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수산(60)의 작업실은 경기도 양평군 남한강가에 있다. 서울 집을 떠나 그곳에 머물기 시작한 지 벌써 6년째. 함께 살던 아들은 지난해 입대하고, 딸은 올 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아내와 단둘이 단출한 살림을 꾸리고 있다 한다.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기 맑은 곳에 사는 것이 부럽다고 하자 그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사람 만나기가 힘들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사람 많은 서울을 피해 먼 곳으로 떠나놓고, 그곳에서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한수산. 그를 보며 “생각해보면, 모든 떠남의 길 위에서 만난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챙겨온 것도 사람들이었다”는 그의 산문집 ‘사람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한수산은 만남과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시절 이과생이던 그가 오늘날 작가가 돼 있는 것, 그리고 군사정권 시절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삶을 포기할 만큼 고통받던 고비를 넘어 다시 살게 된 것은 모두 인생길에서 만난 인연 덕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끌어준 박목월·황순원 선생님”
“제가 처음으로 글을 써본 건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봄날이었어요. 그때 전 신문반서 특별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신문반장을 맡고 있던 선배가 오더니 저더러 다음 날 학교 대표로 도내 백일장 시 부문에 나가라는 거예요. 원래 자기가 대표인데 대입 모의고사가 있어 못 가게 됐다고요. 출석으로 인정해주고 점심도 공짜로 준다기에 두말없이 좋다고 했죠. 그때까지 단 한 편도 시를 써본 적이 없었지만 말예요. 백일장에 나가서도 시 ‘같은’ 것을 써놓고는 점심만 맛있게 먹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 대회에서 제가 고등부 장원을 한 겁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문학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평범한 농사꾼으로 사는 게 꿈이던 그는 64년 고등학교 졸업 뒤 강원도 깊은 산골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아버지, 형에 형수까지 교사던 집안 분위기에 밀려 이듬해 춘천교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교사가 제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은 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대학에 가자마자 바로 학교 신문반에 들어갔죠. 그런데 그곳에서 또 소중한 인연을 만났어요. 학교 신문반 지도교수로 계시던 박동규 선생님이요.”
이후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박동규씨는 박목월 시인의 맏아들. 한수산은 신문 편집과 인쇄를 위해 한 달에 2박3일씩 서울 출장을 가야 했는데, 그때마다 박 교수의 집에 초대받아 자연스레 박 시인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어린 시절 대시인을 만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죠. 그분은 아들의 제자들에게 참 다정하셨어요. 제게 ‘문학을 하겠다고 꼭 서울로 올라오려 하지 마라’고 하시고, ‘동규 선생에게 문학 이론서를 한 15권쯤 소개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공부해라’고도 해주셨는데, 그 조언이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어요.”
그러나 끝내 교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1년 반 만에 학교를 떠났고 몇 년간 방황한 끝에 69년 뒤늦게 경희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국문과 교수로 있던 소설가 황순원 선생을 만났다. 황 선생은 한수산을 작가의 길로 이끌어준 은사다.
“3학년 2학기를 맞은 71년 가을, 서울 시내 주요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어요. 그날 전 제가 속해있던 학생서클에서 학생들에게 배포할 지하 유인물 내용을 검토하느라 친구 하숙집에 틀어박혀 있었죠. 유인물에 어떤 내용을 실을까 한창 논의하고 있는데 후배가 달려오더라고요. ‘오늘 시위에서 서클 후배 몇 명이 잡혀갔고, 학교에 군대가 진입했다’고 하더군요.”
다음 날 학교에 가보니 교문에는 모래부대를 쌓아올린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기관단총을 겨눈 무장군인들이 일체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대운동장에는 군대가 설치한 막사가 즐비했다.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어요. 깊은 고민 끝에 저는 그때까지 제가 갖고 있던 사회적 관심이나 정치 이념과 이별하고, 창조적 작업에 몰두하겠다고 결심했죠. 도시락과 빈 공책 한 권, 한 움큼의 연필을 들고 학교로 갔습니다. 박목월 시인처럼, 저도 노트에 연필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담 사이 개구멍을 통해 학교로 들어간 뒤 인문대 강의실 창문을 타넘었습니다.”
