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소녀그룹 SES의 멤버 출신인 가수 바다(29·본명 최성희)가 최근 환갑을 맞은 아버지에게 뜻 깊은 선물을 했다. 평생 밤무대 가수로 활동한 아버지 최세월씨(60·본명 최장봉)에게 그동안 당신이 불렀던 곡을 모아 메들리 DVD를 제작해 드린 것. 한때 밤무대 가수로 일해온 자신의 이력이 딸의 활동에 누가 될까 바다의 아버지임을 숨기기도 했다는 최씨는 딸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가수’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기는 했지만 음반을 정식으로 발매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막내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선물을 해줬어요. 자식은 부모가 전생에 진 빚을 받아내기 위해 태어나는 ‘빚쟁이’라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우리 막내에게 빚을 지네요.”
지금은 성인가요를 부르고 있지만 최씨는 원래 열네 살 때부터 창을 했던 소리꾼이다. 남도 명창의 핏줄인 어머니에게서 재능을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음색으로 창을 해 동네에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는 결혼 뒤 아내와 1남2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밤무대 가수 일을 시작하면서도 처음에 창을 고집했다고 한다.
“소리꾼으로 태어났으니 소리꾼으로 인정받으려 했죠. 밤무대에서도 한복을 입고 구성진 소리 한 가락 뽑아내면 많은 사람이 좋아했어요. 제가 직접 곡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는데 가사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내용이어서 인기가 많았어요.”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힘든 학창시절 보낸 바다
하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바다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초등학교 때까지 건강했던 아버지 최씨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가세가 기울었던 것. 돌연 위와 폐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으면서 전만큼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저희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무대에 섰던 분이세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어요. 당시 살았던 조립식 주택 문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는 쌀쌀한 늦가을 저녁 거기서 나오다가 우연히 아버지가 낡은 코트를 껴입고 집을 나서며 ‘오늘은 정말 나가기 싫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그 말이 너무 가슴이 아파 펑펑 울었죠.”
처진 아버지 뒷모습을 보며 그는 “아버지도 한 남자고,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경기도 시흥에 살며 아버지는 밤무대 가수 일을, 어머니는 약 달이는 일을 했다고 한다. 남편 몸도 성치 않은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다른 사람의 약을 달여야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바다는 부모의 걱정을 덜기 위해 학교 생활에 더욱 충실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집안 형편이 가장 어려웠는데 그때 저는 선생님들께서도 인정할 정도로 모범생이었어요. 아버지가 무대에서 노래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번다는 사실이 저를 일찍 철들게 한 것 같아요.”
아버지의 소리꾼 기질을 이어받아 어릴 때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바다는 ‘악착같이 연습해 성공하겠다’고 다짐하며 열정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아버지 최씨도 막내딸의 근성을 인정했다.
“중학교 때 경기도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에 시흥시 대표로 막내가 출전하게 됐는데 매일같이 연습하더라고요. 사실 당시 웅변이라는 게 돈 있는 사람들만 자식에게 시킬 수 있는 전유물과 같았거든요. 그런데 막내는 학원에 한 번도 다니지 않고 48명 중 1등을 했어요. 각 시에서 리무진을 타고 온 아이들을 제치고 우승 깃발을 받았던 건 지금 생각해봐도 기적같은 일이에요.”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할 시기가 되자 바다는 음악 지도를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는 안양예고에 원서를 넣었다고 한다. 당시 안양예고는 연예인 지망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경쟁률이 꽤 높았다고.
“그래서 더 지원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아버지께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먹고살기 힘든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어려운 형편이지만 뜻을 굽히고 싶지 않아서 밤낮으로 연습해 시험을 봤는데 결국 실기 1등으로 합격했어요. 준비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셨던 아버지는 그제야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가서 열심히 한번 해보라’며 인정해주셨죠.”
우여곡절 끝에 안양예고에 입학한 바다는 시흥 집에서 안양에 있는 학교까지 가려면 한참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내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에 맞춰 춤과 노래연습을 하다가 버스를 놓친 날이 많다고.
“여름에 그렇게 연습하면서 정류장에 도착하면 속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였어요. 거의 매번 버스를 놓치니까 결국 아버지께서 차를 가진 동네 아저씨께 부탁해 통학하게 해주셨죠.”
