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초,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 임원으로 발탁돼 화제가 됐던 이현정 상무(46·글로벌마케팅본부). 그의 경력은 여러모로 이채롭다. 25년 전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장학금 하나만 믿고 미국 유학을 떠나 일리노이대학에서 산업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미국 굴지의 통신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직한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마케팅영업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 여성으로는 드물게 실리콘밸리에서 손꼽히는 벤처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돼 3천만 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하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공학박사인 남편이 뒤늦게 역사학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진심으로 격려해줬어요”
남다른 경력만큼이나 그의 결혼생활 역시 평범치 않다. 일리노이대학에서 만난 이스라엘인 아미르 마네씨(55)와 결혼해 대니얼(16)·조너선(14) 두 아들을 두고 있는 것. 그는 4년 전 삼성전자 상무로 발탁돼 한국으로 오면서 남편과 아이들을 미국에 ‘놓고’ 왔다. 당시 아이들 나이는 열 살과 열두 살. 몇 년이 될지 모를 외국에서의 직장생활을 위해 엄마 혼자 떠난다는 건 한국사람 정서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이씨도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도전해볼 만한 기회라는 결정을 내렸고 가족들은 모두 엄마의 결정을 흔쾌히 이해해주었다고.
“남편은, ‘당신은 어차피 미국에 있어도 일하느라 집을 많이 비우는 사람’이라면서 제 한국행을 격려해줬어요.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일하는 엄마, 출장 다니는 엄마를 항상 봐왔던 터라 저의 결정을 새삼스러워하지 않았고요.”
마케팅팀을 이끄는 상무 아니랄까봐 그는 “같은 이야기를 해도 어떻게 파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엄마가 한국에 일하러 가느라 너희 곁을 떠나게 돼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절대 얘기 안 했어요. 엄마가 한국에 있는 동안 방학 때마다 놀러올 수 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고 했죠.”
이씨는 엄마가 직장 다니는 문제로 자녀에게 미안해하거나 불안해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이들에게 그 감정이 전달되기 마련이므로 자신은 “열심히 일하는, 활동적인 엄마라서 얼마나 좋은가”에 대해 말해주며 아이들을 키웠다고 한다.
함께 살지 않아도 남편과 아이들은 엄마가 서울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또 이씨는 남편과 아이들이 오늘은 무엇을 했고 내일 뭐 할 건지 등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안다고 한다.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매일 두 시간 이상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남편과 저는 아이들 키우는 일을 똑같이 나눠서 했어요. 오히려 저보다 남편이 아이들 감정의 기복에 맞게 요구를 수용하고 조절하는 일에 소질 있는 편이고요.”
남편, 두 아들과 방콕 여행 중 찍은 사진. 이현정 상무 가족은 추억을 만드는 가족여행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씨가 한국으로 오고 2년 후에는 남편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기업 컨설턴트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공학박사인 남편은 1년 전부터 미국 럿거스대 역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남편이 역사학 박사과정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이씨는 적극 찬성했다고.
“모두들 장수하는 세상인데 늦게 공부하는 건 문제가 안 된다고 했어요. 아이들에게도 골프나 치러 다니는 아빠보다 공부하는 아빠가 얼마나 멋있고 자랑스럽겠어요.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격려해주었어요. 그게 제 솔직한 생각이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인생. 이씨의 삶을 지금까지 밀어온 원동력은 바로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는 열정이었다. 때로는 그의 선택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거리가 먼, 위험을 동반한 모험이기도 했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국유학을 선택하고, 연구원들이 꺼리는 마케팅 분야에 도전하고, 또 가족을 뒤로하고 한국에 돌아오는 일련의 선택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하고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제 삶은 청개구리 같은 선택의 연속이었죠. 비슷한 의미로 요즘 기업계에는 블루오션 전략이 유행하고 있어요. 남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전략인데 경영 용어로만 쓰기에는 아까운 단어라고 생각해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면 인생이 훨씬 더 풍요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국에 붙들어놓으면 망칠 아이라며 아버지 설득해 유학 보내준 어머니
그가 어릴 적만 해도 ‘여자는 곱게 커서 시집 잘 가는 게 최고’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이런 성차별과 불평등이 못 견디게 싫었다고 한다.
“저는 어렸을 때 명절이 제일 싫었어요. 명절에는 밥을 안 먹고 버텼죠.”
여자들은 고생스럽게 일을 하는데 남자들은 안방에서 큰상 받아 밥 먹는 모습이 못마땅해서였다. 종부인 어머니는 안방에서 남자들과 함께 상을 받을 때 딸도 앉혀주려고 했지만 이씨는 혼자 배신자처럼 남자들 틈에 끼는 것도 싫고 다른 여자들과 작은방에서 밥 먹는 것도 싫어서 그냥 굶었다고 한다.
대학에 진학할 당시 여자의 경력 관리나 진로에 대해 상의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탓에 그는 그저 교사가 돼 돈을 모아 유학을 가겠다는 생각으로 영어교육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번듯한 대학을 졸업해도 여자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안 후로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떠날 궁리만 했다. 그리고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장학금 지급 조건으로 입학허가를 받아 대학 졸업식을 며칠 앞둔 82년 초,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제가 유학을 가던 80년대 초에는 여자가 유학을 갈 때 대체로 결혼을 해서 남편과 함께 떠나는 게 정석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남의 인생에 들러리로 편승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결혼 유학은 원하지 않았어요.”
