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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긍정의 힘

염색할 수 없는 여자

2006. 10. 18

이왕 벌어진 것,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선 빨리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긍정의 열차’에 올라타자~.

몇년 전 머리를 염색하려고 미장원에 갔다. 스팀타월을 씌운 지 5분쯤 지났을까, 머리가 가렵고 열이 솟구쳐 미칠 것 같았다. 미용사가 즉시 찬물로 헹궈줬으나 그날 이후 난 염색할 수 없는 체질이 되고 말았다. 어지간한 알레르기는 일어나지 않는, 피부에 자신 있던 나였는데 나에게 형벌(?)이 가해진 것이다.
그 후 두피에 전혀 해가 없는 염색제를 찾아다녔다. 자연 염색, 천연 염색, 인도에서 직수입한, 그야말로 바로 식물을 찧어서 가루로 만들었다는 식물 염색제까지 구해서 다 써보았지만 내 두피는 염색제만 들이대면 바로 알아차리곤 부글부글하다가 진물을 내며 나를 슬프게 했다. 그때부터 내 눈에 가장 부러운 사람은, 두피 걱정 안 하고 염색하는 사람들이었다. 염색하고 스팀타월 두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잡지책을 보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아, 저 여자는 참 행복하겠다’ 싶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여주인공이 감탄한 것처럼 머리 염색 빛깔들은 왜 그렇게 낭만적이고 멋져 보이는지. 블루 루인, 레드 메닉스, 옐로 피버 등 염색 빛깔 이름은 왜 그렇게 멋지고 부러운지.
몇 달간 자제하다 일본으로 특집 방송 하러 가기 전 날, 오랜만에 하니 괜찮겠지, 하고 염색을 살살 했는데, 역시나 또 그 증세가 나타나 도쿄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얀 베갯잇에 진물이 묻어 있는 것을 보면서 아침 거울 보는 기분은, 우울하고 참담했다. 귀국해서는 몇 달간 피부과에 다니며 계속 치료받고 약을 먹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염포족(염색을 포기한 족속)이 됐다. 최선의 방법은 까만 머리를 여고생 때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것처럼 찰랑거리고 윤기나게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새치가 하나둘 생기면서 까만 머리에 유독 하얀 새치가 대비돼 보였다. 내 귀 옆에 새치 여러 개가 있는 것을 발견한 아들이 소리쳤다.
“엄마, 흰머리 많아요. 빨리 염색하세요. ”
“창현아, 하얀 머리가 많아지는 거, 이거, 엄마가 나이 든다는 얘긴데, 나이 든다는 것은, 퇴보가 아니라, 발전이야. 엄마 머리에 새치가 생기는 것도, 세월이 흐르면서 얻는 ‘발전’이라고 생각해. ”

처음 아들이 새치를 문제 삼는 순간, 몇 초 동안은 이제 나도 늙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덜커덕 겁이 나고 ‘센티’해졌다. 아, 이제 나도 젊음의 대열에서 이탈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우울한 감상이 순간 일었다. 그러나 새치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세월이 갈수록 나이 들어가는 게 정상이고, 세월이 가는데도 거꾸로 오히려 더 젊어지고 어려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퇴보요, 비정상이 아니겠는가. 나이듦, 영어로 ‘에이징(aging)이라고 하던데 ‘에이, 징’한 것이 세월이라면 그 징한 것을 장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 몫이 아닐까. 그렇다면 흰 머리로 변해가는 것, 그것은 화려한 발전이요,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새치가 많지는 않지만, 곧 많아지면,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할 것이다. 이름 하여 새치머리 가꾸기. 염색 대신 보랏빛 헤어 매니큐어를 하는 것이다. 보라색은 하얀 색과 잘 어울리므로 그 옆에 새치가 새로 자라 나와도 조화를 이룰 것이다. 새치를 즐겁게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점점 머리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왕 벌어진 것,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빨리 포기하고 나만의 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 그러고 보니 내 두피가 요즘은 깨끗해진 것 같다. 아마 내가 속상함보다는 이왕이면 행복해지는 ‘긍정의 열차’에 올라탔기 때문일까.
그날 새치에 대해서 쓴 시의 앞부분이다.

까만 숲 속에 하얀 길이 하나 생겼다.
가비 빛나는 속살같이 하얗게 빛나는 미로 하나.
까만 숲 속에 생긴 후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그 하얀 미로가 옆길에 나고 겹쳐지더니
지루한 숲 속이 아름다운 무늬로 변했다.
글쓴이 송정연씨는...
염색할 수 없는 여자
성신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방송작가. 10년째 SBS ‘이숙영의 파워FM’ 작가로 일하고 있다. 청소년 소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창의력 연습서 ‘두뇌폭풍 만들기’ 등을 펴냈다. 인생 좌우명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 “과거를 묻지 마세요” “첫 번째 단추 잘못 끼웠다면 풀어서 다시 채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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