올해로 데뷔 10년째를 맞은 바다는 지금까지 번 돈을 집을 마련하라며 모두 아버지에게 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최씨는 아직까지 전셋집에 살고 있다. 딸에게서 받은 돈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각종 봉사단체에 모두 기부한 것.
바다와 아버지 최세월씨는 힘겨웠던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밤무대 가수 시절 밥도 못 먹고 다닐 정도로 힘들게 살았던 기억 때문에 쉽게 돈을 쓰지 못하세요. 그때 당시 심하게 아파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기 때문에 건강을 되찾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시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검소하게 살면서 ‘이왕이면 번 돈으로 남을 돕자’고 말씀하세요.”
최씨는 젊은 시절부터 ‘한마음 문화예술단’이라는 봉사단체를 꾸려 서울시내 여러 공원에서 노인들을 위한 무료공연을 해왔다. SES로 활동할 당시 바다도 이런 아버지와 함께 무료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SES 5집 음반을 냈을 때였는데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봉사활동하시는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노래를 한 적이 있어요. 사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버지께서 이끄는 봉사단을 따라가 함께 노래했는데 아버지가 마이크를 주시면 곧잘 불렀던 기억이 나요. 지금도 제 노래를 듣고 좋아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어려웠던 시절 생각도 나고 해서 마음이 짠해져요.”
얼마 전 차를 사려고 했던 바다는 계약을 취소했다고 한다. 빌 게이츠, 워런 버핏 같은 세계적인 부자가 된 후에나 차를 사라고 한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다. 바다는 자신이 준 용돈을 천원짜리로 바꿔 아껴 쓰고, 딸이 만들어준 신용카드로 친구들에게 밥이라도 살 때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딸이 사는 것’이라고 꼭 말한다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다고 한다.
최씨에게 영향을 받은 바다는 지난 3월 서해안 살리기 홍보대사에 위촉돼 태안으로 봉사활동을 가기도 했으며 결식아동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꾸준히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게 사실이지만 의지만 있다면 환경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웅변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던 제가 도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도 강한 의지 덕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분들에게 제 이런 생각을 전하고 싶어서 계속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바다는 돈이 없어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고,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아버지 덕분에 가수의 기본기를 닦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유명한 음악 선생님들보다 더 좋은 선생님이세요. 어릴 때 혹독하게 가르치셨거든요(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자고 있으면 아침마다 발로 아랫배를 눌러 깨우셨어요. 놀라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날이 매일같이 반복돼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돈 들이지 않고 제대로 소리를 내게 하는 지도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딸이 사람의 마음 움직이는 노래 불러 국민 가수되길 기도해요”
바다는 아버지에게서 발성법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노래하는 법에 대해서도 배웠다고 한다. 최씨는 딸에게 늘 “혼을 담아 노래하라”며 충고한다고.
“아버지는 감정 없이 노래하는 걸 싫어하세요. 노래 가사의 주인공이 돼서 그 사람의 감정을 갖고 불러야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으시거든요.”
최씨의 이름으로 이번에 발매 된 메들리 DVD는 그의 인생관과 아내를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의미가 깊은 앨범이라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세대 어른들이 겪어야 했던 애환을 추억하는 노래가 많아요. 밤무대 가수로 일했던 시절 말없이 함께해준 엄마를 위해 쓴 ‘영원한 내 당신’이라는 곡은 이 시대 모든 아내를 위한 노래라고 하세요.”
최씨가 만든 노래 중에서 딸 바다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내 인생이 최고야’라는 곡이라고 한다. 가사 중 “사람들이 날보고 비웃을지 몰라도 꿈을 안고 살아가는 내 인생이 최고야”라는 부분이 가장 좋다며 즉석에서 부르기까지 했다. 최씨가 후배 가수와 술 한잔 마시며 앉은자리에서 바로 지었다는 이 노래 가사에 바다와 아버지 두 사람의 평소 생각이 담겨 있다고 한다.
처음으로 정식 앨범을 발매하게 된 최씨는 막내딸 바다와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아울러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딸이 오래오래 기억되는 가수가 되는 것이라고.
“가수로 태어났으면 사람들 머릿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노래 하나 정도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막내 바다가 지금껏 달려온 것처럼 계속 노력해 전 국민의 사랑받는 노래를 갖게 된다면 제 숙원을 푼 것 이상으로 행복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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