허가받은 극소수의 사람만 출입할 수 있던 당시의 학교 안은 귀가 멍할 정도의 고요,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조용한 강의실에서 연필을 깎은 뒤 ‘소설’이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한 줄을 썼다 지우고, 몇 줄을 썼다 종이를 찢어내는 일이 되풀이됐다. 매일 저녁 학교를 빠져나왔다가 다음 날이면 또다시 개구멍을 통해 담을 넘는 나날이 이어졌다고.
“일주일쯤 지나니 글 한 편이 써지더군요. 다음 글을 쓰는 데는 닷새, 또 다음 글을 쓰는 데는 사흘이 걸렸죠. 그렇게 다섯 편의 글을 쓰고 나니 다시 학교 문이 열리고 강의가 시작됐어요.”
한수산은 그때부터 매주 화요일 습작 소설을 들고 황순원 선생의 연구실을 찾았다고 한다. 사당동 자택으로 찾아간 날도 많았다. 지난주에 낸 작품을 돌려받으며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작품을 놓고 오는 방식이었다.
“한번은 ‘이렇게 좋은 글을 정말 내가 썼단 말인가’ 하고 기고만장해하며 글을 드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음에 찾아 뵈었더니 ‘이런 거 쓰려면 소주나 한 병 먹고 말아’ 하시더군요. 어쩔 줄 몰라 연구실 바닥만 내려다보며 앉아 있는데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밖으로 나와 문을 등지고 섰을 때의 암담함과 절망감이 얼마나 컸는지, 만약 그때 제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안으로 달려들어가 선생님을 찔러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얼마 뒤, 그는 황순원 선생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소설을 다시 읽어보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자신도 모르는 새 치졸하게 번안한 작품이었던 것. 황순원 선생은 이렇게 긴 말 없이도 한수산에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주곤 했다. 한번은 그가 연애에 대해 묘사한 소설을 읽고는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너 연애 잘 못하지? 내 그럴 줄 알았다. 연애를 잘 못하니까 이런 소설을 쓰는 거야”라고 ‘칭찬’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 도제식 교육을 통해 한수산은 비로소 소설 쓰기에 대해 익힐 수 있었다.
“황순원 선생님은 제자들이 습작 원고를 가져가면 붉은 볼펜으로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고쳐주는 걸로 유명하셨어요. 그런데 저한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죠. 나중에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전하면 ‘너한텐 그런 말씀도 해주시냐’고 할 정도로요.”
그는 그해 연말까지 16편의 단편소설을 쓴 뒤, 신문사 네 곳의 신춘문예에 투고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 작품이 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당시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황순원 선생이었다고.
“신춘문예에 소설을 낸 뒤에도 왠지 당선은 어려울 것 같아 또 소설을 써서 선생님 댁에 찾아갔어요. 선생님은 제게 아무 말씀 안 해주셨지만, 이상하게 대문 앞까지 배웅을 나와 주시더라고요. 돌아가는 제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저 놈 내가 뽑아준 것도 모르고 또 소설을 가지고 왔네’ 하셨을지도 모르죠.(웃음)”
한수산은 이후 73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해빙기의 아침’이 당선되고, 77년엔 ‘부초’로 제 1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는 등 작품성과 대중성 면에서 모두 인정받으며 순탄한 작가의 길을 걷는 듯했다. 하지만 81년 5월, 한 일간지에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를 연재하다 터진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한동안 문학을 떠나게 된다.
