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동생이 제 큰오빠, 내게는 사촌오빠의 집에 놀러간다기에 나도 얼른 따라나섰다. 오빠네가 새집에 입주한 지 두 해를 넘겼는데 아직 들여다보지 못한 게 뒤늦게 생각나서였다.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온 뒤 서울의 북쪽까지 행차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했고, 어차피 누군가의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처지라 무심히 지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인연을 생각하면 새집 구경을 안 간 건 말이 안 되는 소행이었다. 오빠에게라기보다 올케언니한테.
지금은 나도 육십이라고 같이 늙어가는 척하지만 두 분이 결혼한 건 내 나이 열 살에 꼬랑지 두어 살 달렸을 때였다. 예쁜 새색시가 어린 사촌 시누이에게 약도 그려줘가며 놀러오라고 해 호기심 왕성한 사춘기에 신혼의 단칸셋방을 구경 삼아 찾아간 게 시작이었다. 당연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다 큰 어른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소꿉장난의 피날레는 늘 내게 밥상을 차려 내놓는 것이었다.
아기가 태어나자 소꿉장난의 멤버가 완성됐다. 방 두 칸짜리 셋방을 방문할 때면 언니가 시장 갔다 오는 동안 조카를 인형처럼 데리고 놀았다. 그리고 드디어 볼품없는 방 두 칸짜리 집을 방문할 무렵, 나는 어른이 됐고 인형 셋은 조잘거릴 줄 알았다.
어려서는 무턱대고 언니가 좋았다. 내가 맏딸이라 그랬나보다. 스스럼 없이 드나든 건 언니가 내게 잘해줬다는 얘긴데, 어른이 돼 생각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다. 빠듯한 살림에 친 시누이도 아닌 사촌 시누이가 드나드는 게 성가실 수도 있었을 거다. 글쎄, 친 시누이보다 사촌 시누이라 차라리 부담 없었으려나?
아무튼 일단 발동이 걸린 좋은 관계는 몇십년 동안 꾸준히 잘 굴러갔다. 박봉의 월급쟁이인 오빠의 팍팍한 성실함과 언니의 고단한 알뜰함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생활을 꾸리며 삼남매를 키우고 조금씩 집도 키웠다. 다소나마 나은 집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몹시 기뻐했다. 그 시절엔 주변 사정이 대개 엇비슷했지만, 가난한 집 맏아들인 오빠 내외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운 고난의 강행군인지 짐작이 갔으므로 더 기뻤나보다. 또한 누구나 그 강행군을 이겨내는 게 아니란 걸 아는 만치, 한참 손아래 동생 주제에 시건방지게도 눈물겹게 신통방통했다. 그 표현 외에는 딱 들어맞는 말이 없었다. 사실 신통방통하다는 건 그분들이 내게 가질 만한 감정이고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성년이 되자마자 내 몫인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으니까.
언제 어느 곳에서나 ‘내게 딱 맞는다’고 말하는 새언니의 지혜
내가 사는 용인 수지에서 서울 수유리까지 가는 길은 아주 멀었다. 교통체증까지 힘을 보태 더욱 멀었다. 그러나 기억의 창고를 뒤져내느라고 그리 지겹지는 않았다.
언니네가 이사한 최초의 방 두 칸짜리 집은 한심했다. 아마 무허가 주택으로 지었다가 양성화된 것인 듯 방 두 개, 부엌 하나가 막사처럼 붙어 있었고, 숨이 차게 걸어올라가야 하는 고지대였다. 그 집을 두고 언니는 ‘우리한테 딱 맞는 집’이라고 자랑했다. 벌건 맨땅이지만 터는 좀 넓어서 아이들을 대문 안에 가둬두기 좋고, 채송화·맨드라미·해바라기는 다음 해에 심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수돗물이 밤에만 나오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 집은 스물네 시간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평지, 수유리 주택가에 자리 잡았다. 옹색하나마 집 꼴이 제대로 박힌 방 셋짜리 한옥이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가깝고 오빠 출근길도 편리한, 시장까지 가까운 그 집을 언니가 ‘우리 식구에게 딱 맞는 집’이라고 자랑할 때는 내 마음도 아주 흐뭇했다.
