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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꿈은 이루어진다

피아니스트 이수미 감동사연

독일 유명 피아노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한~

기획·김명희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홍중식 기자

2006. 09. 21

지난해 독일연방 청소년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신예 피아니스트 이수미씨가 KBS 교향악단과의 협연을 위해 지난 7월 잠시 귀국했다. 지난 4월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가난한 집안 환경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단돈 38만원을 들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사연이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그를 만났다.

피아니스트 이수미 감동사연

1등이라는 결과보다 1등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가치 있을 때가 있다. 지난해 5월 독일연방 청소년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이수미씨(20)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 세 살 때 38만원과 추천서 한 장을 들고 무작정 독일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피아노도 없이, 노점상을 하는 부모가 매달 보내주는 60만원과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공부해 결국 꿈을 이뤘다. 지난해 피아니스트에게는 최고의 등용문인 독일연방 청소년음악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것. 심사위원 만장일치는 42년 대회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그런 그의 이야기는 지난 4월 MBC 다큐 프로그램 ‘가족애(愛)발견’을 통해 소개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얼마 전에는 ‘피아노로 세상을 울려라’라는 다큐 동화책으로 출간됐다.
그가 지난 7월 중순 KBS 교향악단과의 협연을 위해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소나기가 시원스럽게 쏟아지던 8월 중순, 경북 경산에서 부모와 함께 상경한 그를 만났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살이 너무 쪄서 걱정이에요. 많이 먹지 않는데도 몸이 불어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위가 다 찢어질 뻔했대요. 위가 안 좋아서 몸이 자꾸 붓고 그게 그대로 살이 된 거죠(웃음).”
심각한 이야기를 아이처럼 천진하게 하는 그에게 “열세 살에 단돈 38만원 들고 무작정 독일로 갈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자 그는 수줍게 웃으며 “그냥 피아노만 치고 싶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네 살 때였다고 한다. 피아노를 접하게 된 이야기를 그의 아버지 이연식씨(48)가 들려주었다.
“당시 저희 부부는 건축자재상을 하고 있던 터라 할머니가 수미를 봐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수미가 피아노학원 앞을 지나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는 흠뻑 빠져들었나봐요. 피아노를 쳐볼 때까지는 꿈쩍도 하지 않겠다고 떼를 써서 할머니가 할 수 없이 학원으로 데리고 들어갔대요.”
그날 학원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건반을 두드려본 이씨는 이후 피아노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학원 선생님조차 그가 피아노를 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말렸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부모도 어린 딸의 고집에 손을 들었다고.
“수미는 피아노가 없어 종이 건반으로 연습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아이가 다섯 살 때 외할머니가 곗돈을 타서 피아노를 사줬죠. 사실, 우리 부부가 사주기로 약속했는데, 수금이 안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는 처음으로 지역 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했고, 그 뒤로 지역 및 전국 단위 피아노 대회에 나가 우승을 휩쓸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영남대 장신옥 교수는 자청해서 2년 동안 무료 레슨을 해주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이수미 감동사연

평범하게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우던 이수미씨에게 위기가 닥친 건 98년. IMF 외환위기 여파로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난 것. 어머니 하영숙씨(46)는 “살던 집을 내주고 친정어머니와 남동생 가족이 살고 있는 15평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도 수미의 피아노만은 팔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노점상 등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딸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이씨 부부는 우연히 독일이 학비가 싸다는 사실을 알게 돼 딸을 유학 보내기로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사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 형편에 딸을 유학 보낸다고 하니 주변에서 말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씨 부부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고.
“수미를 유학 보낸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다들 ‘미쳤느냐’, ‘말도 안 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장 생계가 막막하더라도 수미의 꿈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아이가 중학교에 가면서 학과 공부 때문에 점점 피아노를 치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피아노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집사람이 알아보니까 매달 60만~70만원 정도 보내주면 어렵지만 그런대로 된다고 했어요. 그 정도라면 어떻게 해서든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 큰맘먹고 일을 저질렀죠.”

