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무늬 셔츠 윗 단추를 두 개 풀고 배기팬츠로 멋을 낸 연정훈(30)에게 기존의 반듯하고 귀공자 같은 이미지를 찾아보긴 힘들었다. 웃을 때 움푹 패는 보조개는 여전했지만 다부진 눈빛과 강인한 어조는 신선했다.
“결혼 전에는 옷을 제대로 고르지 못해 검정색의 무난한 스타일을 즐겨 입었는데, 지금은 아내가 골라준 옷을 입고 나가요. 아내는 제게 어울리는 옷을 잘 찾아요.”
브라운관 속 그의 모습 또한 새롭다. MBC 월화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 그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청년 이동욱 역을 맡았다.
“지금까지는 안정된 가정에서 반듯하게 자란 청년을 주로 연기했는데 이번엔 타인의 압력을 받아 모진 삶을 사는 청년을 연기하고 있어요. 설레고 재미있지만 어떨 땐 서럽고 저 자신이 불쌍하게 여겨져요. 카메라 앵글로 보면 분명 화면에 안 나올 것 같은데 계속 맞고 고문을 당하거든요. 한번은 너무 많이 맞는 것 같기에 ‘죽은 척하고 일어나지 말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웃음).”
군 제대 후 첫 작품이라는 중압감에 아버지, 아내에게 조언 구해
‘에덴의 동쪽’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동욱은 그중에서도 굴곡이 많은 인물이다. 태어나자마자 원수의 아들과 운명이 뒤바뀌었고, 형은 자신의 죄를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들어간다.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하지만 학생시위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핍박받고, 애인이었던 지현(한지혜)마저 원수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 천신만고 끝에 복수의 기회를 잡을 즈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좌절한다.
“갈수록 입체적으로 변하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어요. 평소 남자들의 우정, 뜨거운 형제애가 담긴 작품에 관심이 많았고요. 매회 감정이 격한 신을 소화하고 있는데 상황이 처절하다 보니 눈물이 저절로 나오더라고요.”
그에게 극중 인물과 비슷한 구석이 있냐고 묻자 “동욱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80년대 전형적인 운동권 학생의 모습을 지녔다. 데모하고 유치장에 갇히는 장면을 찍으면서 동욱이를 이해하게 됐지만 실제라면 동욱이처럼 용감할 순 없을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에덴의 동쪽’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지난해 군에서 제대한 뒤 선택한 첫번째 작품이기 때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그의 아버지는 탤런트 연규진, 아내는 한가인이다. 부모와 함께 사는 그는 “아버지, 아내와 작품이나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시놉시스를 보며 많은 의견을 나눴다”고 말했다. 출연을 결심한 뒤에는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군 생활하면서 불어난 체중부터 감량했다고 한다.
“살을 10kg 정도 뺐어요. 처음에는 무턱대고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과격하게 운동했는데, 근육량이 지나치게 늘어 고민했더니 아내가 필라테스를 권했죠. 꾸준히 필라테스를 배웠더니 한결 몸이 유연해지고 체형도 예쁘게 변한 것 같아요(웃음).”
연정훈은 행복한 결혼 생활의 비결로 아내에게 져주는 것을 꼽았다.
그는 아내의 말을 잘 따른다고 한다. 지난 2005년 결혼한 뒤 아내와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그는 행복하게 사는 비결에 대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한다. 감정이 예민할 때는 남편이 아내에게 지는 게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는 결혼한 뒤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군에 입대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으며 시부모를 친정 부모처럼 여기는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그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도 집에서 아내가 찾으면 곧바로 귀가한다고 한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집에서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집 근처에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고. “애처가보다는 공처가에 가깝다”고 한다.
“아내가 작품활동을 오랫동안 하지 않아 궁금해하는 분이 많은데, 집에서 재미있게, 잘 쉬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CF도 찍고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내와 함께 봉사활동 같은 좋은 일에 참여하고 싶어요.”
극중 한지혜·이다해 등 여배우들과 러브신이 많은 점을 두고 아내가 질투한 적은 없냐고 묻자 그는 “연기자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잘 이해해준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르다. 드라마에서 아내와 남자탤런트의 러브신이 나오면 아예 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서로의 연기를 꼼꼼하게 모니터링하는 편은 아니에요. 얼마 전 아내가 슬쩍 ‘모진 고문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 동욱이와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지현이가 인상적이었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왜?’ 하고 묻진 않았지만 기분 좋았어요.”