언니는 내가 별 쓸데없는 옛날 일을 시시콜콜히 기억하고 있는 것에 웃겠지만 언제나 새집을 두고 ‘우리한테 딱 맞는 집’이라고 말하는 건 적이 인상적이었다. 꼭 같은 대사를 세 번째 듣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물론 네 번째 집에서도 언니는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속으로 웃는 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꼭 집만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언제나 못마땅하여 앙앙불락(怏怏不樂)하는 인사들이 주변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내가 은연중에 언니한테 배운 것을 한 번 응용한 적 있다. 내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입시 때문에 반쯤 돈 듯한 엄마들 앞에서 ‘내 아이들이 가는 대학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는 명언을 남긴 것이다. 아들이 둘이니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 두 개나 됐다. 아이들 앞에서도 그 소리를 했는지 기억에 없는데, 훗날 아들이 제 색시가 졸업한 학교가 제일 좋다고 말하는 걸 보니 옛날에 그 소리를 들었을 뿐 아니라 썩 마음에 들었던 눈치다.
“먼 훗날 인생 돌아보며 ‘내게 딱 맞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최근에 집안 어른 한 분이 내게 한탄하듯 말했다.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난감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되는 분이냐고 반박할 수 없으니 못 들은 척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노인인데 어떻게 그리 엉뚱한 발상을 했을까? 그분의 일생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달리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 분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하긴, 타인의 삶을 어찌 평가하랴. 결국 자기 스스로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춘기 아이들이나 갱년기의 중년 남녀들이 그런 증상을 과도하게 드러낸다. 어떤 사람들에겐 사춘기나 갱년기가 유난히 길다.
누군들 자신의 현재 삶을 ‘나한테 딱 맞는 삶’이라고 여기겠는가. 입 밖에 안 낼 뿐이지 실상 누구나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은 아니다’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 아닐까? 불가피하게 자문자답했다.
나는 내 삶에 만족하는가? 아니다. 특히 사춘기, 갱년기 때엔 미치는 줄 알았더랬다.
나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가? 그렇다. 항상 그랬다.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란다. 내가 내 삶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나를 업신여긴다는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도 내가 한 일을 후회했고, 하지 않은 일에 안타까웠고, 나 자신을 비난하거나 용서하기는 했다. 그러나 차마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그건 아마 자존심의 문제인가보다. 내 현재의 삶은 내 과거가 만들어낸 자업자득의 결과이기에 - 그걸로 부족하다면 전생의 업보까지 들춰내 보태더라도 - 인정하고 존중하겠다. 그러니 타인들도 내 삶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라는 선언이나 진배없다.
균형 감각이 떨어진 노년기 어른의 뜬금없는 발설이 내 가슴에 망칫돌처럼 얹힌 까닭이 어렴풋이 짐작됐다. TV를 너무 보셔서 현실과 극중 상황을 혼동하셨건, 왕년에 당신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가 지금 훨씬 유복한 팔자임에 분개하셨건, 당신보다 가난하던 친척이 당신보다 자식 농사를 잘 지어 눈에 거슬렸건, 연유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끔찍이 싫어한 것은 행여나 나도 아주 늙어서 그런 소리 할까봐 겁이 나서였다.
처음 가는 집이지만 찾느라 수고할 필요는 없었다. 네 번째 집이었던 연립주택을 재건축해 같은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앉아 있었다.
현관 문을 여니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아니, 약속이 어그러지잖아.’ 깜짝 놀랐다. 칠십대 중반의 올케에게서 점심 대접 받으려는 시누이들은 세상 천지에 없다. 집 구경하고 바깥에 나가 점심 대접해 드리기로 했는데 전화상으로는 ‘OK’하시던 양반이….
어디선가 닭 냄새가 풍기고 눈에는 부침개 한 소쿠리가 들어왔다.
“그냥…. 하고 싶어서.”
올케는 씩 웃고 전기밥솥의 버튼을 눌렀다. 아침에 일어나니 심심해서 밥하고 싶었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밥이 끓는 동안 우리는 검사하듯이 집 구경을 했다. 요즘 짓는 아파트는 구조가 잘 빠져서 실제 평수보다 훨씬 넓다. 두 분 사시기에 너무 넓지 않느냐고 묻자 언니는 당연히 ‘우리한테 딱 맞아’라고 대답한다.
나도 올케언니처럼 늙고 싶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내 집이 나에게 딱 맞고, 내 집에 온 사람의 입에는 내가 한 밥이 들어가야 한다. 얼마나 당당한가.
