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말숙씨(77)와 국악인 황병기씨(72)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예술가 부부다. 아내 한씨는 지난 1957년 단편소설 ‘신화의 단애’로 등단한 중견 작가. 93년 장편 ‘아름다운 영가’(81년 발표)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을 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편 황씨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가야금 명인으로, 60년대부터 해외 연주 여행을 다닌 국악계의 대표 ‘스타’다.
올해는 한씨가 등단 50주년을 보내고 새로운 반세기를 시작하는 해. 강산이 다섯 번 바뀔 만큼 긴 시간 동안 함께 우리 예술계를 이끌어온 이들의 삶이 궁금했다. 하지만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에서 마주앉은 이들은 세월과 명성의 무게를 잊게 할 만큼 젊고 자유로워 보였다. 처음 인터뷰 요청 전화를 걸었을 때 “황병기도 같이 하는 거예요?”라며 거침없이 남편 이름을 불러 기자를 놀라게 했던 한씨는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죽 이름을 불러요. ‘황병기’를 ‘황병기’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불러?”라며 화통하게 웃었다. 그는 인터뷰하는 동안 ‘황병기’와 ‘황 선생’이라는 호칭을 번갈아 사용했다.
명랑한 달변가 한씨와 달리 말수가 적은 황씨는 아내 얘기를 들으며 빙긋이 미소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서 자연스레 아내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묻어났다. 한씨가 황씨보다 다섯 살 많은 ‘연상연하’ 부부인 이들은 연애 초기부터 서로의 예술과 삶을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한말숙·황병기 부부는 젊은 시절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며 처음 만나 50년 이상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황병기’를 처음 본 건 1955년 국립국악원에서였어요. 대학교 때 가야금을 배우고 싶어 다녔는데, 선생님들이 고등학생 한 명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거예요.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가야금 실력이 뛰어난데 공부까지 잘한다고요.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하던 어느 날, 경기고 교복을 입고 연습실로 들어오는 이 사람을 봤죠.”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한씨는 남편의 첫인상을 ‘뽀얗고 해맑아 보였다’고 기억했다. 교복을 입고 있던 터라 ‘남편감’으로는 생각 못했지만, 황씨의 밝은 얼굴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속으로 ‘우리나라에 저런 얼굴은 저 사람 하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죠. 한참 뒤에 인터뷰를 하면서 ‘남편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하니 이 사람이 ‘나는 두 눈으로 반했다’고 하더군요(웃음).”
자택 1층은 아내의 공간, 2층은 남편의 공간으로 나눠써
황씨는 아내를 처음 봤을 때 “아주 명랑하고 잘 웃는 여성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로 세상이 어둡던 시절, 누구보다도 밝고 재능이 넘쳤던 두 사람은 함께 가야금을 연주하며 조금씩 친해졌고, 이내 서로의 집에 놀러 다니며 대화를 나눌 만큼 가까워졌다. 한씨가 등단작 ‘신화의 단애’를 처음 보여준 이도 황씨였다고 한다.
‘신화의 단애’는 50년대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담한 작품. 명동 댄스홀을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해줄 계약 동거남을 구하는 가난한 화가 지망생 진영이 주인공이다. 그의 주위에는 국선에 입선하고도 영화 간판 그리는 일로 근근이 살아가는 애인 ‘경일’과 진영에게 구애가 담긴 야릇한 편지를 보내는 경일의 친구 ‘준섭’ 등이 있는데, 진영은 댄스홀에서 적당한 ‘건수’를 찾지 못하면 경일이나 준섭의 방을 찾는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쿨~’하기 그지없는 이 작품에서 당시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전통 윤리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탕녀’ 진영은 파멸에 이르기는커녕 낯선 남자에게 받은 돈으로 밀린 하숙비를 갚고, 화구를 구입해 다시 예술로 뛰어드는 것. 당시 ‘신화의 단애’는 평론가 김동리와 이어령 사이에서 ‘실존주의 문학 논쟁’을 촉발시켰을 만큼 우리 사회에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제가 ‘진영’ 같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출판사에 항의 편지를 보내고, 아주 난리였어요. 결혼 전이었으니까 저한테 좀 집적거려보려고 집 주위를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었고요(웃음). 그런데 ‘황병기’는 그저 ‘재밌다’고만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편이었죠.”