육군 장성이던 아버지는 딸의 미국 유학을 썩 반기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우리 딸은 한국에 붙들어놓으면 망칠 아이다. 억지로 막아봐야 기어이 떠날 것이니 조용히 보내자”고 아버지를 설득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한다.
대학원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하겠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부모는 “반대한다고 들을 딸이 아님”을 알았기에 긴 말 없이 허락했다고 한다. 아니, 딸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를 하는 것임을 잘 알았다는 편이 정확한 표현이다.
이씨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결혼은 흔히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자신들의 경우 결혼을 통해 진정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현정이는 이다음에 결혼하면 남자를 상당히 피곤하게 할 거야’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은연중에 생긴 불안함과 저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남편을 만남으로써 깨끗이 털어낼 수 있게 됐어요. 남편은 제게 자신은 ‘이현정 팬클럽 안에서도 극렬 열성 팬 1호’라고 말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모든 잠재적 역량이 꽃피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죠.”
그의 남편 역시 결혼을 통해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원래 공부를 마치고 이스라엘로 돌아갈 계획이었던 남편은 이씨와 함께하기 위해 미국에서의 삶을 선택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남편의 어머니는 폴란드 출신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보상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의무감을 안고 자라난 남편은 “나를 위해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달라”는 요구 대신 “최대한 당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보라”고 말하는 그를 만나 고단하게 지고 있던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86년 일리노이주 법원에서 결혼했다. 서류비용 50달러, 참석해준 친구들과의 중국식당 점심값 50달러 등 총 1백 달러가 결혼식 비용의 전부였다.
결혼 후 4년 만에 큰아들 대니얼을 낳았고 25개월 후에는 둘째 조너선이 태어났다. 그의 부부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 “너희는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단지 이 큰 세상의 일부분임을 배워야 한다”는 태도를 길러주기에 주력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역량을 키우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는 너희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너희들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너희가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나도 한 인간으로서 너희들에게 존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쳤어요.”
외모상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두 아들이 어릴 때 간혹 동네에서 ‘동양인, 중국놈’이라는 놀림을 듣고 오는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그럴 때면 “너랑 싸우는 아이가 네 약점을 찾다 찾다 못 찾고 고작 동양인이라는 꼬투리를 잡은 거다.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나는 동양인임이 자랑스럽다. 동양에는 중국 말고 많은 나라가 있고 우리 엄마는 한국인이다’라고 말해주라”고 아이들에게 조언했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들은 밖으로 발산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어요.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자신으로 인해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문제도 자신의 탓이라는 식의 피해망상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죠.”
2009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큰아들은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어하고 어릴 적부터 전쟁역사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던 둘째는 사관학교 진학을 희망하는데 그는 아이들이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그것을 이루겠다는 책임감과 주인의식이라는 것.
“자기 혁신 통해 꾸준히 발전하려면 자신의 진로에 대해 100% 확신을 가져야 해요”
“미국에서도 명문대에 보내려고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닦달하는 부모들이 많아요. 게다가 미국 명문대학에는 공부는 물론이고 예체능 등 이것저것 다 잘한다는 치장이 그럴듯해야 들어갈 수 있어서 부모들이 그 포장을 만들어주느라 극성이죠. 하지만 저는 앞으로 이 아이들의 미래에는 대학 간판이 아니라 대학 그 이후가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명문대학을 나왔다는 타이틀이 통하는 사회는 지금도 이미 아니고 미래에는 더욱더 아니라는 것이다.
“명문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이 100m 달리기라면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대학 이후로 긴 인생 동안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꾸준히 발전하려면 자신의 진로에 대해 100% 확신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이씨는 2년 전 큰아들 대니얼이 컴퓨터 게임에 미쳐 매달릴 때도 불안한 마음을 참고 기다렸다고 한다. 게임을 말리는 대신 온라인 게임에 경제학 이론을 접목시키는 길을 제시해줬는데 결국 아들은 게임을 그만뒀을 뿐 아니라, 대학 경제학 교수들과 함께 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그의 가족의 생활수준은 소득 수준에 현저히 못 미친다고 한다. 한 번도 비싼 차를 산 적이 없고 15년 동안 한 집에서 실내 인테리어도 바꾸지 않은 채 살고 있으며, 가구도 자취생들이나 쓸 법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에 집중 투자하기 때문이다. 바로 추억이다.
“추억은 어떤 도둑도 훔쳐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는 보물이고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재산이죠. 추억은 여러 경로를 통해 만들어질 수 있어요. 아이들과 공연을 보러 갈 수도 있고 미술관에 가거나 산책을 할 수도 있죠.”
그 가운데 그의 가족이 가장 즐기는 것은 바로 여행이다. 일년에 한두 차례 아이들과 여행을 하다 보니 가본 나라가 어느덧 40개국이 넘는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가운데도 리조트가 없는 곳으로만 돌다 보니 아이들이 불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세계화 추세에 맞춰 지구 곳곳이 급속하게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오지도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오지 여행을 고집한다고 한다.
“파리나 런던은 지금이나 10년 후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오지는 지금 보지 않으면 영원히 놓칠 수도 있죠. 또 부족한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깨닫게 하는 계기도 되고요.”
최근 한국 사회와 기업문화에 대해 경험하고 느낀 점, 그리고 자신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묶어 ‘대한민국 진화론’이라는 책을 펴낸 그는 두 아들에게 읽히기 위해 요즘 책을 영어로 번역 중이라고 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몹시 궁금해하기 때문에 번역을 서둘러야 하는데 한국말만의 느낌을 영어로 살리기가 쉽지 않네요. 제가 가진 모든 생각과 철학의 원천인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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