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특권 중 가장 특별한 건 엄마가 된다는 것. 아역 탤런트 출신 김민희(38)는 요즘 들어 이 말에 더욱 공감하고 있다. 지난 연말부터 엄마의 삶을 선택한 여자들의 깊숙한 속내를 잘 드러낸 연극 ‘엄마들의 수다’에 출연하고 있기 때문. 이 작품은 여배우 네 명이 1인 다역을 맡아 병원·대형마트·유치원 등에서 벌어지는 스무 가지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한다.
지난 1월 중순, 서울 대학로 공연장에서 만난 그는 일주일에 하루를 제외하고 내내 공연한 탓에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오랜만의 연극무대 나들이를 즐기는 듯했다. 공연장 뒤편 분장실로 들어갔더니 벽면 한쪽에 미혼모·유모차·딱지·레고 등의 단어가 적힌 흰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배우들이 헛갈리지 않도록 연극의 순서를 적어놓은 것이다. 공연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난 터라 그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속사포처럼 설명을 쏟아냈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 그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장면이 궁금해졌다.
“딱지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제일 공감 가더라고요. 학교에서 아들이 덩치 큰 아이들에게 딱지를 다 빼앗기고 오자 엄마가 분해서 직접 나서려다가 마마보이로 클까봐 오히려 딱지따기 특훈을 시키고 모두 가져오게 만드는 이야기예요. 우리 딸아이도 학교에서 비슷한 경우를 겪었는데 그때 저도 직접 나서려다가 아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왔어요. 엄마가 되면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아이의 처지에서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친정엄마와 딸 서지우양(10)이 연극을 보기 위해 대학로를 찾았다고 한다. 연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야기는 미숙아를 낳은 엄마의 고백으로 진행돼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데 이 장면에서 두 사람 모두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김민희 역시 울음이 멈추지 않아 연기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대사를 해야 하는데 목이 메어서 할 수가 없을 정도였죠(웃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울음 반, 대사 반으로 겨우 끝을 냈어요. 연극이 끝나고 아이가 ‘엄마, 너무 감동적이었어요’라고 하는데 기분 좋더라고요. 친정엄마도 오랜만에 무대에 선 제 모습을 보고 좋아하셨어요.”
결혼, 일찍 하면 좋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많은 선택
김민희는 97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유학생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마냥 좋았기에 스물여섯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망설임 없이 결혼을 선택했다. 올해로 주부가 된 지도 벌써 13년째다.
“그때는 참 좋았는데 지금은 일찍 결혼한 게 후회돼요. 사람 목숨이 두 개도 아니고… 한 번뿐인 인생인데 젊은 날을 즐기지 못해서 아쉽더라고요. 물론 아이를 빨리 낳아 키우니 지금 여유롭긴 하죠. 참 값진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론 그 시절의 저 자신을 잃은 것 같아서 아쉬워요.”
아역 탤런트로 데뷔해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하던 그가 아내로서, 며느리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녹록지 않았을 터. 아니나 다를까 그는 “감정을 다루고 표출하는 예술분야의 일을 하다가 현실적인 감각이 중요한 주부로 사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결혼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죠. 멋모르고 살던 사람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참고 견디면서 해가야 하니까요. 결혼생활을 하면서 어리던 제가 조금씩 자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는 그 삶에 충실했기 때문에 후회도 없어요. 좋은 날이 많았던 만큼 화가 난 날도 많았는데 매번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또 잊고 그렇게 살았던 것 같네요(웃음).”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기에 왠지 까다로울 것 같았던 김민희는 의외로 소탈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남편이 연예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부담감을 갖고 잘해주려고 하는 것도 안쓰럽다고 말했다. 톱스타도 아니고 여느 주부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라고.
금실 좋은 이 부부는 결혼 3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 김민희가 몸이 약해 한 차례 유산을 경험한 것. 어렵게 두 번째 임신을 했는데 입덧도 심하고 병치레도 잦아 가족이 밤낮을 보살핀 끝에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더 낳을 생각 없냐고 해도 딸 하나로 만족하고 살아요. 유치원 때까지는 집에서 끼고 살았는데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니까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부딪치며 사회성을 길러야 하니까 걱정이 됐죠. 그때부터 책임감을 갖고 아이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저도 그제야 어른이 된 것 같아요(웃음).”
김민희의 육아방식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는 의외로 “특별한 육아방식이 없는 게 잘 키우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일이 없을 때는 전업주부로서 아이를 잘 챙겨주지만 요즘처럼 일을 할 때면 아이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독립성이 길러지는 것 같다고. 밤늦도록 일하고 돌아와 아침까지 자고 있으면 아이는 엄마가 깰세라 조심스레 부엌에서 아침을 챙겨먹고 나간다고 한다.
“챙겨주려고 나가면 ‘엄마 피곤하니까 더 자’ 하며 알아서 나가요. 공부는 못하는데 착하고 어른스러운 딸이에요. 어떻게 보면 아이가 절 키우는 거죠(웃음). 육아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엄마와 아이가 같이 성숙해가는 거요.”