후에 밝혀진 이 사건의 진상은 보안사 관계자가 한수산의 소설을 읽다가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걸 언제나 황금빛 훈장처럼 닦으며 사는 수위는 키가 크고 건장했다. 그는 지금도 그 수위 복장에 대해서 남모를 긍지를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는 부분과 “그는 자신의 그 꼴 같지 않게 교통순경의 제복을 닮은 수위 제복을 여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여튼 세상에 남자 놈 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라는 부분을 ‘고위층을 비난했다’며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당시 전 제주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서울로 압송돼 공항에서부터 눈이 가려진 채 어디론가 실려 갔어요. 그리곤 세 명의 사내들에게 질질 끌려 캄캄한 지하실에 들어갔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몰랐습니다. 나를 향해서만 빛나고 있는 백열등 아래서 알몸으로 벗겨진 채,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때릴 수도 있구나 하는 경악을 느끼며 기절을 했습니다. 내 몸을 내 몸처럼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이었어요. 그리고 이어지던 물고문, 전기고문…. 2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럽고 비열한 고문이 며칠 동안 이어졌죠.”
필화사건으로 끔찍한 고문 겪었지만, 박용주 선생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
이 사건으로 3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도회적인 욕망을 그려나가던 소설 ‘욕망의 거리’는 졸지에 ‘반체제 작품’이 됐고, 한수산은 “사람이라는 동물을 보는 것조차 몸 떨리게 두려웠을 만큼” 끔찍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육체의 고통뿐이었다면 이겨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하면서 전 사람에 대한 믿음,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다 잃었어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해 여름 그는 아침이면 바닷가에 나가 텐트를 치고는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와 술 마시고 잠 들고, 잠이 깨면 다시 물에 들어갔다 나와 술 마시고 잠 들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모래를 움켜쥔 채 울고 뒹굴다 밤이 되면 텐트를 걷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아무것도 치유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갔어요.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오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문득 잠이 깨 거실로 나가 잿빛 한라산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음악이 듣고 싶은 거예요. 무심히 모차르트의 LP판을 걸었더니,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 1악장이 나오더군요. 그것을 들으며 아침이 올 때까지 한참을 울었어요. 그리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저 자신에게 물었죠. 다시 글을 쓸 수 있겠느냐고. 그러자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가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더군요. ‘아직 이 땅에 네가 살아가며 사랑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요.”
경희대 재학 시절 은사였던 박용주 선생의 따뜻한 격려도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해줬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각별히 한수산을 아끼던 박 선생은 필화사건으로 인한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81년 겨울 그가 찾아갔을 때, 당시 세상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필화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눈으로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 ‘미국 서부에 가서 몇 달 헤매고 오면 어떻겠니? 거대한 자연 앞에 서서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그날 선생님과 헤어지고 택시를 잡아타는데, 쫓아오셔서 택시비를 차 안으로 던져 넣어주셨어요. 저는 그때 이른바 인기 작가였어요. 돈도 잘 벌었고요. 그런데 마치 형편 안 좋은 딸내미가 친정 다녀갈 때 하듯, 그렇게 택시비를 던져 주시고는 오래도록 서서 제 뒷모습만 바라보셨죠. 나중에 선생님이 안 보이게 되자 택시 기사가 어떤 사이냐고 묻더군요. 대학 때 선생님이라고 했더니, 요즘도 그런 선생님이 있냐고 하데요.”
그는 그때 또 한 번 생각했다고 한다. 마치 박 선생님이 내게 그렇듯,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인연이 언제까지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믿음이 한수산을 일으켰고,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박 선생에게 고마움을 다 갚지 못했다. 한수산의 상처가 미처 치유되기 전, 박 선생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전 이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에게 고문을 가했던 보안사의 사령관이 훗날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더군요. 그가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었죠. 88년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 하는 상태였지만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죠. 그런데 박 선생님께서는 제가 일본에 있는 동안 돌아가셨어요. 병석에서 제가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더군요. 임종도 지키지 못한 제자지만, 제 마음속엔 아직도 그분의 사랑과 배려가 소중히 남아 있어요.”
한수산은 지난 97년 세종대 국문과 교수가 됐다. 많은 스승의 가르침 덕에 지금 자리에 섰다고 믿는 그가 이젠 스승이 된 것이다.
“제자를 대할 때면 늘 제 마음속 선생님들을 떠올립니다. 저도 그들에게, 선생님들이 제게 그러셨듯, 아름다운 인연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힘겨운 시간을 이겨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넉넉한 웃음을 보이는 한수산의 남은 바람이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