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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희망 메시지

삶의 감동 전한 세계적인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

“장애는 마음속에 있는 것, 마음의 장애를 이겨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어요”

기획·이남희 기자 / 글·서윤재‘자유기고가’ / 사진ㆍ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6. 06. 16

‘살아있는 비너스’라 불리는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가 여섯 살배기 아들과 함께 방한, 8박9일간 머물렀다.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없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는 그가 들려준 감동적인 삶의 메시지 & 예술세계.

삶의 감동 전한 세계적인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

양팔이 없고 다리가 기형적으로 짧은 선천적 장애를 딛고, 세계적인 구족화가 겸 사진작가가 된 영국 출신 예술가 앨리슨 래퍼(41)가 지난 4월23일, 8박9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경기도 영어마을 파주캠프에서 열린 ‘제1회 영 챌린저 포럼’에서 자신의 인생을 주제로 강연한 것을 비롯,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한국 구족화가협회 회원들과 만남을 가졌다. 또한 장애아 보호시설 및 국회, 국가인권위원회를 방문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래퍼는 ‘인간승리’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악조건 속에서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 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우뚝 섰다.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없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며 말문을 연 그는 “장애는 마음속에 있는 것일 뿐 마음의 장애를 이겨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목숨을 건 출산은 편견에 맞선 또 하나의 도전
앨리슨 래퍼를 보고 우리가 놀라는 점은 비단 그가 일궈낸 사회적인 성과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그토록 심한 장애와 주위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고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 ‘어머니’라는 점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래퍼가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경쾌한 청재킷 차림으로 전동 휠체어를 탄 그의 옆에는 여섯 살배기 아들 패리스가 엄마의 옷깃을 꼭 잡은 채 그림자처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불편한 몸임에도 밝고 당당한 래퍼와 천진난만한 패리스 모자의 다정한 모습은 취재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이었던 래퍼는 비장애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 22세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결국 2년 만에 이혼을 선택했다. 그 후 몇 번의 연애와 유산을 경험하고, 34세에 다시 아이를 갖게 된 래퍼. 그에게 있어 임신과 출산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아이가 점점 커지면서 척추와 다른 신체기관에 무리가 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변의 많은 이들이 ‘아이가 어머니와 같은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출산을 극구 만류했다.
“사람들은 장애인은 아이를 출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직접 찾아와 나같은 사람이 아이를 낳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충고해주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죠.”
사람들의 싸늘한 편견만으로도 버거웠던 당시 설상가상으로 아이의 아버지마저 등을 돌리고 떠났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주저 없이 엄마의 길을 선택,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비록 두 팔로 아이를 안을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출산의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자 벅찬 감동이었다고 한다.
임신과 출산 후에도 래퍼가 넘어야 할 벽은 또 있었다. 바로 육아문제. 아이를 안아줄 수도 없는 그가 온전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아이 키우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입으로 젖병을 물리고, 아이옷을 입으로 물어 안전하게 들어 옮기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는 모유수유도 했다.
두 팔이 없는 래퍼가 숟가락을 입에 물어 아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자동차에 아이를 태워 짧은 두 다리로 운전하며 학교에 보내는 래퍼의 일상을 소개한 TV 프로그램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감동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임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도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삶의 감동 전한 세계적인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

자신과 아들이 모델이 된 사진을 관람하고 있는 앨리슨 래퍼(좌).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앨리슨 래퍼와 패리스 모자(우).



“사회복지사들은 내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아이를 양육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패리스를 복지시설로 보내라고 명령했어요.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제 아이니까요.”

래퍼는 자신의 장애를 꿋꿋이 이겨냈던 것처럼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아들을 지켜냈다. 그는 평소 자신의 장애에 대해 아들과 터놓고 얘기해왔고, 아들 패리스 역시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앨리슨 래퍼는 1965년 임신부가 수면제나 신경안정제를 복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해표지증(팔다리가 바다표범처럼 짧은 증세)’을 안고 태어났다. 헬렌 켈러와 오토다케 등 장애를 극복한 이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부모의 지극한 정성으로 성장한 데 반해 그는 친부모에게조차 철저히 외면당한 채 살아왔다.
“어머니는 저를 낳고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생긴 것도 끔찍한데다 곧 죽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무슨 괴물이나 외계인을 낳은 것처럼 일종의 저주라고 생각해 부끄러워했겠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에게 버림받은 래퍼는 영국 정부로부터 일반 가정에서는 양육할 수 없다는 판단을 받고 복지시설로 보내졌다.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래퍼는 “제 어린 시절 사진이라곤 모두 의료기관에서 찍은 자료 사진뿐인데, 하나같이 의수와 의족을 착용하고 있죠. 당시 사람들은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가짜 팔다리를 만들어줘야 조금이라도 정상인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하지만 전 무겁고 불편한 그것들이 정말 싫었어요”라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하지만 친가족조차 래퍼를 외면했던 그 시절, 그에게 따뜻한 애정을 준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 그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수잔나라는 간호사의 오빠 가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래퍼가 네 살 때 정식으로 입양하려 했으나 래퍼의 어머니가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태어나자마자 저를 버렸고, 저를 사랑해줄 다른 가족을 가질 기회조차 빼앗았어요. 지금도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장애아를 낳아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를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라 말하는 래퍼지만 그런 그에게도 사춘기는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기였다. 정상인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에 한때는 조금이나마 ‘덜 다르게’ 보이려고 의수와 의족에 집착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예쁘지 않다. 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지만 래퍼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추장스러운 의수와 의족을 벗어던지면서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17세에 복지시설을 떠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독립을 준비했다.
“당시 모든 걸 혼자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무척 겁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절대 독립적으로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했죠. 전 그런 편견을 깨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어요.”



“장애는 예술적이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뒤늦게 브라이튼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며 장애인이 아닌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팔 대신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재능을 키워 나갔다. 주로 자신의 나신을 모델 삼아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래퍼. 그가 회화작품에 전념해오다 사진작업을 하게 된 것도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춘기 시절까지 장애를 가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 수 없었지만 ‘밀로의 비너스’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림을 보는 순간 ‘오! 세상에 저건 바로 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팔다리 없이 몸체만 있는 조각작품 토르소는 예술 작품으로 감상하면서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은 차별 혹은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잖아요. 이런 편견을 넘어 장애가 예술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앨리슨 래퍼는 “팔 없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를 기형이라고 여기는 사회 속에서 육체적 정상성과 미의 개념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의 삶에 또 한 번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로 ‘임신한 래퍼의 조각상’이다. 영국 현대미술가 마크 퀸이 임신 9개월의 래퍼를 모델로 만든 5m 높이의 조각작품이 영국 런던 중심 트라팔가 광장에 전시되면서 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 그 덕분에 래퍼는 ‘살아있는 비너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지난 2003년에는 버킹엄궁에서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국민훈장을 수여받았고, 독일에서 열린 ‘2005 세계여성상’ 시상식에서는 장애에 대한 편견에 도전하는 예술작품으로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계여성 성취상’을 수상해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다.
래퍼는 “장애인도 모두 하나의 존재로서 중요하다”며 “한국인들이 장애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는 자신이 예술가로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의지 외에도 영국 정부의 많은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래퍼는 한국에서도 장애인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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