돈이 없어 하루 종일 굶기도 하고,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쓰기도 해
99년 여름,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친 그는 부모에게 “꼭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돼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어린 소녀에게 독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독일로 가서 처음에 머물렀던 한국인 하숙집에서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어요. 주인 아줌마 보석반지가 없어졌는데 제가 훔쳤다는 거예요. 한국 집으로까지 전화를 해서 막 뭐라고 하시는데, 어린 저로서는 너무 무섭고 견디기 힘들었죠. 그래서 그 무렵 원형탈모증이 심하게 생겼어요.”
참다못한 그는 그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리고 바흐 김나지움(중고교 과정의 베를린 음악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때까지 한 달 동안 한인 성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처음 독일에 도착했을 때 통역을 도와주던 유학생 언니의 소개로 베를린 음대의 밍 교수님을 알게 되었죠. 저의 재능을 인정해준 밍 교수님의 주선으로 시험을 보고 그해 베를린 음대 예비대학생이 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베를린 음대 예비대학생 자격으로 바흐 김나지움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게 돼 잠자리는 해결됐죠. 다음 해엔 정식으로 바흐 김나지움에 입학했어요.”
그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아무리 악물어도 가난한 노점상의 딸로 유학생활을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그의 부모는 아침 7시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꽃이며, 양말, 셔츠, 커피 등을 파는 노점상을 하면서 매달 돈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사가 안될 때는 돈을 한 번에 부쳐주지 못하고 10만원, 20만원, 30만원씩 나눠서 보내주기도 했다고. 그 돈으로는 기숙사비와 보험비 등을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그래서 그는 피아노 레슨을 하거나 연주가 필요한 곳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돈을 벌어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보통 하루에 한 끼 먹고 버티고, 어떨 때는 돈이 없어 하루 종일 굶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독일에 가서 처음 2년 동안 19kg이나 빠졌어요. 영양 결핍으로 연습을 하다 쓰러진 적도 있죠.”
그는 “부모님한테 풍족하게 돈을 받고 매일 밖에서 밥을 사먹는 유학생들이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 고프고 힘들 땐 부모에게 전화해 “엄마, 아빠 돈을 안 보내면 나 굶어 죽으라는 거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타국에서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운 어머니는 수화기에 대고 “그냥 돌아오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지만 그는 “죽어도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피아노를 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이수미 감동사연

98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지만 이수미씨의 부모는 딸을 위해 피아노만은 팔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과 다함께 한집에서 살고 싶어요”
그가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피아노를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곁에서 그를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다. 밍 교수는 무료 레슨을 해주었고 감기에 걸려 찾아간 병원에서 만난 60대 의사 노부부는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또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 뒤에 그의 사연을 전해들은 폴란드 출신의 한 인사는 “어떻게 피아노도 없는 피아니스트가 있느냐”면서 피아노를 보내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수미씨는 18세 이상은 기숙사에서 거주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2004년 기숙사를 나와 방을 하나 구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드럼을 공부하기 위해 올 초 독일로 건너온 남동생 제명군(17)과 함께 살고 있다. 지난해 제명군은 부모에게 ‘폭탄 선언’을 했다고 한다. “누나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지금부터는 나에게 투자해달라”고 했다는 것.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 이씨는 눈앞이 캄캄했다고 털어놓았다.
“집사람과 저는 무척 당황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제명이가 누나 때문에 그동안 티도 못 내고 참아왔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웠죠. 그 이야기를 듣더니 수미가 일단 독일로 보내라고 하더군요. 자기도 해냈으니까, 동생도 그럴 수 있을 거라고요.”
동생에게 “너도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긴 했지만 이수미씨는 “욕심 많은 나와 동생 때문에 부모님이 허리 펼 날이 없다”며 부모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특히 최근에는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라고.
“고생하시는 부모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파요. 나중에 커서 능력이 생기면 가장 먼저 집을 한 채 사서 부모님 모시고 남동생과 함께 다같이 살고 싶어요.”
가족의 사랑과 많은 이들의 도움, 피아노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지난 4월 독일 데트몰트 국립음대 피아노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며 “앞으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피아노에 담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이수미씨. 그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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