한씨는 “그 후에도 남편이 내 작품에 대해 가타부타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다만 세상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들려주곤 하는데,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 피란 시절을 제외하고는 죽 이곳에서 살아온 내게 남편의 경험은 값진 소설 소재”라고 했다. 한씨 역시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남편이 국악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묵묵히 지켜봤을 뿐, 반대도 조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62년 결혼한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서로를 사랑하되 상대의 삶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자택 1층은 한씨가, 2층은 황씨가 사이좋게 나눠 쓴다. 한씨의 집필 공간과 서재는 1층에, 가야금 10여 대가 놓인 황씨의 작업실과 서재는 2층에 있는 것. 1층과 2층이 트여 있어 목소리만 높이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식사시간과 밤에는 황씨가 주방과 안방이 있는 1층으로 내려온다고 한다. 황씨는 이런 삶에 대해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부끼리 뭐든 같이 하려 하고 도우려 하기 전에, 혹시 내 행동이 상대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신세대 부부도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자유롭고 개성적으로 살고 있는 이들은 일상생활도 ‘청년’과 다르지 않다.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닐 정도로 젊은 한씨의 건강관리 비법은 춤. “젊은 시절 차차차, 탱고, 블루스를 다 배워 지금도 종종 춘다. 춤을 추면 허리 살이 빠지고 소화가 잘돼 좋다”고 하는 한씨는 이메일을 이용해 출판사·언론사와 연락을 주고받고, 원고 집필도 컴퓨터로 한다. 그는 “워낙 악필이라 컴퓨터가 없었다면 작가를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황씨는 인터넷 홈페이지(www.bkhwang.com)를 만들어 스스로 관리하고 있다. ‘ㅎㅂㄱ’이라는 아이디를 이용해 수시로 글과 사진을 올리는데, 네티즌이 댓글을 달면 그 아래 다시 댓글을 달아주기도 한다. 하늘색으로 예쁘게 꾸며진 그의 아이디 서체를 보면 황씨가 70대 국악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믿음과 칭찬으로 4남매 모두를 수재로 키워
이 부부는 남다른 교육법으로 슬하의 4남매를 모두 수재로 기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울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나 하버드대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은 장남 준묵씨(45)는 지난 99년 기하학 분야에서 15년간 풀리지 않던 ‘라자스펠트 예상’을 증명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인물. 2006년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은 그는 지금 고등과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등과학원은 지난 96년 우리나라 기초과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순수기초과학 연구기관이다.
막내아들 원묵씨(40)는 서울대를 졸업한 뒤 유학해 미국 텍사스 A&M대학 교수로 있으며, 딸 둘은 나란히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문학박사인 큰딸 혜경씨(46)는 두 자녀를 키우는 전업주부이고, 둘째 딸 수경씨(43)는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전공한 뒤 현재 동국대에 출강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아이들을 잘 키웠냐고 묻곤 하는데, 사실 우린 할 말이 없어요(웃음). 오히려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둔 게 창의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죠. 저는 ‘라자스펠트 예상’이 뭔지 잘 모르지만, 준묵이 얘기로는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그걸 풀 수 있는 영감이 떠올랐대요. 모든 분야에서 뭔가를 이루려면 이렇게 기존 것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영감이 필요하잖아요. 그건 부모가 억지로 집어넣어줄 수 있는 게 아니죠.”
이 부부는 지난 74년부터 지금까지 서울 북아현동에서 살아왔다. 네 아이는 모두 집 근처인 강북의 공립학교를 다녔고, 학원수업이나 과외를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한씨는 “아이들이 새 학년이 되면 학교에서 부모가 바라는 것을 써내라고 하는데, 그때마다 ‘육체와 정신이 건강한 아이로 길러주세요’라고 썼다”며 “아이들에게도 남을 짓밟고 성공하는 것보다 선후배와 동료에게 신용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눈·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나는 위험하니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고 아이들은 그래도 가야 한다고 우겨서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어요(웃음). 황 선생도 아이들 성적에는 아예 무심해서, 시험기간에 밤 12시 넘게까지 공부하고 있으면 건강 해친다며 전등불을 꺼버리곤 했죠. 엄마 아빠가 그러니 오히려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한 것 같아요.”
