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언제부터 트랜스젠더가 됐냐”는 질문이 가장 싫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남자의 몸에 여자의 영혼을 갖고 세상에 왔을 뿐인 그에게 사람들은 ‘언제, 왜, 남자에서 여자로 뒤바뀌어졌는지’를 자꾸 물었다. “멀쩡하게 남자로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제 여자가 돼봐야겠다고 나설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있다면 미친 사람이지.”
김비씨(36)는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묻는 질문 앞에 곤혹스러워하는 트랜스젠더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작가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는 ‘여자’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머리, 옅은 화장을 한 ‘평범한’ 여자였다.
98년 국내 최초 동성애 월간지 ‘버디’에 단편소설 ‘그의 나이 예순넷’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데뷔한 김비씨는 2001년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 이야기’라는 자서전과 첫 장편소설 ‘개년이’를 썼고 올해 단편 모음집 ‘나나누나나’를 펴냈다. 그리고 최근에는 성전환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씨름선수가 된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천사장사 마돈나’에서 시나리오 자문을 맡았다.
“처음에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하지만 감독인 이해영·이해준씨가 좋은 시나리오를 쓰는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나서 시나리오를 받아봤지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시나리오였어요.”
흔히 영화 속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는 과장되거나 희화화된 경우가 많은데 ‘천사장사 마돈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주인공 ‘동구’를 그려낸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고.
“동구는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인위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아이로 나옵니다. 지나치게 여자인 척하거나 예뻐지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씩씩함을 보여주죠.”
‘천사장사 마돈나’는 진심이 담긴 시선으로 “우리에게 바짝 다가와 위로해주는 영화”라고 그는 말했다.
‘위로’는 그가 언제나 절실히 목말라했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던 손길이기도 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트랜스젠더로 살기란 “힘들고 지치고 어렵고 무거운 것”이었지만 세상은 위로하고 이해해주는 데 야박했고 비난하고 빈정거리는 데는 후했다.
“성정체성 부정하고 남자로 위장하고 살 때는 숨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죠”
사춘기 시절 그는 ‘계집아이 같은 남자아이’라며 늘 놀림을 받았다. 짓궂은 아이들은 그에게 고추가 달려 있는지 보겠다고 화장실까지 쫓아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 아이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 이해가 가요. 어딘가 다르니까 신기하고 건드려보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섭섭해요. 물론 고마운 분들도 있었지만….”
군사교육인 교련과목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와 같은 존재를 ‘있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 ‘너를 남자로 만들겠다’며 나서는 선생들 때문에 그는 “많이 맞고 많이 구르며” 학교를 다녔다.
안 맞고 안 구르고 놀림당하지 않으려고 그도 부단히 노력했다. 대학 다닐 때까지 철저히 자신을 ‘남자로 위장’하고 살았다. 남자의 말투와 행동거지, 걸음걸이를 열심히 연습했다고.
“대학 때 저를 알던 사람이 지금 저를 보면 정말 놀랄 겁니다. 24시간 자신이 아닌 남으로 살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시죠? 숨 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성정체성의 혼란 하나만도 감당하기 버거운 짐이었는데 순탄치 못했던 가정사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6·25전쟁 때 한쪽 손을 잃고 가슴에는 대검에 찔린 자국이 남아있는 아버지는 자주 발작을 일으켰다. 남편의 상습적인 폭력을 이겨내지 못한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가장 절실하게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 오히려 모든 것이 저를 벼랑으로 밀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라는 심정으로 버텨온 세월이었다. 정말 죽어보려고도 했다.
“얼어 죽는 게 가장 고통 없는 죽음이라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한겨울에 옷 다 벗고 산 속에 들어가 누웠는데 아침에 눈이 떠지는 거예요. 황당하고 허무했습니다.”
김비씨가 시나리오 자문을 맡은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주인공 동구는 여자가 되고 싶어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어느 날, 이제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한계에 이르자 이태원에 있는 한 유명 트랜스젠더 클럽에 찾아갔다.