※ 윤명혜씨는···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고와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어과를 졸업했으며, 1971년 여성동아 장편공모에 ‘난파선’이 당선돼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도둑의 아내’ ‘질투’ ‘여자가 여자에게’ 등의 장편소설과 창작집 ‘우리들의 비가’ 등을 펴냈다.
지금은 나도 육십이라고 같이 늙어가는 척하지만 두 분이 결혼한 건 내 나이 열 살에 꼬랑지 두어 살 달렸을 때였다. 예쁜 새색시가 어린 사촌 시누이에게 약도 그려줘가며 놀러오라고 해 호기심 왕성한 사춘기에 신혼의 단칸셋방을 구경 삼아 찾아간 게 시작이었다. 당연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다 큰 어른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소꿉장난의 피날레는 늘 내게 밥상을 차려 내놓는 것이었다.
아기가 태어나자 소꿉장난의 멤버가 완성됐다. 방 두 칸짜리 셋방을 방문할 때면 언니가 시장 갔다 오는 동안 조카를 인형처럼 데리고 놀았다. 그리고 드디어 볼품없는 방 두 칸짜리 집을 방문할 무렵, 나는 어른이 됐고 인형 셋은 조잘거릴 줄 알았다.
어려서는 무턱대고 언니가 좋았다. 내가 맏딸이라 그랬나보다. 스스럼 없이 드나든 건 언니가 내게 잘해줬다는 얘긴데, 어른이 돼 생각해보니 쉬운 일이 아니다. 빠듯한 살림에 친 시누이도 아닌 사촌 시누이가 드나드는 게 성가실 수도 있었을 거다. 글쎄, 친 시누이보다 사촌 시누이라 차라리 부담 없었으려나?
아무튼 일단 발동이 걸린 좋은 관계는 몇십년 동안 꾸준히 잘 굴러갔다. 박봉의 월급쟁이인 오빠의 팍팍한 성실함과 언니의 고단한 알뜰함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생활을 꾸리며 삼남매를 키우고 조금씩 집도 키웠다. 다소나마 나은 집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몹시 기뻐했다. 그 시절엔 주변 사정이 대개 엇비슷했지만, 가난한 집 맏아들인 오빠 내외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운 고난의 강행군인지 짐작이 갔으므로 더 기뻤나보다. 또한 누구나 그 강행군을 이겨내는 게 아니란 걸 아는 만치, 한참 손아래 동생 주제에 시건방지게도 눈물겹게 신통방통했다. 그 표현 외에는 딱 들어맞는 말이 없었다. 사실 신통방통하다는 건 그분들이 내게 가질 만한 감정이고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성년이 되자마자 내 몫인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으니까.
언제 어느 곳에서나 ‘내게 딱 맞는다’고 말하는 새언니의 지혜
내가 사는 용인 수지에서 서울 수유리까지 가는 길은 아주 멀었다. 교통체증까지 힘을 보태 더욱 멀었다. 그러나 기억의 창고를 뒤져내느라고 그리 지겹지는 않았다.
언니네가 이사한 최초의 방 두 칸짜리 집은 한심했다. 아마 무허가 주택으로 지었다가 양성화된 것인 듯 방 두 개, 부엌 하나가 막사처럼 붙어 있었고, 숨이 차게 걸어올라가야 하는 고지대였다. 그 집을 두고 언니는 ‘우리한테 딱 맞는 집’이라고 자랑했다. 벌건 맨땅이지만 터는 좀 넓어서 아이들을 대문 안에 가둬두기 좋고, 채송화·맨드라미·해바라기는 다음 해에 심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수돗물이 밤에만 나오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 집은 스물네 시간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평지, 수유리 주택가에 자리 잡았다. 옹색하나마 집 꼴이 제대로 박힌 방 셋짜리 한옥이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가깝고 오빠 출근길도 편리한, 시장까지 가까운 그 집을 언니가 ‘우리 식구에게 딱 맞는 집’이라고 자랑할 때는 내 마음도 아주 흐뭇했다.
