면 깊은 곳에 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든이 가까운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용서가 안됩니다.”

‘낙타’ 펴낸 작가 정도상 자살로 생 마감한 아들과의 약속 지키다


분노와 경멸에 떨며 생애 최초로 목격한 어머니와 애인 남자의 섹스, 어머니와 물어뜯고 치고받는 사생결단의 싸움 끝에 아기를 빼앗아갔던 남자, 그런 장면들이 긴 세월 마음속에 용서되지 않는 기억의 퇴적층을 만들었다.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앓던 깊고 오랜 상처와 슬픔을 씻김굿 같았던 이번 여행과 소설을 통해 비로소 조금 다독일 수 있게 됐다.
밤거리의 식당과 다방을 돌아다니며 껌을 팔아 식구들이 먹을 쌀을 사야 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가난한 운동권 대학생이 되었다. 낮에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벽돌이며 시멘트를 날랐고 밤에는 다락방에서 무협지를 써 원고료를 벌었다. 87년 작가로 데뷔한 후 그의 작품은 줄곧 성장 사회의 그늘에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구조적인 모순, 분단 및 통일 문제 등을 다루어왔다. 탈북자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인 ‘찔레꽃’과 ‘얼룩말’에는 세상 떠난 아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국경지대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북한 어린이들을 뜻하는 ‘꽃제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던 아이가, ‘저 이야기를 소설로 쓸 사람은 아빠밖에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하더군요.”
‘얼룩말’이라는 제목은 아이가 정해준 것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 건기와 우기에 따라 변하는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먹이를 따라 늘 이동해야 하는 얼룩말 떼가 강에는 악어가 입 벌리고 있고 숲에는 사자가 쫓아와 잡아먹는 위협에 끝없이 시달리는 모습이 탈북자들과 겹쳐진다며 붙여준 제목이라는 것.
소설 ‘낙타’에서 아들은 “무엇이 널 그렇게 힘들게 했어?” 라는 아빠의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부모처럼 “아이 성적이 조금 오르면 얼굴이 환해지고 성적이 곤두박질치면 지루한 잔소리를 퍼붓는” 평범한 아버지이던 그는, 아들이 “공부를 통해 꿈과 밥을 자기 손에 꼭 움켜쥐기를 소망하던” 소박한 부모일 뿐이던 그는, 이제 모든 사람은 그 안에 심연을 지니고 있고 부모일지라도 자식 안에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다는 본질적인 한계 앞에 겸허해졌다.

세상 모든 부모에게 자녀를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라고 당부하고 싶어
“부모들이 내 자식은 내가 잘 알고 있고 세상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가진 이들은 욕망을 세습하고 싶어서, 못 가진 이들은 불안을 해소하고 싶어서 과잉 보호와 과잉 교육 안에 아이를 가두고 있는 것이 우리 세대 부모들이에요. 하지만 울타리 속 안전한 길에서만 아이를 걸어가게 한다면 그 아이는 넘어졌을 때 혼자 일어서는 법을 배우지 못할 겁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자식은 그들 부모보다 훌륭하다는 걸 믿는다고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류가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어왔겠느냐는 것이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덜 여문 상태라고 여기고 가르치고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대한다면 부모와 자식 사이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어요. 자녀를 동등한 타인이자 온전한 인격체로 대해달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소설 마지막에서 아들은 암각화 속 낙타를 불러내 올라타고 “여행 즐거웠어, 아빠”라는 인사를 남기고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로 간 아들이 별이 된 후 지상에 남은 아버지에게, 두 번 다시 행복해질 수 없을 남은 생을 어떻게 견딜 것이냐고 차마 묻지 못했다. 아마도 산맥처럼 높고 깊은 생의 고비를 영혼의 속도로 걷는 낙타처럼 걸어갈 것이라고 짐작해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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