“한낮이었어요. 클럽 문 앞에 가서 우두커니 서있는데 안에서 화투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목소리는 남자인데 말투는 여자인 그런 말소리 말이에요.”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다고 해서 술이나 따르고 살아야 하는가 싶었다. 병원을 찾기로 했다.
염색체와 호르몬 검사를 해보니 여성호르몬이 훨씬 더 많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과를 듣고 기뻐하는 그에게 의사는 호르몬 이상만으로는 수술이나 치료를 해줄 수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지금까지 남자로 잘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보통 남자로 살아보라는 거예요.”
그는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제발 도와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그에게 의사는 “여자 옷 입고 화장하고 오면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고.
“너무나 기가 막히고 원망스러웠죠. 나라는 인간을 결정짓는 것이 그까짓 화장과 옷이란 말인가 하고요.”
병원 로비에 나와 앉아 한참을 울었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약국에서 여성호르몬제를 사다 직접 엉덩이에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97년 즈음, 자신의 홈피(www.kimbee.net)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원서를 번역해 올려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언론들도 게이와 트랜스젠더를 혼동해 부르는 등 정보와 지식이 부족해 “우리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알리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한 방송국 PD가 그의 홈피를 보고 찾아와 성전환 수술장면을 공개하는 다큐 프로그램에 출연할 것을 제안했다.
“저는 그렇게 수술을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어요. 여자 옷에 집착하는 편도 아니었고요. 당시는 혼자 호르몬 치료를 하면서 남자로도 보이고 여자로도 보이는 그런 상태로 살고 있었는데 어쨌든 억지로 남자 흉내내던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래도 비싼 수술비를 대준다고 해서 출연을 결심했다. 성기성형 수술(성전환 수술)만 1천5백만원~1천7백만원에 가슴, 얼굴까지 하면 3천만 원 정도 들었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었지만 세상에 ‘우리들 이야기’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수술 장면이 TV에 나가자 그의 홈피에는 바로 1천 개의 글이 올라왔다. 대부분이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격려의 글이었다. 딱 두 개, 비아냥거리는 글이 올랐는데 다른 사람들이 앞장서서 반박하는 댓글을 붙였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 세상에는 진심이 통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됐다.
“열 사람이 잔인하다 해도 한 사람의 따뜻함을 바라보며 살 거예요”
TV 출연으로 ‘유명인사’가 되고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들을 발표하면서 그에게는 어느새 소수자 인권활동가라는 타이틀이 붙게 됐다.
“전혀 아닙니다. 저는 누군가를 대표하고 이끌 만한 그릇이 못 돼요. 그저 저 혼자 몸 건사하느라 발버둥치며 사는 것뿐이죠. 이런 식으로 얼굴을 내미는 건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에게 너무 편협하고 가혹한 편견이 계속 복제되고 굳어지는 걸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현재 그는 낮에는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밤에는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책을 쓰고 잡지에 인터뷰를 하며 얼굴이 알려지면 사는 게 많이 불편해지지만 소수자 인권을 위해 총대 메고 일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이만큼이라도 안 할 수 없다고 했다.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손가락질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볼 수만은 없기에 그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그의 소원은 혹시라도 책이 잘 팔리면 그 돈으로 어머니가 재혼해 사는 제주도에 내려가는 것이다. 거기서 “엄마 손잡고 여기저기 구경 다니며 사진 찍고 싶다”고 소박한 바람을 내비쳤다.
혹시 그에게 사랑한 사람은 없었는지 물었다. 그는 지금껏 사랑한 경험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답했다. 지금의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현재 모습을 사랑하는 것일 뿐,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게 아닐 것이라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종종 너무도 잔인하다”는 말을 한 번 더했다. 그러면서도 “열 사람이 잔인하다 해도 한 사람의 따뜻함을 바라보고 살면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에게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거라고, ‘당신 같은 사람’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작고 낮은 목소리로 전해지는 온정과 연민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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