그는 가급적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촬영이 끝난 뒤에도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배우들이 많아요. 가끔 슬픈 감정이 남아 있을 때가 있는데, 집에 들어갈 때는 그 감정을 빨리 털고, 밝고 낙천적인 평소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애써요.”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년쯤 아이를 가질 계획”이라며 “부모님께서 어서 아이 낳길 원하지만, 아내가 군 입대한 나 대신 가정을 책임져야 했기에 그동안 일을 많이 했고, 지금은 내가 다시 연기자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돕느라 바쁘다. 2세 계획보다는 가장이자 연기자로서 제 몫을 다하는 게 먼저다”라고 말했다.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하나라도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연기해요”
최근 아버지 연규진도 오랜 휴식을 깨고 SBS 주말드라마 ‘가문의 영광’으로 복귀했다. 연규진은 아들의 연예활동에 일절 관여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은 서로 바쁘다 보니 한집에 살아도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제 연기에 대해 별 말씀이 없으신데, 한번은 ‘동철이가 군대 간 동욱이를 면회하는 장면 괜찮더라’ 하시더라고요. 저는 ‘가문의 영광’이 방송될 때마다 촬영이 생겨서 아직까지 아버지 연기를 보지 못했어요. 조만간 저도 아버지 연기하시는 모습 보고 좋은 말씀 드려야죠.”
그는 사실 ‘에덴의 동쪽’에 출연하며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발성과 감정표현이 어색하다는 등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던 것. 그때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많은 위안을, 선후배 연기자들로부터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저 스스로도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해요. ‘아역배우보다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무겁죠. 그런데 한 가지 변명하자면, 1회부터 4회까지는 6~7개월 동안 만들었기 때문에 비교적 완성도가 높아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죠. 한편으로는 저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이 드라마로 최고가 되자는 목표보다 한 가지라도 더 배우자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점점 연기가 향상될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요. 극중 엄마로 나오는 이미숙 선배와 친아버지이자 원수로 나오는 조민기 선배는 이런 제게 기둥 같은 분이에요. 신파조의 대사가 많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대사 톤을 정리해주세요.”
극중 형으로 나오는 송승헌과의 호흡은 어떨까.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승헌이형은 꼭 친형 같다”고 말했다. 연정훈은 지난 2004년 드라마 ‘슬픈 연가’ 촬영 도중 송승헌이 갑작스레 군에 입대하자 그 대신 출연한 바 있다.
“형과의 인연이 남다르기 때문인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함이 느껴져요.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성한 갈대밭에서 10여 년 만에 형과 재회하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날씨가 굉장히 추운데다 꼭 괴물이 헤집고 다닐 것 같은 온갖 해괴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감정을 잡기 힘든 상황에서 형을 부둥켜안고 꺽꺽 소리내 울었는데, 잡다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면서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통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형과 가슴 뭉클한 장면을 많이 촬영해서 그런지 형 눈빛만 봐도 애틋한 감정이 들어요.”
그는 송승헌에 비해 촬영 분량이 적은 편이다. 시청자의 관심 또한 그보다는 송승헌에게 좀 더 맞춰져 있다.
“승헌이형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냐고 묻는 분이 있는데, 전혀 안 그래요. 동철이가 어떤 경로를 통해 암흑가의 세력에서 권력을 키우는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형에게 좀 더 포커스가 맞춰져야 하죠. 만나면 ‘어제 방송 잘 나왔더라’ ‘감정 좋더라’ 같은 말을 하면서 서로의 기운을 북돋워요.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동욱이가 서울지검 검사가 되는데, 그때부터 동철이는 돈과 권력을, 동욱이는 정의와 법이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갈등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아요.”
행복한 결혼생활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일 오랫동안 하는 게 꿈
그는 매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후회를 남기지 말자’고 다짐한다고 한다.
“군 생활을 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 가지 이미지에 매몰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내가 진짜 배우 맞아?’ 반성하면서 제대 후엔 반드시 달라진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했죠. 기존 틀에서 벗어났는지 못 벗어났는지는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조금이나마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고요.”
미술학도이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걸 보며 막연히 ‘아버지의 직업’이라고 생각했을 뿐 연기자가 되겠다는 꿈은 갖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유명 디자인스쿨을 다니다 귀국한 뒤 우연히 친구의 손에 이끌려 한 연기학원에 갔는데, 그곳이 바로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원이었다고. 그곳에서 처음 연기에 매력을 느낀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 99년 SBS 드라마 ‘파도’에 출연, 2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아버지 후광으로 데뷔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데뷔 전 응시한 오디션이 6백 회가 넘는다고.
“만약 연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미술과 관련된 일을 했을 거예요. 아마 전공을 살려 디자인을 하고 있겠죠.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기 때문에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는 롤모델을 따로 정해두진 않았지만 얼마 전부터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나오는 김명민에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마치 그림책에 나오는 듯한 재미있는 음악가를 표현했다. ‘나라면 저런 장면에서 어떻게 할까’ ‘저 정도까지 연기할 수 있을까’ 하고 상상한다”는 그는 “언젠가는 나도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꿈을 꾼다고 했다.
그만의 ‘에덴(희망)’은 무엇일까.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성실하게 하는 게 꿈이에요. 거창한 욕심을 갖기보다는 여유롭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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