언니는 내가 별 쓸데없는 옛날 일을 시시콜콜히 기억하고 있는 것에 웃겠지만 언제나 새집을 두고 ‘우리한테 딱 맞는 집’이라고 말하는 건 적이 인상적이었다. 꼭 같은 대사를 세 번째 듣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물론 네 번째 집에서도 언니는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속으로 웃는 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꼭 집만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언제나 못마땅하여 앙앙불락(怏怏不樂)하는 인사들이 주변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내가 은연중에 언니한테 배운 것을 한 번 응용한 적 있다. 내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입시 때문에 반쯤 돈 듯한 엄마들 앞에서 ‘내 아이들이 가는 대학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는 명언을 남긴 것이다. 아들이 둘이니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 두 개나 됐다. 아이들 앞에서도 그 소리를 했는지 기억에 없는데, 훗날 아들이 제 색시가 졸업한 학교가 제일 좋다고 말하는 걸 보니 옛날에 그 소리를 들었을 뿐 아니라 썩 마음에 들었던 눈치다.
“먼 훗날 인생 돌아보며 ‘내게 딱 맞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최근에 집안 어른 한 분이 내게 한탄하듯 말했다.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난감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되는 분이냐고 반박할 수 없으니 못 들은 척했다. 누가 봐도 평범한 노인인데 어떻게 그리 엉뚱한 발상을 했을까? 그분의 일생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달리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 분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하긴, 타인의 삶을 어찌 평가하랴. 결국 자기 스스로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춘기 아이들이나 갱년기의 중년 남녀들이 그런 증상을 과도하게 드러낸다. 어떤 사람들에겐 사춘기나 갱년기가 유난히 길다.
누군들 자신의 현재 삶을 ‘나한테 딱 맞는 삶’이라고 여기겠는가. 입 밖에 안 낼 뿐이지 실상 누구나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은 아니다’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 아닐까? 불가피하게 자문자답했다.
나는 내 삶에 만족하는가? 아니다. 특히 사춘기, 갱년기 때엔 미치는 줄 알았더랬다.
나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가? 그렇다. 항상 그랬다.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란다. 내가 내 삶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나를 업신여긴다는 얘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도 내가 한 일을 후회했고, 하지 않은 일에 안타까웠고, 나 자신을 비난하거나 용서하기는 했다. 그러나 차마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그건 아마 자존심의 문제인가보다. 내 현재의 삶은 내 과거가 만들어낸 자업자득의 결과이기에 - 그걸로 부족하다면 전생의 업보까지 들춰내 보태더라도 - 인정하고 존중하겠다. 그러니 타인들도 내 삶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라는 선언이나 진배없다.
균형 감각이 떨어진 노년기 어른의 뜬금없는 발설이 내 가슴에 망칫돌처럼 얹힌 까닭이 어렴풋이 짐작됐다. TV를 너무 보셔서 현실과 극중 상황을 혼동하셨건, 왕년에 당신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가 지금 훨씬 유복한 팔자임에 분개하셨건, 당신보다 가난하던 친척이 당신보다 자식 농사를 잘 지어 눈에 거슬렸건, 연유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끔찍이 싫어한 것은 행여나 나도 아주 늙어서 그런 소리 할까봐 겁이 나서였다.
처음 가는 집이지만 찾느라 수고할 필요는 없었다. 네 번째 집이었던 연립주택을 재건축해 같은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앉아 있었다.
현관 문을 여니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아니, 약속이 어그러지잖아.’ 깜짝 놀랐다. 칠십대 중반의 올케에게서 점심 대접 받으려는 시누이들은 세상 천지에 없다. 집 구경하고 바깥에 나가 점심 대접해 드리기로 했는데 전화상으로는 ‘OK’하시던 양반이….
어디선가 닭 냄새가 풍기고 눈에는 부침개 한 소쿠리가 들어왔다.
“그냥…. 하고 싶어서.”
올케는 씩 웃고 전기밥솥의 버튼을 눌렀다. 아침에 일어나니 심심해서 밥하고 싶었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밥이 끓는 동안 우리는 검사하듯이 집 구경을 했다. 요즘 짓는 아파트는 구조가 잘 빠져서 실제 평수보다 훨씬 넓다. 두 분 사시기에 너무 넓지 않느냐고 묻자 언니는 당연히 ‘우리한테 딱 맞아’라고 대답한다.
나도 올케언니처럼 늙고 싶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내 집이 나에게 딱 맞고, 내 집에 온 사람의 입에는 내가 한 밥이 들어가야 한다. 얼마나 당당한가.
※ 윤명혜씨는···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고와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어과를 졸업했으며, 1971년 여성동아 장편공모에 ‘난파선’이 당선돼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도둑의 아내’ ‘질투’ ‘여자가 여자에게’ 등의 장편소설과 창작집 ‘우리들의 비가’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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