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 실례합니다” “실례 실례하세요” “쏙! 쏙! 들여다보는 부채도사님이 맞나요?” “맞아, 맞아, 맞~아. 어떻게 알고 왔어!”
80년대 후반 KBS 코미디 프로그램 ‘유머 1번지’에서 ‘부채도사’를 연기해 큰 인기를 모은 개그맨 장두석(50). 하지만 그는 지난 92년 돌연 활동을 중단했고 이후 “신 내림을 받아 진짜 도사가 됐다” “큰 병을 앓고 있다”는 등 소문에 휩싸였다. 그런 그가 15년 만에 개그맨이 아닌 발라드 곡 ‘오늘밤에’를 부르는 가수로 연예계에 돌아왔다.
그를 만난 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던 지난 10월 초. 80kg 가까이 나가던 젊은 날에 비해 22kg이 빠졌다는 그는 희끗희끗해진 머리와 수염, 눈가에 진 잔주름 등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장두석은 다시 연예계로 돌아오기까지 자신이 겪은 지난 삶의 얘기를 담담히 들려줬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늘 허전하고 고독했던 개그맨 생활
그가 방송에 입문한 건 지난 80년 ‘TBC 제2회 개그 콘테스트’에 입상하면서부터. 그는 이후 1년여 정도 무명생활을 겪었지만 ‘시커먼스’와 ‘부채도사’ 등이 인기를 모으면서 큰 사랑을 받았다. 장두석은 당시 자신이 누구보다도 화려한 연예계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CF를 10개 이상 찍었으니 경제적으로 굉장히 부유했죠. 그런데 그 기쁨은 잠시뿐, 늘 허전하고 고독했어요. 대중의 함성을 듣거나 동료 개그맨들과 술 마시고 노는 시간은 무척 행복한데 홀로 집으로 돌아갈 땐 ‘내가 왜 이러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부채도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매일 밤 아이디어를 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이렇게 살다가는 마흔도 되기 전에 죽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죠.”
장두석은 이 같은 갈등이 고조되던 지난 92년, 동료들과 함께 남미로 교포 위문 공연을 가기 위해 공항에 갔다가 “이렇게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로 비행기를 탔다간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고 한다. 그길로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친 채 돌아선 그는 연예활동을 중단한 뒤 명상센터에 들어가 마음을 진정시켰다고.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음식 냄새가 역겨워 도저히 삼키지 못하겠더라고요. 물만 먹고 하루 8시간씩 명상을 하는데 나중에는 가래가 나오고 팔다리가 제 멋대로 움직였어요. 명상용어로 ‘정화’라고 하는데, 한두 차례 이런 고통을 겪고 나니 어느 날부턴가 쑥 들이마신 공기가 식도에 닿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찻물 끓이는 소리에서는 오르가슴이, 음식을 맛보는 혀에서는 행복감이 느껴졌죠.”
그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명상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자신처럼 스트레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명상센터를 설립한 것. 하지만 명상센터는 6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고 이후 문 연 녹음실·출판사·전통찻집 등도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제 삶을 보면서 부모님이 많이 안쓰러워하셨어요. ‘잘나가던 개그맨 생활을 그만두고 왜 사서 고생하냐’고 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하지만 정작 저는 실패도 세상살이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통장의 잔고가 점점 줄어들어도 긴장감을 크게 못 느꼈죠. 그런데 2년 전,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닥쳤어요. 그때 처음으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통찻집을 개조해 라이브 카페를 열었고요.”
단 산 사람의 손님이 찾아와도 노래를 부른다는 장두석. 그는 ”돈과 인기에 구애받지 않는 지금이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라이브 카페를 연 뒤 장두석은 직접 시장에서 장을 보고 서빙을 하며 하루 6시간씩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개그를 하면 쉽게 돈을 벌 텐데, 왜 이런 고생을 하냐”고 말하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그는 “숨 막히던” 그때로 돌아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고.