한씨는 “대신 우리는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많이 사줬다”고 했다. 특히 황씨는 연주회 때문에 외국에 다녀올 때마다 현지에서 좋은 책을 골라 사오곤 했는데, 그 가운데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건 ‘How does thing work?(사물은 어떻게 작동되는가)’라는 과학전집이었다고 한다. 4남매 모두 영어로 된 이 책을 무척 좋아해 끊임없이 읽고 또 읽었고, 나중엔 서점에 가서 비슷한 분야의 책을 사다 읽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영향인지 두 아들 모두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아이들을 진실하게 대하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도 이들의 남다른 자녀교육법 가운데 하나다. 한씨는 첫째 혜경씨를 키울 때 경험담을 들려줬다.
“아이들이 약을 잘 안 먹으려고 하잖아요. 어떻게든 먹여보려고 ‘약이 하나도 안 쓰네. 같이 먹어볼까?’ 하고 달래도 절대 안 통하더군요. 그런데 황 선생이 ‘와, 이렇게 쓴 걸 먹어? 우리 혜경이 최고네’ 하니까 받아먹는 거예요(웃음). 그걸 보며 ‘아, 저거구나’ 싶었죠.”
한씨는 “우리는 아이들에게 뭘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며 “네 아이 모두 대학원에서 학부 때와 다른 전공을 선택했는데, 스스로 원하는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믿고 지켜보며 격려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만 자녀가 부모의 대를 이어 예술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반대했다고 한다.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자녀들이 ‘최고’가 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아이들이 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중에서도 원묵이는 대학 다닐 때 국제학생음악제에 참가해 사물놀이를 연주하고, 미국 유학을 가면서도 가야금과 장구를 챙겨갔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죠. 작곡, 편곡 실력도 대단했고요. 하지만 황 선생이 ‘내가 볼 때 넌 음악 분야에서 ‘넘버 원’이 될 정도는 아니다. 최고가 될 게 아니면 다양한 영역으로 뻗어갈 수 있는 공부를 하는 편이 더 낫다’고 했죠.”
현재 미국 텍사스 A&M대학 생명공학과 교수로 있는 원묵씨는 한 인터뷰에서 “박사과정 말년까지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고,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 생명공학 분야에서 일하게 돼 이 목적을 좀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달성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씨는 이에 대해 “원묵이뿐 아니라 네 아이 모두 자기 앞가림하고 사는 걸 보면 그저 고맙다”고 했다. 문득 그가 지난 2003년 잡지 ‘한국문학’에 기고한 가상 유언장이 떠올랐다. 한씨는 이 유언장 첫머리를 “너희 형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힘 안 빌리고 스스로 성장해 오늘에 이르렀다. 고맙다”는 인사로 시작했다. 이어 수의 마련 등 장례 절차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한 뒤 말미에 “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 된다. 아빠는 손이 안 가는 분이니까 너희들 중 여건이 맞는 아이가 아빠 가까이에서 살면 된다”고 적었다. “그 마음이 아직도 변함없느냐”고 묻자 그는 크게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을 만나도 돼요. 우리는 결혼할 때부터 ‘서로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면 바로 말하자. 그리고 그 얘기를 들으면 언제든 상대방을 선선히 새로운 파트너에게 데려다주자’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죽고 나면 이 사람을 데려다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안 돼요(웃음).”
한씨의 대답에 황씨는 빙긋 웃으며 “글쎄. 그건 뭐 자기 마음이고…” 했다. 그런 남편을 보며 “당신이 먼저 가면 나도 몰라” 하고 웃어 보이는 한씨의 모습에서, 여전히 신혼 같은 50년 ‘평등 부부’의 내공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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