육아, 엄마와 아이가 함께 크는 시간
그는 지난해 아이와 SBS 예능 프로그램 ‘붕어빵’에 몇 차례 출연했다. 똘망똘망한 지우양은 엄마의 여러 가지 실수담을 폭로해 웃음을 선사했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방송일에 관심이 많을 법도 했다.
“제가 보기에 끼는 없고, 흥미만 있어서 하고 싶다며 달려드는데 사실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이는 아이다운 게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대로 평범하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조금 더 자라서 만약 연예인을 하겠다고 하면 분명하게 막을 거예요(웃음).”
그는 딸이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섯 살에 드라마 출연을 하며 데뷔한 그는 연예인의 표면적인 화려함보다는 카메라가 꺼진 후 어두운 면을 많이 봤다. 때문에 연예계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잘되면 부와 명예가 따라오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노력과 운이 필요하고 그것도 잠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라는 것. 마음이 착하고 여린 딸이 연예계 생활을 하며 상처받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각종 학원을 다니면서 밤늦도록 공부를 한다. 그 역시 딸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교육시키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학원 쫓아다니기 바쁜 아이들을 안쓰러워하며 자신의 딸은 그렇게 키우지 않는다고.
“요즘 방학인데 지우 친구들은 오전 7시까지 학원 가서 영어니 뭐니 배운다고 하더라고요. 학원 버스 타고 가서 엄마가 싸준 고구마 먹고 점심, 저녁은 다 사먹으면서 공부한 뒤 밤 11시 돼서야 돌아온대요. 그러고 집에서 또 숙제를 해야 한다나… 지우는 그렇게 시키지 않아요. 성적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그는 요즘 아이들이 ‘소꿉장난’의 뜻을 몰라 인터넷에 검색하며 익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아이에게 공부를 해야 할 때는 하되 그만큼 놀면서 세상을 익히게끔 가르친다. 일이 없을 때면 시간을 내서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데 주로 가난한 나라를 선택한다. 그런 곳을 여행하며 지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못 입고, 못 먹지만 눈빛만은 참 아름다워요. 늘 웃으며 살죠. 갔다 오면 정화가 되는 느낌이에요. 아이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게 많은 것 같더라고요. 한 번은 음식점에 가서 스파게티를 시키는데 ‘우리 많이 먹지도 않는데 두 개 시키면 남으니까 하나만 시켜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아이가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도록 하는 게 진짜 교육 아닐까요?”
일, 일상에 지친 나를 깨우는 작업
30년 넘게 연기를 해온 사람은 버튼만 누르면 연기가 튀어나올 것 같다. 하지만 김민희는 “하면 할수록 힘들고 알면 알수록 욕심이 생기는 게 연기”라고 말한다.
“1년 365일 연기를 했다면 습관적으로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일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하나의 작품을 하고 나면 맡았던 캐릭터가 한동안 남죠. 그 찌꺼기를 버리는 작업을 하면서 쉰 다음 작품을 해야 제대로 연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도 2년 만에 이번 무대에 선 거죠.”
그는 2008년 드라마 ‘애자언니 민자’에 출연했다. 드라마와 연극무대를 오가는 그에게 어떤 장르가 더 매력적인지 물었다. 그는 “각자 매력 있다”고 답한 뒤 잠시 고민하더니 “받는 기쁨이 큰 쪽은 연극”이라고 말했다.
연극의 경우 관객과 배우의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바로 피드백이 온다고 한다. 무대에 서면 사람들의 표정이 다 보이기 때문에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좌절감도, 기쁨도 두세 배로 맛보게 된다고. 가장 기쁜 순간은 “무표정하던 관객을 웃거나 울게 만들 때”라고 한다.
“연극을 한 10년 하면 능구렁이가 될 것 같아요(웃음). 표정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아니까요. 덕분에 무대에 설 때마다 긴장감 넘치게 연기해요. 쉴 때는 온전히 전업주부로 살다가 일하러 나오면 확실히 깨어 있는 느낌이 들죠.”
평소 한강 둔치를 산책하길 즐기는 그는 쉬는 날이면 아이와 함께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선다. 많은 사람이 나와서 운동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그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진정성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평생을 연기와 함께 살아온 그는 언제 가장 행복했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바로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라고 말했다.
“요즘은 연극이 끝나고 사람들이 박수를 힘차게 쳐줄 때 정말 행복해요.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언정 ‘수고했어요’라는 의미로 박수쳐주시는 분들을 볼 때면 정말 힘이 나거든요. 눈이 많이 쌓인 1월1일에는 사람들이 와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와서 즐겁게 보고 박수쳐주신 분들도 갑자기 생각나네요. 감동해서 막 울었거든요. 내 남편의 아내, 내 아이의 엄마로 사는 것도, 지금 이렇게 연기하는 것도 모두 행복하고 감사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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