그가 라이브 카페를 연 것은 사실 개그맨이 되기 전 가수를 꿈꿨을 만큼 남다른 노래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그맨으로 데뷔하기 전,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입상한 경험이 있는 그는 개그맨이 된 후에도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해 음악과 개그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가 출연했던 개그 코너 ‘아르바이트 백과’ ‘시커먼스’ ‘부채도사’ 등에서 흘러나온 배경음악을 직접 만든 것. 개그맨으로 데뷔한 지 10년째 되던 해인 지난 90년에는 ‘사랑한다 해도’를 타이틀곡으로 한 1집 음반을 발표하고 단독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사실 ‘부채도사’는 1집 음반이 성공할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신촌의 한 점집에 들렀다가 얻은 수확이에요. 후배 작곡가와 무대 소품을 사러 돌아다니다가 ‘점이나 한번 보자’며 한 점집에 들어갔는데 검은 바탕에 동자승이 그려진 부채를 든 아주머니가 부채를 흔들며 ‘부채신이시여, 웃기는 게 좋겠습니까, 가수를 하는 게 좋겠습니까’ 하고 묻더라고요. 그러고는 ‘웃기는 사람이 되는 게 좋~다’면서 옆으로 쓰러졌는데 그 모습이 참 재밌었어요. 이를 좀 더 희극적으로 표현한 게 ‘부채도사’예요. 1집은 실패했지만 ‘부채도사’로 떴으니 가수보다는 개그맨 쪽이 낫다는 점괘가 들어맞은 거죠.”
“얼마 전 KBS 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를 통해 원조 부채도사인 그 아주머니를 찾았다”는 그는 “새삼 그때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꽤 먼 길을 돌아 어린 시절 꿈을 이룬 셈이에요. 사실 처음엔 그저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만족했어요. 그런데 손님들이 먼저 ‘기타 연주 솜씨와 가창력이 아깝다. 정식으로 음반을 내보라’고 권하시더라고요.”
몇 차례 망설이던 그는 주변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지난해 8월 음반을 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1년여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노래를 발표했다고. 특히 2집 타이틀곡인 ‘오늘밤에’는 장두석이 20여 년 전 미국으로 공연을 갔다가 만났던 한 여성을 떠올리며 만든 자작곡이라고 한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지도 않은 채 헤어져 더 이상 만나지 못했지만 그분과의 만남은 아직도 마음 한편에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 그는 “많은 분들이 제가 결혼한 걸로 아는데 실은 여태껏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본 총각”이라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여태껏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본 노총각이에요”
장두석이 대본과 주연을 맡고 동료 개그맨 김정식이 연출한 ‘오늘밤에’의 뮤직비디오는 40대 남자와 20대 여자의 사랑을 다룬 내용. 그에게 “실제로도 그런 사랑을 꿈꾸냐”고 묻자 “불륜만 아니면 상관없지 않은가. 동년배보다 나이 차 많은 여자에게 더 끌리는 편”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또래 여자를 만나면 서로에게 바라는 게 많아지더라고요. 나이가 있다 보니 결혼이나 아이 문제도 걸리고요. 그런데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사람을 만나면 오빠 같기도 하고 아빠 같기도 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할 듯해요. 상대를 이해하거나 포기하는 법도 빨리 배울 것 같고요. 그런 소망을 담은 뮤직비디오를 본 어느 네티즌이 얼마 전 인터넷 게시판에 ‘당신의 딸이 당신의 친구와 결혼하겠다면 허락하겠냐’고 묻는 글을 남겼던데, 자식을 낳아보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굳이 말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볼 때 얼굴을 보지 않는다. 마음씨 곱고 부지런한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말한 장두석은 “그러나 당분간은 사랑보다 일에만 집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2집 활동이 끝나는 대로 명상 음반을 내고, 내년에는 자신이 만들었던 개그 코너의 배경음악들을 모아 2.5집도 발표할 계획이라고. 그러나 “개그맨으로 활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장두석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무대에 올라 남을 웃기기보다 남을 웃기기 위해 밤새도록 고민하는 후배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경험해봐서 아는데, 개그맨에게 아이디어를 짜내는 일은 정말 고통스럽거든요. 저는 개그에도 저작권이 반드시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그런 문제를 고민해보고 싶어요.”
15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그의 행보가 자못 기대된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