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8일 서울 대학로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열렸다. 지난 3월 사망한 개그맨 김형곤의 이름을 딴 코미디 전용 소극장 ‘르메이에르 김형곤 홀’(이하 김형곤홀)이 개관한 것이다. 이날은 김형곤이 세상을 떠난 지 1백일째 되는 날. 극장 개관 행사장에서는 유족들과 후배 개그맨 문영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추모식도 열렸다.
‘숨이 붙어있는 한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김형곤을 기리며 이 극장의 대표를 맡은 이는 그의 전 부인 정유진씨(45).
벌써 4개월이 지났지만 정씨와 도헌군(12)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엔돌핀코드’ ‘병사와 수녀’ 등 김형곤이 생전에 출연했던 작품 사진들이 전시돼 있는 극장 안에서 도헌군과 어머니 정씨를 만났다.
지난 6월 ‘김형곤 홀’ 개관식에 참석한 정유진씨 (왼쪽에서 두번째).
김형곤 사망 당시 영국에서 유학하다 일시 귀국했던 도헌군은 아버지의 장례식과 삼오제를 마친 뒤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다, 지난 7월 초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했다. 아버지를 닮아 다소 통통한 체격이던 도헌군은 그새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이번에 귀국할 때 도헌이 할머니와 같이 공항에 마중 나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졌더라고요. 엄마 마음 아플까봐 그랬는지 전화통화를 할 때는 살빠졌다는 얘기를 전혀 안 했거든요. 한 5~6kg은 빠진 것 같아요. 도헌이가 받은 충격과 상처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정씨는 “서울에 도착한 후에도 아들 얼굴에서 웃음을 찾기 힘들다”며 안타까워했다.
고 김형곤의 생전 공연 모습들이 걸려있는 ‘김형곤 홀’에서 아버지의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도헌군과 개관기념 공연작 ‘투엘브’ 연습장에 자리를 함께한 모자.(왼쪽부터)
“도헌이가 한국에 올 때마다 사용하는 휴대전화가 있는데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걸 손에 쥐어줬더니 ‘엄마, 필요 없어. 이제 아빠한테 전화도 안 올 텐데’ 하고 말하더라고요. 도헌이가 귀국하면 도헌 아빠는 일하는 도중에라도 짬을 내 수시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곤 했거든요.”
엄마가 걱정할까봐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도헌군은 귀국 직후 엄마와 함께 치과에 가다 남몰래 눈물 흘렸던 일을 털어놓았다.
“엄마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잠시 후 일곱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아빠와 함께 타더라고요. 그러더니 ‘아빠, 아빠’ 하면서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저도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그보다 더 다정하게 아빠를 불렀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도헌군은 이제 다시는 아빠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다시 한번 실감했다고 한다. 정씨는 “아들이 우울해하지 않도록 갖은 애를 쓰고 있지만 텅 빈 아빠의 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워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그런 도헌군에게 아버지를 영원히 기릴 수 있는 극장이 생긴 것은 큰 선물인 듯했다. 생전에 김형곤은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설 기회가 줄어들자 코미디만을 올릴 수 있는 소극장을 만들어 ‘평생’ 웃음을 선사하고 싶다는 뜻을 자주 밝혔다고. 김형곤홀은 2백 석 규모의 소극장이지만, 코미디 전용극장으로 지어져 김형곤의 뜻을 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하고 싶어하던 아빠의 꿈, 아들인 제가 꼭 이뤄드리고 싶어요”
“아빠는 늘 웃음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어요. 살아계실 때 개관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빠의 꿈이 돌아가신 뒤에나마 이뤄져서 기뻐요. 하늘에 계신 아빠도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김형곤홀은 정씨를 비롯한 고인의 친구들과 르메이에르 건설 정경태 회장이 함께 만든 작품. 평소 연극에 관심이 많던 정 회장은 생전의 김형곤에게 코미디 전용 소극장 건립 지원을 약속했다고 한다.
“정 회장이 도헌 아빠와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발 벗고 나서서 큰 도움을 줬어요. 두 사람 사이에 말로 한 약속이니 지키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을 텐데, 도헌 아빠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줬죠. 극장 운영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고요. 그 사람 친구들도 ‘김형곤이라는 이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자’며 ‘죽은 친구’의 꿈을 위해 기금을 마련해줬어요.”
정유진씨가 김형곤홀의 대표를 맡은 건 극장 건립을 도운 정 회장과 다른 친구들의 부탁 때문이다.
“도헌이가 좀 더 컸더라면 도헌이에게 맡겼겠죠. 아직은 어리니까 제가 잠시 맡고 있다가 때가 되면 물려주려고요. 며칠 전에는 도헌이가 ‘생전에 소아암 백혈병 환자들에게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던 아빠의 뜻에 따라 나도 번 돈의 10%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하더라고요. 이곳 공연장 수익금 중 일부도 그 사람이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백혈병 환자들의 수술비 지원에 쓸 예정이에요.”
도헌군은 김형곤홀 개관기념 작품으로 오는 9월5일부터 10일까지 공연되는 코믹 오페라 ‘투엘브(twelve)’(연출 나진환)의 연습장면을 지켜보면서 “이 자리에 아빠가 함께 계셨더라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며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 더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뜻이 김형곤홀을 통해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도헌군도 다시 웃음을 되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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